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에서는 행동적 측면과 심리적 측면의 문제를 논할 때 크게 두 종류로 나눕니다.
하나는 내재화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외재화 문제입니다.3 이는 유아기에서 청년기까지의 젊은 세대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문제를 정리하여 논할 때 사용되는 기법입니다.
내재화 문제란 우울하거나 불안하거나 공포를 느끼는 등 본인 내부에 문제가 존재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반면에 외재화 문제는 본인의 욕구나 충동을 억제하기가 힘들어 주의가 산만해지거나 공격적·반항적인 행동을 보이는 등 반사회적 행동으로 이어지기 쉬운 상태를 가리킵니다.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수많은 빌런들. 이 책에서는 그러한 빌런들이 지닌 ‘어두운 성격 특성’이라 불리는 일련의 성격군을 다룰 예정입니다.
그렇다면 ‘성격’이란 뭘까요?
일반적으로 ‘성격’이라고 하면 사람에 따라 다양한 이미지를 떠올리거나 의문을 가질지도 모릅니다. 가령 성격은 타고나는 것인지, 일단 형성되고 나면 바뀌지 않는 것인지, 성격과 기질은 다른 것인지, 성격과 능력·기술은 무엇이 다른지 등과 같이 말이지요. 이 책에서는 주제별로 설명을 하면서 성격이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어떨까요? ‘성격은 체중과 비슷하다’라고 말이지요.

성격도 이와 비슷합니다. 외향성(↔내향성)을 예로 들어 볼까요? 성격 검사 중엔 ‘외향형’과 ‘내향형’으로 분류하는 경우가 있는데, 실제로는 사람마다 수치가 조금씩 다르므로 그렇게 단순히 분류하기는 힘듭니다. 대부분은 평균치 가까이 위치하며, 극단적으로 외향적인 사람이나 극단적으로 내향적인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성격은 안정적이지만 변화합니다

다만, 아주 내향적인 성격에서 아주 외향적인 성격으로 180° 변하지는 않습니다. 체중이 변화하는 것처럼, 생활에 변화가 생기면서 조금씩 달라지는 것이지요

긍정적인 심리학적 측면이나 좋은 성격에 주목하는 것과 어둡고 나쁜 성격에 주목하는 것은 마치 맞거울과 같은 관계입니다.

성격의 좋고 나쁨은 그 성격의 본질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격의 좋고 나쁨은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가’로 판단됩니다.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성격은 ‘좋은 성격’이고, 나쁜 결과로 이어지는 성격은 ‘나쁜 성격’인 것이지요. 언뜻 들으면 간단해 보이지만, 그리 간단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격이 좋은 결과로 이어질지 나쁜 결과로 이어질지는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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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슬픈 세상의 기쁜 말 - 당신을 살아 있게 하는 말은 무엇입니까
정혜윤 / 위고 / 2021년 8월
평점 :
판매중지


슬픈 세상의 기쁜 말이라…이율배반적인 말 같다는 개인적인 생각을 잠시 하고 책을 읽고 나니 ‘당신은 삶에서 무엇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나요?‘ , ‘어떤 단어들로 당신을 표현하고 싶으신가요?‘ 등등 이런 질문을 받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부끄럽게도 딱 떠오르는 단어가 없다.
지금까지 나조차도 나를 모르고 있었나, 아니 나 자신을 들추어 보고 싶지 않아 외면하고 있었던 게 이닌 이상 이렇게까지 당장 떠오르는 단어가 하나도 없을 수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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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현실적, 물질적 제약에 매여 있는 우리에게는 부자유가 주어졌다. 지옥이 있으므로 천국이란 단어가 필요했던 것처럼, 슬픔이 있으므로 기쁨이란 단어가 필요했던 것처럼, 삶이 짧으므로 오래오래 기억될 아름다움이 필요했던 것처럼, 우리에게는 자유라는 단어가 필요하다. 이 부자유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세상이 무엇이라고 하든 우리 안에 파괴될 수 없이 소중한 무언가를 지키는 것. 그러나 사적으로는 자아에 엄청나게 집중하면서도 공적으로는 위축되고 소심해져, 서로가 서로를 두려워하는 초긴장 신경증적 지옥을 사는 우리가 내적으로 소중한 무언가를 버리기는 얼마나 쉽던가. 이 와중에도 자신의 무언가를 꿋꿋하게 지키고 사는 인간의 모습은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품위’라고 말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시간이 갈수록 새록새록 매료된 것은 할머니의 ‘말’에 대한 믿음이었다. 할머니는 우리가 나누는 대화 속에 뭔가 중요한 것이 있을 수 있고 그것을 공유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 믿음을 가지고 인간들끼리 나누는 ‘말’이라는 신비 속으로 뛰어들었고, 앞날에 죽음 말고는 기다릴 것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고 새롭게 배우고 알려고 했다. 그러나 지금, 말에 대한 믿음이야말로 사라지는지도 모르게 사라져가는 중이다. 다른 모든 좋은 것들처럼. 한 방에 날려버리고 말겠어, 라는 의도를 가진 말들이 넘쳐난다. 나는 말 뒤에서 독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을 무력하게 바라보고만 있다.
나는 ‘귀가 배지근해지다’라는 말 자체에도 매료되었다. ‘귀가 배지근해지다’는 다른 말로 하면 ‘눈뜨고 살다’이다. 의미 있는 말은 눈을 뜨게 만들어줄 수 있다. 좋은 목소리는 늘 내게 말한다. 눈 좀 떠봐! 그러나 아쉽게도 의미 있는 대화는 많이 사라졌고 그나마 남아 있는 말조차 나는 잘 듣는 데에 실패한다. 늘 잘못 알아듣거나 대충 흘려듣는다. 할머니의 말 중에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말이 있었다. "내가 이런 말을 들으면 천국의 모습이 바뀔지도 궁금해." 내가 이 말을 이해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천국을 상상하는 일은 한 인간이 영원한 잠을 향한 여행을 떠나기 전 꿀 수 있는 가장 좋은 꿈이다. ‘내가 이것을 듣게 되면 천국의 모습이 바뀔까?’라는 말은 ‘남은 생을 어떤 생각을 하면서 살아갈까?’라는 질문을 그 안에 품고 있다고 나는 느낀다.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는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을 집필하면서 황제가 죽기 전에 남긴 시편의 마지막 구절로 글을 마무리한다. 지금 그 글이 생각난다.

