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141085 

pc통신으로 애니메이션, 만화, 대중 음악, 유머, 채팅방에서 여자나 꼬시고 다니고 

게임과 도박과 술에 빠져 대학생활을 보내던 내게 

대학생이라면 "시사잡지"정도는 읽어줘야 한다라는 인식을 가지게 한 글. 

이후 강준만의 "김대중 죽이기", 김규항의 "B급 좌파", 박노자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을 

읽으며 머리에 빨간물을 들이다.

 

<김대중 지지자가 본 노무현과 이인제> - 전대원

노무현과 이인제라는 이름을 알게 된 것은
1988년에 개최되었던 5공비리와 광주 청문회를
통해서였다.

한 사람은 5공비리 청문회를 통해서
나머지 한 사람은 광주 청문회를 통해서
나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 주었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와 잘 모르겠다는 일관된
증인들의 답변을 끝까지 논리적으로 파고들어
증인들을 매섭게 몰아세우던 모습이
지금도 머릿속에는 흥분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노무현과 이인제.

이 두사람의 이름을 알게 된 계기가 비슷해서인지
많은 정치적 격변 속에서 이 두사람의 정치적 행동을
비교해서 보곤 하던 습관이 있었다.

청문회 정국으로 유명해진 두 사람은
똑같이 YS의 정치적 후원으로 정계에 입문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인제가 김영삼 대통령과 정치적 부자관계라는
이야기는 이미 식상할 정도로 유명한 사실이며

노무현 역시 88년 4.26 총선때
당시로서는 고졸학력의 풋내기 정치인으로서
3허 중의 하나로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던
허삼수를 이기고 부산에서 당선되는 파란을 일으킨데는
당시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의 순전한 도움때문이었다.

그리고 똑같이 김영삼씨가 총재로 있는 통일민주당의
국회의원으로서 청문회에 특위 위원으로 참가해
일약 대중적 정치인으로 부각되었던 것이다.

이 둘의 정치적 행로가 갈라진 것은 3당합당이었다.

노무현은 부산에 지역구를 둔 국회의원임에도
김영삼의 정치적 변절을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다.

이인제는 명분없는 3당합당에 참여하는데 주저하였으나
이내 김영삼의 끈질긴 설득에 넘어가고 말았던 것이다.

노무현은 정치적인 명분을 택하였고
이인제는 정치적인 실리를 선택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지금 나에게 두 사람에 대한
평가에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되고 있다.

나는 노무현이 3당합당에 반대한 것을 보면서
무한한 존경과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을 느꼈고

이인제가 3당합당에 따라가는 것을 보면서
기대했던 정치인에 대한 처절한 실망감을 맛본 것이다.

그러나 명분을 택하였던 노무현은
부산에서 김대중 깃발을 들고 출마하여
낙선의 쓴 맛을 보아야하만 했다.

자신과 행로를 같이 했던 꼬마민주당 출신의 후보들이
다른 지역에서 줄줄이 당선의 축하를 받을 때
비슷한 처지의 동료 김정길과 함께
낙선의 고뇌를 되씹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인제는 경기도 안양에서
손쉽게 재선의 고지에 올랐다.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 부산 출신 노무현은
전라도 출신 김대중의 당선을 위하여
곳곳을 돌아다니며 지지 연설을 하였다.

자신의 국회의원 낙선이 바로 김대중 때문이란 것을
그 누구보다도 자신이 잘 알고 있을 것임에도
그는 아직도 남아있는 카랑카랑한 경상도 억양으로
김대중 지지를 역설하고 다닌 것이다.

92년 지지연설 때 들었던,
"니 와(왜) 대중이한테 붙었노?"라는 비난을
부산의 죽마고우들에게 듣는다는
노무현의 지지연설 중 나왔던 뼈가 섞인 농담은
지금도 가슴 아픈 기억으로 내게 남아 있다.

김영삼이 대통령이 되고
이인제는 노동부 장관을 지내는 등 승승장구했고
노무현은 낙선 정치인으로 세월을 지내야 했다.

그리고 이후에 실시된 지자제 선거에서도
둘은 똑같이 광역자치단체장 후보로서
한 사람은 경기도지사로 한 사람은 부산시장 후보로
출마하였다.

그리고 예외없이
이인제는 경기도 지사에 당선되었고
노무현은 부산시장에 떨어지고 말았다.

명분보다 정치적 실리를 택한 정치인의 연전연승이요
실리보다 정치적 명분을 택한 정치인의 연전연패인 것이다.

경기도 지사직을 중도 사퇴하고
전국을 돌며 약속했던 경선승복의 약속을
헌신짝처럼 내던져버리는 이인제를 보면서

노무현이라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지난친 비약이 될까?

한겨레21이라는 주간지에
"이인제가 출마하면 나도 나가겠다"라고 말한
노무현의 기사가 실린것을 우연히 보았다.

