31p. 진료실 문 앞 몇 걸음 채 들어서지도 않았는데 "약 타실 때가 됐네요. 한 달 치 다시 처방해 드릴게요" 컴퓨터 모니터만 들여다본 채 클릭클릭 반복처방을 누른다. 환자는 들어오다 말고 "아.. 네.."하며 다시 나간다. 이렇게 영혼 없고 목적 없는 클릭을 통해 하루에 200명을 진료 보는 의사도 가능한 것이다. ... 우리세대(67년생) 의사들은 아날로그와 디지털 두 가지를 모두 겪은 세대이다.
33p 먼지와 죄와 병은 털면 털수록, 뒤지면 뒤질수록, 찾으면 찾을수록 나오게 마련인가 보다.
36p. 산부인과의사가 어느 마을을 지나가면 그 마을에 자궁이 모두 없어진다. 비뇨기과 의사가 다녀가면 어느 요양원에 전립선이 모두 없어진다. 정형외과 의사가 지나간 어느 동네에는 무릎관절이 없다. 외과전문의가 지나간 동네에는 갑상선이 없다.
41p. 의대 교육은 최면이고 세뇌다. 질문할 시간도 없고 의문을 품는 것이 용납되지도 않는다. 의과대학과 병원에는 진정한 의미의 대화란 없다. 일방향 지시와 복종이 떠나닐 뿐이다. 의사들은 사실 토론 같은 것 할 줄 모른다. 연장자(시니어)가 한마디 하면 꾹 소리 못하고 모두 쥐구멍으로 들어간다.
54p. 1980년 정형외과 전문의를 막 딴 선배 한 사람이 수도권 도시의 어느 중소병원에 취직을 했다. 설에 친지들이 모인 자리에서 어느 어른이 월급은 얼마나 받기로 했는지 물었다. 첫 월급이 천만 원이라고 대답했을 때 (당시 천만 원이면 집 한 채도 살 수 있는 값이었다) 방 안 에는 수 초간 정적이 흘렀다. 32년이 지나 2012년, 아는 후배가 정형외과 전문의를 막 따고 수도권 어느 중소병원에 취직했다. (인턴 레지던트를 했고 펠로우는 하지 않았다.) 그의 초임 월급은 팔백만원이었다. 높은 수입임에도 불구하고 감동은 없다.
68p. 대학병원 의대교수들의 진료 양상은 성과급 이전 시대와 이후 시대로 길린다. 2000년 이전의 의대교수들이 공무원에 가까웠다면 이후에는 기업의 임원들에 가깝다. 명예가 아니라 실적이 필요해진 것이다.
80p. 인대재건수술의 방법은 23가지나 할 줄 아는데, 단순한 배탈약 처방은 못하는 의사들을 수없이 양산해 내고 있다. 인대재건을 받아야할 사람이 더 많은가? 배탈약을 처방받아야 할 사람이 더 많은가? 그런데도 92%의 의사가 극도의 전문교육을 받고 있다.
82p. 많은 의사들이 말한다. "인턴은 6개월만 해도 충분해. 레지던트는 2년으로도 차고 넘쳐. 나가서 환자 보는 데 아무 지장 없다. 오히려 너무 오래 하다 보면 기본을 까먹게 되지."
111p. 신개념의 치료기구가 개발되었다고 하자. 돼지 실험과 사체 실험은 마쳤으나, 결과가 썩 좋지 않다. 생체를 대상으로 하는 임상시험은 아직 시작하지 못한 상황이다. 여러 전문가들도 의구심을 제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년 동안 쏟은 연구비가 있으니 회사 입장에서는 쉽게 접지 못한다. 접는다면 수년간 연구 개발을 이끌어 온 누군가가 책임을 지고 회사를 나가야 할 판이다. 그럼? 계속 가보는 거다. 임상시험으로 갈 차례다. 어느 나라에서 하면 좋을까? 각국의 담당자들은 서로 맡지 않으려고 은밀한 눈치싸움을 하고 있는데, 그 때 어디선가 이 임상시험에 대한 정보를 엿들은 모 의대 KOL(Key Opinion Leader 여론주도층) 교수는 눈치 없이 거꾸로 유치 압력을 넣는다. (저 교수는 저래야 정부로 부터 지원금을 받고, 대학에서 실적을 보일 수 있다.)
115p. 결론적으로 나는 근거주의를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쥐어짜서 나온 데이터들이라는 의심을 지울 수 없으므로 그냥 참고하는 정도에서 받아들인다. 임상에서 환자를 진료하는 일은 비선형적인 과정이다. 교과서대로 오는 환자는 오히려 드물다. .. 그래서 나는 오히려 산발적인 증례보고와 경험에 기초한 추론적 논문에 더 신뢰가 간다.
124p. 민간병원들 중에 정말 순수하게 자신만의 힘으로 지금처럼 우뚝 선 병원이 있는가? 그렇지 않다. 정부의 장려와 지원 속에서 온갖 이름의 국고지원금과 보조금으로 병원을 신축하고 병상을 늘리고 시설과 장비와 인력을 확충해왔다.
125p. 보건의료 계열 공무원에게 보건대학원이나 경영대학원 석박사 과정을 제공하느니, 차라리 병원 인턴 업무를 3개월 정도 체험할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그들의 직능관련 자기 개발에 훨씬 더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132p. 약을 적게 쓰고도 환자의 병이 낫게 하는 병원에 인센티브를 준다든지, 비급여항목 비율이 낮은 병원에 대해 혜택을 준다거나, 고혈압이나 당뇨병 유병율이 낮은 기업이나 자기 다리로 걸어 다니는 주민이 많은 지자체에 세금을 낮춰준다거나, 그런 방향의 정책은 어떨까?