늘 하던 농담, 장난은 이제 못하리니. 한순간 더 우리 함께 낯익은 강변들과 아마도 우리가 이제는 다시 보지 못할 사물들을 둘러보자… 두 눈을 뜬 채 죽음 속으로 들어가도록 노력하자.

한 인간이 생에 보낼 수 있는 최고의 작별인사다.
장난치면서도 두 눈을 부릅뜨고 살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요새 여러 가지 이유로 할머니 생각을 자주 한다. 천국이란 단어를 확장 중이기 때문이다. 천국에 가면 신이 딱 한 가지 질문만 한다고 들었다. "그래, 너는 너의 한 번뿐인 인생으로 무엇을 한 거지?" 그에 해당하는 좋은 대답들은 다 천국의 맛을 풍길 것이다

이런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당신은 타인을 볼 때 무엇을 보는가?"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타인이 무엇을 가졌는지, 무엇을 누리는지를 주로 볼 것이다. 우리는 타인이 잘 지내고 있다는 생각에, 내가 누리지 못하는 것을 누린다는 생각에 고통을 받는다. 반면 타인을 볼 때 그 사람이 지고 있는 무게를 보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자신의 고통으로 타인이 지고 있는 무게를 가늠해보는 사람 또한 드물다. 하지만 아주 큰 고통을 겪은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런 사람의 말은 다르다. 그는 영혼에 바다를 품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런 사람이 너무나 드물기 때문에 그는 전설이다. 우리는 이 전설적인 인물과의 만남을 행복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문제는 이 행복이 행복인 줄 모르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남에게 무게를 싣지 않으려는 사람에게 거리낌 없이 무게를 실으려는 사람은 많다. 무시무시할 정도로 타인의 무게를 느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슬픔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슬픔은 사라지는 단어가 아니다. 슬픔은 오겠다는 기별도 없이 제멋대로 마음 내키는 대로 수시로 온다. 눈을 감아도 온다. 슬픔이 오는 것을 막을 수 있는 눈꺼풀은 없다. 슬픔은 거친 밤을 기진맥진 통과하게 만든다. 슬픔은 자신을 진지하게 대하라 요구하는 손님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이 슬픔이야말로 딸에게서 엄마가 받은 유산인걸. 저절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면 슬픔도 눈물처럼 어디론가는 흘러가야 한다.

하쿠나마타타. 이 말을 한 사람이 딸의 뼈를 만진 손으로 찬란한 해바라기를 수놓았다는 것은 잊을 수 없는 일이다. 그는 최악의 상황을 이야기의 출발점으로 삼을 줄 알았다. 나는 그토록 깊게 슬퍼한 사람이 타인의 행복을 바란다는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놀란다. 슬픔과 아픔이 경이롭게 변한 말, 하쿠나마타타. 생의 경이가 아니라 생의 경시가 가득한 이 사회에서 조건이 하나 붙으면 이 말은 백 퍼센트 진실에 가까워진다. ‘당신이 싸울 준비가 되어 있다면.’

우리는 우울 속에서도, 슬픔 속에서도, 백 퍼센트 우울만도 슬픔만도 아닌 순간을 살 수 있다.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것이 아예 하나도 없다는 것은 과장이다. 우리가 느낄 수만 있다면. 왜냐하면 우리의 기쁨과 슬픔은 다른 모든 것과 함께 만들어지고 있는 중이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알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우리들 속에서 따스해진다는 일 아닌가!"라는 말이 있다. 우리 가슴에 살아남아 있는 따스한 무언가는 각자의 가슴속 빛의 영역에 속한다. 삶이란 힘든 것이고 우리를 둘러싼 조건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어둠은 쉽게 물러나는 법이 없고 매번 다시 찾아오고 우리는 자주 지치고 힘을 잃고 우울하다. 그러나 완전히 그렇지는 않다. 가끔은 기쁘고 질서가 잡혀 있다고 느낄 때도 있다.

야채장수 언니는 이 ‘완전히 그렇지는 않은’ 자기만의 시간과 방법을 만들고 살아냈다. 누군가 자신의 문제를 풀려고 이토록 노력했다는 것은 그 자체로 감동적인 일이다. 야채장수 언니는 대단한 업적을 이루지는 못했을지 몰라도 삶을 소중히 했다. 삶에 대한 사랑이 그녀를 지켰다. 우리도 그녀처럼 가볼 수밖에 없다. 우울과 혼돈 속에서 질서를 잡아가면서, 먼 빛이든 가까운 빛이든 희미한 빛이든 내면의 빛이든 한 발 한 발 따라가면서.

인간이 가진 힘 중 수치로 가장 측정하기 힘든 것 중 하나가 회복력이라고 들었다. 측정하기는 힘들지만 상처받았던 사람들의 회복력이 눈에 띄게 강해지는 순간이 있다고 한다. 대체 그때가 언제일까? 갑자기 다른 사람 혹은 다음 세대, 혹은 다른 생명을 생각할 때, 그때 인간은 놀랍게 회복된다고 한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회복력은 다른 생명도 구하고 자기도 구하는 엄청나게 귀한 힘이다. 엄마에게 잘 맞아떨어지는 설명인 것 같다.