이인제는 세대교체를 말할 자격이 없다면서
이인제가 세대교체의 대표주자가 되는 것을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가끔 현실 정치에서 나의 이상과 똑같이 행동하는
정치인이 있다면 그것은 노무현이 아닐까 생각하는데
이인제를 바라보는 시각도 한 치의 오차 없이 일치했다.

김대중 반대자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김대중을 지지하면서 다른 후보 지지자들에게
도덕적 열등감을 느껴본 적은 전혀 없다.

어쩌면 오히려 도덕적 우월감이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노무현이 나온 다면
그 어떤 후보가 나와도 굳건했던 나의 한표가 흔들릴 것이고

만약에 노무현이 대선후보로 나오는데도
김대중을 지지하게 된다면 노무현 후보를 지지하는 사람에게
엄청난 도덕적 열등감을 느껴야만 할 것이다.

노무현은 그동안의 정치적 행보를 평가해 보건데
오직 이미지와 대중적 인기만을 추구하는 많은 정치인들과
분명한 선을 긋는 차이점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보기 드물게 현실 정치인 중에서
내가 좋아하고 존경할 수 있는 정치인인 것이다.

나는 이인제가 세대교체의 대표주자가 되는데
무척 비애감을 느끼고 있다.

만약에 세대교체가 정권교체보다 중요한 명제라는 것을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그 대표주자 자리는 이인제가 아니라
노무현이 차지해야 한다.

만약에 세대교체 대표주자가 이인제가 아니라
노무현이 된다면 나는 미련없이 김대중을 버리고
노무현을 지지할 것이다.

 

- 1997년 10월 경, PC통신 하이텔 게시판 플라자에 올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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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28 20: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풀먹는사자 2009-06-04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맘에 드는 글 1.
딴지일보 추모사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들이 활개치는 세상에서, 한줌 부끄러움에 몸을 떨던 자 결국 그 자신을 버림으로써 마지막 남은 자신의 존엄을 지키다.

'인간 노무현'에 대한 추도사는 이 한줄로 족하리라.

'정치인 노무현'을 위한 추도사는 한줄로 부족하다.

지역주의, 권위주의, 보스정치, 계파정치에 맞선 그의 도전과 그 한계까지도, 그 자신이 마지막으로 남긴 유서에서 밝힌 대로 "먼 훗날 역사가 밝혀줄 것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딴지 편집부 일동

http://www.ddanzi.com/articles/article_view.asp?installment_id=256&article_id=4385

풀먹는사자 2009-06-04 17: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맘에 드는 글 2.
김어준 추모사 - 먼저 읽어서 그런가? 한겨레에 실은게 더 맘에 듦.

[근조] 나는 그를 남자로 좋아했다
http://www.ddanzi.com/articles/article_view.asp?installment_id=256&article_id=4398


[매거진 esc] 나는 그를 남자로 좋아했다
http://www.hani.co.kr/arti/specialsection/esc_section/357349.html

풀먹는사자 2009-06-05 0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맘에 드는 글 3.
김규항 블로그에서

무사의 죽음

어리석은 형제와 아내와 자식들이 연루된 일로
그의 오랜 정적들이 그를 죽이려 악귀처럼 달려들었다.
몇몇 옛 동지들이 그를 팔았고
그를 대통령으로 만든 신문들은 역사적 책임이라도 질세라
“국민의 가슴에 못을 박았다!” 고함치며 발을 뺐다.

신중하고 또 신중했어야 할 측근들은
“생계형 범죄”니 “순수한 정치 보복” 따위 모자란 말이나 일삼아
그를 더욱 헤어날 수 없는 수렁으로 밀어 넣었다.
노란 손수건을 든 모든 사람들은 그를 구하는 일보다는
그를 향한 제 감정을 발산하는 일에 충실했다.
결국 그를 도울 아무 것도, 단 한 사람도 남지 않았다.

절대 고독 속에서
그는 깊은 침묵의 마지막 칼을 빼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모든 비루한 것들을 단번에 베어냄으로써
“자연의 한 조각”으로 돌아갔다.
무사의 죽음이었다.

사람들아,

그 죽음 앞에서
한 달을 지속 못할 입에 발린 칭송도
싸구려 신파조의 추억담도 모두 접고
깊은 침묵으로 예를 갖추자.
아직 순전한 이상주의자이던 시절 그가 꾸었던 꿈만을 되새기자.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명복을 빕니다.)


http://gyuhang.net/entry/무사의-죽음-1


정중한 침묵을
http://gyuhang.net/entry/정중한-침묵을

용서와 기억
http://gyuhang.net/entry/용서와-기억-3

눈물
http://gyuhang.net/entry/눈물-3

꿈을 잇는 사람들
http://gyuhang.net/entry/꿈을-잇는-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