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속의 독수리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16
윌리스 브림 지음, 유향란 옮김 / 문학동네 / 2005년 4월
품절


"나(막시무스)도 두려다네. 하도 겁이 나 더이상 토할 수도 없을 만큼."
그(아르토리우스)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마치 내가 자기를 비웃기라도 한다는 듯.
"하지만 장군님은 군인이시지 않습니까?"
"그야 그렇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두려움이 사라진 건 아니라네.우리 모두 다 그렇다네. 기다리는 것이 먼저지. 전선이 구축되고 진격 명령이 떨어지면 차라리 괜찮아.자신의 땀냄새도 이웃한 아군의 땀냄새도 다 맡을 수 있다네. 그러면 자네는 아, 이들이 여기 있어 내 좌우를 지켜주는구나 하는 생각에 젖어들게 되지.바짝바짝 타들어가는 입술로 가벼운 농담을 던져 기분을 복돋울 것 같으면 옆에서도 맞장구를 쳐주지.그러면 눈앞의 전투를 전에 실시했던 모든 훈련이나 연습과 마찬가지로 무슨 놀이인 양 생각하게 된다네.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태란 고작 군단장에게 야단을 맞거나 열 받은 백인대장이 특별 노역을 시키는 일 정도라고 생각하게 되지.그러는 가운데 진격 나팔이 울리고 전선이 앞으로 이동한다네.-502쪽

그러다가 거친 땅이나 덤불숲을 피하다보면 어쩔 수 없이 흩어져서 아군 병사가 더이상 가까이에 남아 있지 않게 되지.적이 창을 집어던지고 아군이 비명을 지르며 넘어져가는 꼴을 목격하게 된다네. 그런데도 정작 내가 맞으리라는 걱정은 안 하게 되거든. 참으로 웃기는 노릇이지. 마친 자신은 불사신이라도 되는 듯한 환상에 빠지게 되는 거라네.부상을 당하거나 죽는 사람은 늘 다른 사람이지 절대로 나는 아닐 거라는 군인들의 환상 말일세.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날수록 - 설령 죽은 자가 자기 친구일지라도 - 그런 환상은 점점 더 강해진다네. 그리고 사실상 그런 환상이 없다면 절대로 전진할 수 없는 법이지."-503쪽

문득 말을 멈추고 보니 그의 얼굴에서 잠시나마 두려운 기색이 사라져 있었다. 내가 하는 말에 푹 빠져 있었던 것이다.내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기다리고 있는 적에게 점점 가까이 다가갈수록 지독한 고립감이 엄습해온다네. 왼쪽으로 오 야드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아군 병사가 오천 야드 밖에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 그런 고독감은 점점 강해져서 마침내 우리 부대 전체에서 나 혼자만 전진하고 있다고 확신하게 되는 지경까지 이른다네. 그러면 불현듯 두려워지면서 돌아서서 도망쳐나오고 싶어지지. 그 순간 우리를 계속 전진하게 하는 것은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기묘한 자존심뿐이라네. 그러다가 적병이 창이나 칼로 공격해오면 그 순간부터는 그 동안 받았던 훈련과 연습이 그 자리를 대신하지. 이제 두려움이나 고독감 따위로 불안에 떨 시간은 더이상 없다네. 그저 싸우는 거지. 끝장을 볼 때까지 줄기차게 싸울 뿐이라네."
-503쪽

"나(막시무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소, 군데리크 왕이여-"
그 순간 궁수가 화살을 날렸다. 화살이 망토를 뚫고 방패를 지나 어깨에 박히면서 극심한 고통이 느껴졌다. 충격으로 인해 몸이 옆으로 기우뚱했고, 비틀거리면서도 필사적으로 균형을 잡느라 애쓰는 와중에 두 발의 화살이 더 날아와 방패에 박혔다.-515쪽

"퀸투스!"
군데리크가 뒷걸음질쳐서 왼편으로 물러났다. 그가 마치 고양이처럼 날새게 칼을 잡아들자 소름 끼치는 무시무시한 소리와 함께 칼집에서 칼이 빠져나왔다. 그가 단칼에 나를 죽이려고 칼을 높이 치켜든 순간 부옇게 빛나는 칼날이 허공에서 번쩍이는 것이 보였다.
나는 아그리콜라의 칼로 그의 오른편을 겨누며 한 발 앞으로 나아갔고, 순간 내 팔이 살짝 구부러졌다. 내가 팔꿈치를 쭉 펴자 그의 칼이 팔길이만큼 내려가면서 그의 손에서 떨어져나와 내 방패의 가장자리를 넘어 어깨 위에 얹혔다. 잠깐 동안 우리는 서로 마주보면서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그가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반달 족이어야 하는 건데······"
내가 대답했다.
"설사 왕이라 해도 삼 인치면 충분할 테지."
그의 무릎이 꺾였고 그가 넘어지는 순간 나는 그를 붙잡았다.
해자 가장자리에 매복하고 있던 궁수는 여섯 발의 화살을 맞고 죽었다. 나는 죽은 왕을 끌고 널빤지를 건너 돌아왔다.-5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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