나는 우리 인류가 곁에 있던 것이 사라져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존재로 변해버리는 것을 슬퍼하는 능력을 잃지 않았기를 바란다. 우리 인류가 아무런 감동이 없는 세계에서 사는 것을 선택하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 인류가 어떤 일이 나쁘다는 것을 알면 그만둘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상상력 없이는 하루도 못 사는 우리 인류가 새들의 비행을 상상할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 인간의 심장은 3백 그램이다. 새의 무게는 113그램이다. 우리는 그 작은 새의 용기에서 배울 것이 많다. 난기류와 폭풍우와 번개 속을 나는 새의 용기를 배울 수만 있다면 우리의 용기도 달라질 것이다.

세월호라는 단어는 아직도 내 가슴에 너무나 생생하다. 나에게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세월호라고 말하는 순간 거의 모든 사람의 시간이 잠시 멈춘다. 그 단어를 듣는 순간 이미 우리 가슴은 지금 여기가 아니라 어딘가로 떠난다. 거의 모든 사람의 눈에 작은 눈물이 맺힌다. 그냥 그 단어만 말해도 그렇다. 시간은 흐르고 많은 것은 잊히는데 왜 이 이야기는 우리를 멈춰 세우는가? 이 이야기에는 뭐가 있는가?
세월호 1주기가 지나고 유족들과 함께 광주 5·18 유족들을 만나러 간 일이 있다. 그때 세월호 부모님들은 우선 5·18유족들에게 사과를 하고?"저희가 너무 오랫동안 5·18에 무관심하게 살았습니다. 겪어보니 알겠습니다. 비통하게 가족을 잃는다는 게 어떤 건지…. 저희의 무관심을 사과드립니다. 저희가 너무 오래 외롭게 만들었습니다."

아이들에게 코로나와 기후위기 시대에 대해서 뭐라고 말해야 할까? 이제 우리는 마스크로 중무장을 하고 귀에는 이어폰을 꽂고 타인과의 접촉을 최대한 피하는 중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게 점점 더 폐쇄적이 되어서 타인의 슬픔과 불행과 함께하겠다는 생각을 잃어가는 중이라고 말해야 할까? 우리 머리 위에는 무한한 하늘이 아니라 CCTV가 있고 그것이 우리가 누구인지를 증명해주고 우리의 하루를 대신 말해준다고? 점점 더 외로워진 우리는 죽음이 아니라 얼음 같은 차가움 속을 살아가는 것을 꽤나 두려워하게 되었다고? 사방에 냉담한 말이 넘쳐나서 살아 있다는 것을 기뻐하기는커녕 실감하지도 못한다고? 실은 우리도 두터운 유리창 안에 갇혀 있다고? 우리를 가두는 벽이 어디에서 시작되었으며 어디서 끝날지도 알지 못하는 채, 탈출은 꿈도 꾸지 못하는 채. 그리고 가장 하기 민망한 말. 아직도 아무것도 구해내지 못하고 있다고?
우리는 죽은 아이들에게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안다(그렇게 살고 있어도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안다). 우리 마음은 죽은 사람에게 더 이상 슬픔을 주고 싶어 하지 않는다(이것은 나의 소망에 불과한가?). 어쨌든 우리는 죽은 사람들에게 여기는 이제 그만 잊으라고, 우리에게 맡겨놓으라고 말한다. 세월호라는 단어는 우리 모두의 현실을 바꿔줄 수 있는 힘을 가진 단어다. 이 단어 앞에서 슬퍼하고 고통받는 능력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삶에는 함부로 파괴해서는 안 되는 뭔가가 있다고 생각한다. 생명에는 귀하게 여겨야 할 뭔가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슬픈 마음과 현실을 연결시킬 때 변화는 가능하다. 우리는 현재와 미래를 연결하는 능력을 거의 바닥까지 상실한 듯이 살고 있지만, 과거에서 배우는 능력 또한 잃은 듯이 살고 있지만, 시간 속의 존재임을 잊고 살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스스로를 시간의 맥락 속에서 봐야 한다. 우리 인간은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를 계획하면서만 질서를 잡고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연결하기 시작하면 우리가 기대했던

우리가 동시에 뒤돌아보던 모습은 내 마음 속에 한 장의 사진처럼 남아 있다. 이 슬픈 사람들의 마음을 세상과 연결시켜주는 단어는 생명에 대한 ‘사랑’이다. 아버지가 여치를 집어들던 작은 몸짓 하나만 말하려고 해도 그의 전 생애에 걸친 사랑 이야기가 필요할지 모른다. 그 몸짓을 보면서 나는 한때 지상에 태어나 살았으나 이제는 없는 한 아이의 존재를 느꼈다. 이제는 곁에 없는 우리가 사랑했던 사람들은 이렇게 우리 몸을 통해 무수히 돌아오고 또 돌아와야 한다.

총기 사건이 터지고 몇 달 후 콜럼바인에 신입생이 들어오자 교장은 학생들에게 말했다.
"신입생들은 여러분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고통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들을 도와주세요."
이미 극심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앓고 있던 학생들에게 교장선생님의 말은 어처구니없었을지 모른다. 이미 자기 문제로도 충분히 힘든데 무슨 힘이 남아돌아 누구를 돕는단 말인가? 하지만 대부분의 학생이 교장의 말을 따랐다. 교장의 생각은 옳았다.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면 살 수 있다. 잭의 말대로 힘을 주면서 힘을 얻는