139p. "공공병원에서 근무하는 이유가 뭡니까?" 자주 받는 질문이다. "그래도 공공병원은 아직까지 의사들이 비교적 소신껏 일할 수 있는 병원입니다. 둘째는, 작은 것에도 환자들이 진심으로 감사한다는 것이지요. 의사로서는 큰 보람입니다." "낙후되어 있지 않냐는 어느 관점에서 보는가에 따라 달라질 것 같아요. 시설이나 장비 같은 것은 아마 뒤떨어져 있다고 보는 게 맞을 겁니다. 하지만 하드웨어는 돈만 들이면 하루 아침에도 뒤엎을 수 있는 것이잖아요. 보다 근원적인 것은 의사들 마인드인데요, 마인드 측면에서는 결코 민간 병원에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145p. 문제는 공적 신뢰가 무너져 내린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사법부 재판결과를 곧이 곧대로 믿질 않는다. 의사들 처방을 의심스러워한다. 단통법은 누구를 위한 법인가 쓴웃음을 짓는다.
157p. 수십 년간 내과 의사들은 청진기 하나로 수많은 심장병을 몹시도 자세하게 구별해왔다. ... 지금 청진기만을 붙잡고 있다가는 경쟁력 없고 시대에 뒤떨어진 돌팔이 의사 소리 듣기 딱 좋을 것이다. ... 숙련된 의사들은 붕대를 풀며 상처에서 나는 냄새만 맡고도 배양검사 없이도 병균의 정체를 짐작했다.
158p. 예전에는 두드리고 흔들어만 보고도, 십자인대가 끊어졌는지 아닌지, 부분 파열인지 전파열인지, 반월상연골판 어디가 어떤 모양으로 찢어졌을지, 기가 막히게 맞춰냈다. 지금은 MRI 안 찍고 수술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가 없다.
178p. 질환별로 청진 소리가 녹음된 카세트테이프를 테이프가 늘어지도록 듣고 또 들었다.
161p. 점점 더 진찰할 이유도 필요도 사라져 간다. 진찰대에 눕히기 전에 바로 검사실로 보낸다. 의사들은 질병 진단에 있어 컴퓨터에게 자문을 구한다. 고된 노력과 실제 경험을 통해 연마되던 그 기회도 점점 사라졌다. 의사가 고전적 아날로그 `노하우`를 연마하는 경우가 감소한다. 그러므로 진료 노하우를 익힐 필요도 사라져간다.
162p. 진료실에서 의사의 전통적 세 가지 역할, 검사자, 해석자, 치료자로서의 역할 중에서 검사자로서의 역할은 거의 다 넘어갔다. 해석자로서의 역할도 많은 부분 넘어가고 있다. 치료자로서의 역할은 일부 넘어가기 시작하고 있다.
170p. 그동안 병원의 많은 업무가 고학력 저임금 계약직 전공의에 의존하여 불안정적으로 운영되어 왔다. 하지만 이제는 보다 안정적이고 지속적으로 책임감을 지닌 사람들을 새로운 직능으로 양성화하여 이들에게 전공의들이 커버해오던 여러 기능을 맡기는 방향으로 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179p. 의사는 점점 재미없는 직업이 되어가고 있다. 1) 전문가의 자율권이 점점 사라진다. => 보험공단의 지침은 자고 깨면 바뀐다. 꼭두각시가 된다. 2) 할 일이 점점 단순해진다. => 기계가 판독까지 달아서 나오니 재미가 없어진다. 3) 잉여 의사들이 많아져서 재미를 따지기 전에 생존의 문제가 되어버렸다.
188p 의사로서 살아남을 자들의 요건 1) 소통 능력. 소통하고자 하는 진실한 마음이 필요하다. 2) 의료 바이링구얼. 디지털, 아날로그 둘 다 진료가 가능해야 한다. 현실적으로 수련 환경이 어렵지만, 검사장비도 없고 약도 없고 보조 인력이 없어도 조치할 줄 알아야 한다. 3) 의사의 살 길은 전문화가 아니라 환자를 위하는 사명감 재무장이다.
192p. 소화기내과 실습 시절 강진경 선생님이 대학병원의 세 가지 사명은 진료, 교육, 연구, 그 중 제일은 연구라 하셨다. 24년이 지난 2014년 지금 다시 묻는다면 "돈과 명예와 권력 입니다. 돈을 위한 연구, 명예를 위한 연구, 권력을 위한 연구입니다." 이렇게 대답하지 않을까? 병원장들에게 묻는다면 "경영을 위한 진료, 경영을 위한 교육, 경영을 위한 연구, 경영이 최우선 가치입니다."
198p. "우리 병원은 임상시험을 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멋진 문구인가? 모든 병원과 의사들이 경쟁적으로 임상시험 한 건이라도 더 수주하여 실적을 올리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판국에 이런 엇나감이라니..
199p. 환자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병원을 바라는지 의사들과 병원들은 귀 기울여야 한다. 1) 바가지나 속임수 없는 병원 2) 고가의 검사나 수술부터 무조건 들이대지 않는 병원 3) 의료인과 넉넉한 시간을 이야기 나누고 성심껏 진찰 받을 수 있는 병원 4) 과잉 의료가 아닌 적정 의료를 받을 수 있는 병원 5) 득이 되진 못하더라도 최소한 해가 될 법한 희한한 시술은 권하지 않는 병원 6) 횡행하는 임상시험 없는 병원 7) 돈이 없더라도 꼭 필요한 진료라면 사회복지사를 연결해서라도 어떻게든 받을 수 있는 방안을 찾아주는 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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