콜럼바인 고등학교에서 다시 수업이 시작되던 날, 모두 하얀 티셔츠를 입었다. 티셔츠는 앞에는 ‘우리는’, 뒤에는 ‘콜럼바인’이라고 써 있었다. 에릭의 일지에 단 한번도 등장하지 않은 단어가 있었다. 바로, 흰 티셔츠의 앞에 써 있던 ‘우리’였다. 에릭이 결코 염두에 두지 않았던 삶, 딜런이 되고자 했으나 결코 돼보지 못한 것. 하지만 잭과 헤더가 창조한 것, ‘우리’였다.
세상은 서로의 차이를 서럽도록 강조하고 우리는 서로를 결코 이해하지 못하고 그 사이에 시간은 오싹할 만큼 창백하고 차갑게 흘러가지만, ‘우리’가 될 수 있다면 많은 것이 달라진다. 타인은 힘겨운 지옥일 수도 있지만 그러나 언제나 고독을 뚫고 나오게 하는 것 또한 타인의 존재다. 사실, 우리가 눈물 흘리는 것도 우리가 혼자라고 생각해서 아닌가? ‘우리’가 되면 내게 일어난 많은 일은 내게만 중요한 일이 아니게 된다. 한때 혼자서만 슬퍼했던 경험이 공통의 경험이 된다. 거기서 나는 내가 아닌 척할 필요가 없다. 훨씬 더 이상적인 나인 척할 필요도 없다. 아무 일도 겪지 않은 것처럼 행동할 필요도 없다. 거기서 내가 누군가를 환영한다면 나 자신도 환영하는 것이다. ‘우리’는(혼자일 때는 드러나지 않았던) 저마다의 숨겨진 힘을 보여줄 수 있는 단어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 자신의 가치를 발견한다. 나누고 도움이 될 만한 것이 자신에게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나에게 도움이 되었던 것은 타인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목소리를 나누는 것이 치유인 이유는 내가 존재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 내가 왜 이 일을 겪었을까 잠시나마 이해 비슷한 것에 이르기도 한다. 우리는 ‘우리’라는 단어 안에서 혼자일 때조차 혼자가 아닐 수 있다. 혼자일 때조차 함께 있게 된다. 만나서 말해줄 사람이 있으니까.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에게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이 앎이 아쉽고 소중하다. 너무 늦게 알게 되기 때문에 아쉽다. 그래도 알아낼 수만 있다면, 어렴풋하게라도 이해에 도달하게 된다면 그다음엔 어떻게 살 것인가, 무슨 말을 나누면서 살 것인가라는 질문과 연결될 수 있다. 이 앎이 꼭 필요한 일을 찾아내서 하게 한다. 그래서 먼저 겪고 알게 된 사람들의 목소리가 소중하다. 반복을 두려워하고 반복을 피하려 하고 미래의 관점으로 상황을 보면서 변화를 원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소중하다.

그 뒤로 한국에서도 ‘인생의 전문가’라는 말을 여러 번 들었다. 대체로 아주 슬픈 일을 겪은 사람들에게 들었다. 결코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이 입을 여는 유일한 이유는 그들의 슬프고 불행했던 사랑으로 알게 된 것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들을 것이 있고 배울 것이 있다. 그들은 삶이 파괴되어봤기 때문에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안다. 셰익스피어의 말을 빌리자면 "내일 전쟁터에서 나를 생각하라"다. 미래가 변하길 원할 때 가장 잘 들을 수 있다. 가장 잘 볼 수 있다. 우리가 가진 모습 중 가장 좋은 모습이 미래가 변하길 원한다. 우리는 가장 좋은 모습으로 미래를 맞이할 수 있다.
삶은 계속되어야 하고 세상은 변해야 하고 우리는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계속 말할 것이다. 위험에 처한 생명에 대해서. 살고 싶게 만드는, 사랑하고 싶게 만드는 세상의 모습에 대해서. 각자가 숨기고 싶었던 어둠을 뚫고. 그리고 우리가 서로 더 잘 듣고 더 잘 말하고 더 잘 알게 되면 확실히 이 세상에 위안과 아름다움은 존재할 것이다.
이제 우리 이야기의 마지막 질문이 남아 있다. 당신 삶의 이야기는 누가 말하고 있는가? 혹시 역사가? 혹시 시스템이? 혹시 상황이? 혹시 부동산 시장이? 내가 가진 것이? 나 아닌 누가 나 대신 나를 말하고 있는가? 혹시 당신 목소리를 잃었다면 그 대가로 얻은 것은 무엇인가?

‘나는 잘못 살았구나!’
그 느낌이 얼마나 쓰라리고 가슴 철렁한 것인지 안다. 그리고 내가 잘못 산 여파로 남에게 준 상처가 얼마나 후회되는 일인지도 안다. 그런 일들을 몇 번 겪었다. 지금도 나의 일부는 분명히 잘못 살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나중에야 또 알게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아, 그때 그렇게 했어야 하는데… ’ 하며 말도 못하게 괴로울 것이다. 다만, 그 괴롭고 후회스러운 일들에 이어지는 다른 이야기가 나에게 없지는 않다.
어느 해, ‘정말 잘못 살았구나’ 하는 깨달음이 또 왔다. 내가 잘해나가고 있다고 착각했기 때문에 추락은 깊었다. 그냥 아무 데로나 며칠간 떠나 있고 싶었다.

최근 수년간은 이 생각에 의지해서만 초라한 자아를 극복하고 꺾인 무릎을 펴고 길을 나설 수 있었다. 우리는 대부분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는 채 검은 물살 위에서 이리저리 외롭게 흔들린다. 그래서 ‘아더 사이드’는 우리 모두의 단어가 될 수 있다. 무엇을 원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현실의 다른 측면을 보고, 다른 사람들을 보고, 다른 이야기를 들어봐야 비로소 지금과 다른 삶이 가능하다. ‘아, 난 이것을 원하는구나!’ 하고 알게 되는 것은 한 개인의 삶에 일어나는 강렬한 해방적 순간이다.

‘스틸 뷰티풀’은 변주가 가능하다. 아무리 많은 일이 일어났어도 아름다운, 슬프지만 아름다운, 덧없지만 영원한, 슬프지만 기쁜. 내 마음의 고독이 찾던 이야기들은 모두 이 말과 관련이 있다. 몇 번이고 곱씹어볼 만큼 아름다운 이야기를 듣던 날들은 사랑스러운 일몰에 대한 기억처럼, 어느 아름다웠던 별이 가득한 밤의 기억처럼 끝없이 떠오르는 마음속 풍경이다. 우리의 어둠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은 아름답고 빛나는 이야기뿐이다.

나는 시 속에서, 그리고 시적인 순간들을 만나면서 달라지고 싶다. 현실을 변신의 장소인 것처럼 살고 싶다. 특별한 이야기의 힘을 믿고 우리에게 마법 같은 힘이 있음을 믿고 세상에 기적이 존재함을 믿고 우리의 행동이 우리의 운명을 바꿀 수 있음을 감히 믿으면서 살고 싶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달라질 수 있는 가능성을 믿어야 자신도 달라질 수 있다. 나는 그 가능성의 증거가 되고 싶다. "누가 그래? 내가 예전과 똑같은 사람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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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화가가 가까워질수록 알 만한 얼굴들이 보였다. 나는 발길을 돌려 집 쪽으로 향했다. 읍내에서 집까지는 12, 13킬로 정도 떨어져 있다. 주머니에는 땡전 한 푼 없었다. 자동차들이 내 옆을 쌩쌩 지나갔다. 슬며시 뒤를 돌아봤다. 엄마 차가 보일까 싶어서였다. 나는 일부러 빙 돌아 대로가 아닌 농로로 걸었다. 최대한 집에 늦게 도착하고 싶었다. 아니, 집에 가기가 죽기보다 싫었다. 그러나 캄캄해지기 전에 들어가야 했다. 어둠이 내리면 속수무책이 될 터였다.

나는 반대 골목으로 돌아 느티나무 밑 평상에 갔다. 어른들은 모두 들어가셨는지 아무도 없었다. 평상에 누워 나뭇잎 사이로 보이는 푸른 하늘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언제 모기에 뜯긴 건지 정강이 여기저기가 간지러웠다.
여름의 어둠은 서서히 세상으로 내려왔다. 해는 이미 넘어갔다. 나는 느릿느릿 몸을 일으켜 집으로 걸었다.

이불을 깔고 누워 선풍기 방향을 바닥으로 고정했다. 온종일 걸었더니 몸도 마음도 피곤했다. 멀리서 소쩍새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집은 아늑한 공간이었지만 이대로 평생을 산다는 것은 지옥이었다. 그러나 집 밖의 세상이라고 크게 다를 것도 없었다. 며칠 동안 내 휴대폰은 울리지 않았다. 연락해 올 사람도, 할 사람도 없었다. 어디에도 끼지 못하고 나만 도태되고 있다는 생각에 외롭고 쓸쓸했다.

고속버스가 읍내 터미널로 들어섰다. 저 멀리 엄마가 보였다. 엄마는 들어오는 버스마다 고개를 빼고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내 안의 깊숙한 곳에서부터 뜨거운 무엇이 올라오더니 왈칵 두 눈으로 쏟아졌다. 버스에서 내리는 나를 발견한 엄마가 달려왔다. 엄마는 한쪽 팔로 내 목을 감아 품에 가두었다.
"내 새끼…… 나 살아 있는 한은 내가 네 눈이여."
내 머리 위로 쏟아진 엄마의 목소리는 뜨겁고 단호했다. 순간 바람 맞은 들불처럼 길길이 날뛰던 내 안의 소란과 불안, 분노, 두려움, 억울함, 부끄러움, 정체 모를 우울감이 마치 연줄 끊기듯 툭 날아가는 듯했다. 마음 한구석엔 여전히 소스 없는 허연 짜장면이 박혀 있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마음이 더없이 고요하고 평온했다.
고개를 들자 주차장 지붕을 박차고 오르는 새가 보였다. 처음 보는 새였다. 새는 시리도록 푸른 하늘로 훨훨 날아오르고 있었다. 나는 엄마 품에 안긴 채로 이름 모를 새를 오래오래 올려다보았다.

나는 열다섯 살 때 발병한 병으로 서서히 실명하고 있었다. 그 바람에 고등학교를 도시의 특수학교로 오게 되었다. 집과는 70킬로미터 떨어져 있어 기숙사 생활을 했다.

한참 안경 렌즈를 바꿔가며 검사판을 가리키던 안경사 아저씨가 뜬금없이 내게 교실 칠판은 잘 보이는지, 밤길을 잘 다니는지 물었다. 나는 요사이 내게 나타난 증상을 이야기했다. 아저씨는 검사를 중단했다. 안경을 맞춰주는 대신 서울 안과의 약도를 적어 주었다.
"내가 서울 안과에 예약을 해줄 테니까 빨리 검사를 받아보거라. 꼭 부모님 모시고 가고."

안경을 맞추고 싶으니 돈을 넉넉히 달라고 했다. 엄마는 이왕이면 좋은 것으로 하라며 돈을 쥐여줬다.
안과를 찾아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동서울터미널에 내려 안경사 아저씨가 적어 준 약도대로 따라갔다. 접수처에 이름을 대고 기본 검사를 받았다. 눈꺼풀을 뒤집어 랜턴을 비춰보던 간호사 선생님이 심각한 얼굴로 보호자가 같이 오지 않았냐고 물었다. 나는 겁먹은 채 고개만 끄덕였다.

간호사 선생님은 난처한 표정으로 잠시 머뭇대다 검사를 계속 진행했다. 15분 간격으로 안약을 네 번 넣고 검사실로 들어가 안구 사진을 찍고 이마에 전선을 연결하고 알 수 없는 검사들을 한참 했다. 마침내 내 이름이 호명되고 의사 선생님 앞에 앉았다. 의사 선생님도 자꾸 보호자를 찾았다. 뭔가 내 눈에 좋지 않은 일이 벌어졌구나, 싶었다.
"다음에 어머니 모시고 오너라."
심장이 두근거리고 손에 땀이 찼다. 그러나 알아야 했다.
"저는요, 충청도 시골에서 왔어요. 농사철이라 엄마는 엄청 바빠요. 다음번에 엄마 데리고 올 테니까 오늘은 그냥 저한테 얘기해 주세요."
의사 선생님이 하는 수 없다는 듯 내 뒤에 서 있던 간호사 선생님에게 눈짓했다. 여러 장의 티슈가 내게 건네졌다. 왜 이걸 주는 거지? 나는 그걸 받지 않은 채로 멀뚱하게 서 있었다. 의사 선생님이 천천히 입을 떼었다.
"얘야, 너는 머지않은 미래에 시력을 모두 잃게 될 거란다. 벌써 진행이 많이 된 상태야. 다음에 부모님을 모시고 오면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해주마."
정신이 멍한 채로 그 얘기를 들었다. 머릿속이 공갈빵처럼 텅 빈 느낌이었다. 정말이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런데 진료실 문을 닫고 나오니까 비로소 눈물이 쏟아졌다. 간호사 선생님이 왜 여러 장의 티슈를 뽑아서 내게 건네려 했는지를 그제야 알았다. 나는 티슈도 손수건도 갖지 않은 빈손이었다. 주먹으로 흐르는 눈물을 훔쳐냈다.
무슨 정신으로 수납하고 고속버스에 올랐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 멍하니 차창 밖을 보았다. 맑았던 하늘에 먹구름이 모여들었다. 회색의 도시가 등 뒤로 멀어졌다. 작은 마을들도 숱하게 지나갔다. 푸른 들판과 희끄무레한 비닐하우스들이 순식간에 뒤로 흘러갔다. 나는 밀려오는 무언가를 가까스로 참아냈다

비가 시작됐다. 한두 방울 떨어지던 빗방울이 정신없이 터미널 양철 지붕을 때려댔다. 나는 멍하니 나무 의자에 앉아 있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빗속으로 뛰어들었다. 비는 기다렸다는 듯 나를 삼켰다. 비가 내 눈물자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세상 가장 뜨거운 물줄기가 내 턱 끝에 매달렸다. 입을 벌리면 신음이 새어 나올 것만 같아서 어금니를 꼭 깨물었다. 집에 가는 것이 두려웠다. 다른 건 생각나지 않았다. 머릿속엔 아까부터 오직 하나의 생각뿐이었다. 엄마한테 이 얘기를 어떻게 해야 하나.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내 몸이 몽땅 녹아 물처럼 어디론가 흘러가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성희야. 왜? 너 울었어?"
뜨락에 벗어 둔 신을 대강 꿰어 신고 엄마가 내게로 달려왔다. 참으려 했는데 막상 엄마 앞에 서자 참아지지 않았다.
"엄마! 나 어떡해? 나 어떡해?"
목구멍에서 참았던 두려움과 공포가 쏟아져 나왔다. 나는 엄마 품에서 목 놓아 울었다.
"미친년. 어디서 이상한 소리를 듣고 와서."
내 말을 들은 엄마의 반응이었다. 엄마는 믿지 않았다. 다음 날 엄마는 당장 나를 데리고 내가 갔던 병원으로 달려갔다. 의사 선생님께 직접 결과를 듣고 나서도 엄마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엄마가 이끄는 대로 다른 병원도 두 군데나 더 갔다. 진단은 같았다. 나는 감히 엄마를 쳐다보지 못했다. 서울에서 돌아오는 고속버스 안에서 엄마는 내 옆에 앉지 않고 뒷좌석에 앉았다. 나는 엄마가 소리 없이 울고 있음을 알았다. 엄마의 슬픔이 마음 아파서 나 또한 소리 죽여 울었다.

나를 데리고 병원 순례를 하는 중에도 엄마의 농사일은 계속되었다. 엄마는 내게 더 이상 밭에 나오지 말라고 했다. 실컷 자전거를 타고 친구들과 놀러 나가라 등을 떠밀었다. 하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엄마를 찾아 고추밭으로 나갔다. 하늘은 맑은데 가슴이 무너질 것 같은 빗소리가 들렸다. 나는 밭고랑에 주저앉아 울고 있는 엄마의 곡소리를 듣다가 조용히 발길을 돌렸다. 밭에서 돌아온 엄마도 집에서 엄마를 기다리던 나도 눈가가 붉게 익어 있었다. 우리는 짐짓 우스갯소리를 하고 억지웃음을 짜냈다. 엄마와 나는 서로를 위해 속없는 척 연기를 했다.

나는 이 소설들을 주로 점자 단말기로 썼다.
내 책상 위에는 점자판과 음성 프로그램이 깔린 컴퓨터, 스마트폰이 있다.
소리를 들으며 타자를 친다.
그리고 손으로 점자를 더듬어 읽으며 퇴고를 거친다.
내 모든 원고는 그런 과정으로 완성됐다.

이제부터는 오로지 내 이야기다.
작가의 말을 에세이 형식으로 써보았다.
나는 여러 형식을 자유롭게 오가며
독자들과 격의 없이 만나길 원한다.

나는 현실 파악이 빠르다. 그렇기에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는 속도 역시 빨랐다. 중학생이 되자 내 미래가 훤히 예상됐다. 학교에서 장래 희망을 적어 내라 하면 ‘경리’라고 썼다. 그게 현실적인 타협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글을 쓰는 미래를 조금도 꿈꾸지 못했다.

어머니의 교육관은 확고했다. 무조건 취직 잘되는 기술을 배우라는 것이다. 이런 환경 속에서 글 쓰는 삶을 어찌 상상해 봤겠는가? 나는 친척 언니들처럼 읍내 상고를 졸업해 농협이나 인근 물류 창고에 경리로 취직하는 미래를 의심해 본 적 없었다.
그런 내게 시각장애 선고는 확고했던 운명이 몽땅 어그러지는 변수였다. 그 무렵 내가 가장 암담하게 느꼈던 것은 평생 캄캄한 일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두려움보다 정해진 궤도에서 벗어나 버렸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이방인처럼 겉돌기 시작했다. 시력은 급격하게 떨어져 맨 앞자리에 앉아도 칠판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학업에 대한 열정도 시들해졌다. 시야가 극도로 좁아져 책을 읽을 때도 자를 대고 한 줄 한 줄 읽어 내려가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다음 문장을 찾지 못하고 엉뚱한 줄로 건너뛰기 십상이었다.

시력이 떨어지는 속도만큼 마음속에 울분이 가파르게 차올랐다. 나는 공책에 칠판 판서를 베껴 쓰는 대신 세상을 저주하는 말을 써대기 시작했다. 그러다 도서관에서 한국 근대문학 소설집을 빌려 읽게 되었다. 황순원과 김동인과 김유정의 소설에 빠졌다. 어느새 나는 저주의 말 대신 콩트를 쓰기 시작했다.

시력이 점점 사라지며 책을 읽는 속도도 떨어지고 금세 눈이 피로해졌다. 하지만 읽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책 속만이 유일한 도피처였고 나를 자유롭게 했으며 위안이 되었다. 눈이 보일 때 최대한 많은 책을 읽고 싶었다. 더 이상 책을 읽을 수 없을 때 기억 속 서랍을 열어 꺼내 보며 캄캄한 현실을 견디겠다고 결심했다.

불행의 수위가 있다면 나는 애송이였다. 장애인 학교에는 참담하다 못해 믿기 힘든 사연을 가진 이들이 모여들었다. 그렇다 해서 모두가 절망 속에서 살아가지는 않았다. 나는 장애인 학교를 다니면서 그럼에도 살아가야 하며, 살 수밖에 없는 현실을 깨달았다.

나는 공책에 A의 아버지를 비난하는 내용을 내갈겼다. 이렇게라도 울분을 내뱉지 않으면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사실 A의 아버지는 화풀이 대상이었다. 나는 비참한 현실과 변하지 않을 미래를 향해 울분을 터뜨리고 싶었던 것 같다. 멀어가는 두 눈에 들어오는 것은 세상의 불합리와 부조리였다. 그것들은 내 공책에 차곡차곡 쌓여갔다. 언젠가 이 새카만 이야기를 세상에 꺼내놓고 말 거라는 다짐을 했다. 하지만 내 의지는 장애인 학교 졸업과 함께 사라졌다. 그때 쓴 데스노트도 잃어버렸다.

스무 살, 안마사 생활을 시작하며 다시 책을 찾았다. 이제는 시력이 소멸된 눈 대신 소리로 듣는 방식으로 책을 읽었다. 내 하루는 고되고 지루했다. 10대 시절 책 속으로 도피했듯 다시 소설을 듣고 음미했다. 독서는 자유롭지 못한 나를 아주 먼 곳까지 데려다주었다.

한글 점자를 익히고 점자 단말기를 중고로 구매했다. 점자 단말기는 음성 지원과 점자 출력이 모두 가능해서 컴퓨터로 쓰는 것보다 편리했다. 글을 기록하는 것이 가능해지자 나는 무엇이든 쓰고 싶었다.

때마침 장애 인식 개선 문화제를 알게 됐다. 나는 전년도 대상을 받은 수필을 찾아 읽어보고 이 정도면 나도 쓸 수 있을 것 같다는 오만에 빠져 순식간에 원고를 썼다. 그리고 문체부장관상을 탔다. 성과가 있자 글쓰기가 더 재밌어졌다. 수필을 써서 여러 공모전에 응모를 했다. 시간만 있으면 나는 무언가를 써댔다. 케케묵어 삭아 없어진 줄 알았던 꿈이 되살아났다. 지금껏 누구에게도, 심지어 나 자신에게조차도 말할 수 없었던 비밀이었다.
나는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10여 년을 가슴에만 품고 있던 이야기가 기다렸다는 듯 손끝으로 밀려 나왔다. 원고를 수시로 듣고 손끝으로 더듬으며 고쳤다. 그렇게 퇴고한 소설을 공모전에 냈다. 은근한 기대를 갖고 발표를 기다렸다. 결론은 모두 낙방이었다. 초심자의 행운은 첫 수필 당선으로 끝나버렸다. 글쓰기에 대한 열정이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내 주변에는 나와 공감하며 문학을 이야기할 이가 전무했다. 화르르 타올랐던 꿈이 풀썩 스러졌다. 나는 다시 책 속으로 도피했다. 다양한 글을 자유롭게 읽는 것으로 만족하며 살자고 나를 설득하고 현실에 순응했다.
시간이 흘러 나는 서른 후반의 나이가 되었다. 성실한 태도와 절제된 생활 습관으로 삶은 안정됐고 일상은 평온했다. 그런데 나는 때때로 허무함을 느꼈다. 이유를 알고 있었기에 점자 단말기를 꺼내 노트북 앞에 앉았다. 자판 위에 손을 올리고 한 줄이라도 써보려 애를 썼다. 머릿속에는 수많은 단어와 이야기들이 유영했지만 무언가를 써보려 하면 거짓말처럼 손이 굳어버렸다.
나는 아무것도 쓸 수 없는 병에 걸린 것 같았다.

2022년 11월, 복지관에서 비대면 산문 교실 수강생을 모집한다는 공지를 봤다. 나는 강한 끌림을 느꼈고 반드시 이 기회를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그곳에서 스승 박현경을 만났다. 그녀는 신춘문예 소설로 등단해 현재는 동화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오랜 시간 시각장애인을 위한 낭독 봉사를 해왔고 시각장애인을 위한 글쓰기 강의는 처음이라 했다.

수업이 끝난 뒤 나는 마음이 울렁거려 제자리에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정신을 빼놓고 집 안을 서성이다가 가구에 정강이를 찧고 벽에 이마를 부딪쳤다. 요동치는 가슴을 꾹 눌렀다. 내 안에서 무언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작은 틈새는 점점 벌어져 단단히 세워두었던 감정의 둑을 무너뜨리고 밖으로 솟구쳐 나왔다. 그날 선생님의 눈물은 내 안에 들끓던 글쓰기의 열망을 깨운 것이다. 나는 책상에 앉아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내 글을 읽어주고 감정을 교류할 사람이 있다는 생각에 멈출 수가 없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끝도 없이 생각났다. 자판 위에서 손가락이 정신없이 움직였다. 글쓰기에 대한 열정이 통제되지 않았다.

선생님께 보여드리고 싶은 원고가 쌓여 있었다. 피드백받은 원고도 수정해서 다시 평가를 받고 싶었다. 갈증이 났다. 꺼내놓지 못하는 원고들 때문에 애가 탔다. 이대로 선생님과 작별해야 한다는 사실이 괴로웠다. 수업이 종강하고도 몇 달을, 써놓은 원고를 끌어안고 끙끙 앓았다. 수차례 스마트폰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나는 타인에게 부탁을 하거나 폐를 끼치는 행위를 극도로 경계하며 살았다. 하지만 이번만은 뻔뻔해지고 싶었다. 무작정 매달려 보기로 했다.
용기를 내서 박현경 선생님께 전화를 걸었다. 선생님은 나를 몹시 반가워했다. 당신도 간혹 내 생각을 했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떼쓰듯 내 원고 좀 봐달라고 애원했다. 선생님은 진심으로 기뻐하셨다. 나만을 위한 글쓰기 지도가 시작됐다. 원고지 20매 분량의 원고를 가지고 수십 번 메일을 주고받으며 퇴고 과정을 교육받았다. 선생님은 지치지 않았다.

완성된 원고를 수필 공모전에 출품했다. 그 원고로 나는 큰 상을 받았다. 그때까지 선생님과 직접 대면한 일은 없었다. 우리는 전화와 이메일로만 소통했다. 선생님을 처음으로 만난 것은 내 시상식 날이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는 순간 솟구치는 오열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저 감사했다. 글쓰기를 가르쳐 줘서도, 상을 받은 감동 때문만도 아니었다. 내 감정을 공감해 주는 사람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웠다. 선생님은 나를 달래며 앞으로도 많은 글을 써서 보여달라고 했다. 언제까지나 기다리겠다 약속하셨다. 선생님과의 대면 이후 나는 매일같이 울고 그 눈물이 마를 새 없이 원고를 썼다. 선생님은 가슴이 텅 빌 때까지 고여 있는 이야기들을 몽땅 쏟아내라 격려했다. 그래야 새로운 글도 쓸 수 있다 조언하셨다.

선생님은 선배 작가로서 출간까지의 고된 과정을 세밀히 일러주셨다. 세상에 글 잘 쓰는 청년들은 넘쳐나고 너에게는 출판사와 독자들의 눈에 띌 만한 장점은 당장 없어 보인다. 하지만 분명 네 원고에 깃든 힘을 알아볼 편집자가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 포기하지 말고 투고를 해보자. 나는 선생님을 믿었다. 출간되지 않는다 해도 상관없었다. 선생님께 내 모든 감정을 공감받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했기 때문이었다. 출판사에 투고 메일을 보내면서도 계속 원고를 썼다. 이제는 선생님께 내 소설을 보여드리고 싶었다.
"소설가가 되고 싶어요."
처음으로 타인에게 꿈을 고백했다. 힐난 대신 응원이 내 어깨에 내려앉았다.
"얼마든지 쓰렴. 그리고 내게 보여다오."
선생님은 내 소설 때문에 밤을 지새웠다. 더 전문적으로 피드백을 주지 못해 안타깝다 하셨다. 그 무렵 스물여덟 번째 투고한 출판사에서 산문집을 출간하고 싶다는 연락을 받았다. 선생님은 나보다 더 기뻐하셨다. 틈틈이 쓴 단편소설로 공모전에 도전했다. 모두 낙방이었다. 하지만 실망스럽거나 글을 그만 쓰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처음에는 선생님께 보여드리고자 글을 썼다면 지금은 내가 글을 쓰는 일이 좋아서 멈출 수가 없다.

소설을 쓴다. 장래 희망이 경리였던 소녀는 눈이 먼 안마사가 되었고 지금은 글을 쓰며 살아간다. 세월 속 묵었던 이야기들을 하나둘 풀어내며 해방감을 느낀다. 오래전 자전거를 타고 산길을 빠르게 내달릴 때처럼 싱그러운 바람이 환희가 되어 가슴에 들어찬다. 스승의 말대로 내 안의 모든 상념을 내던지고 나니 다른 시야가 열렸다. 차별에 길들여져 핍박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사는 이들, 외면과 무관심 속에서 정신까지 병들어가는 내 주변 이웃들, 분하고 억울한 삶을 인지조차 못 하는 내 장애인 동료들. 내 두 눈에 사람들의 인생이 들어왔다. 그들의 한스러운 감정이 내게 흘러들었다. 나는 어느새 그들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내가 당신들의 역사를 기억하고 기록하리라! 그리하여 덧없고 허망한 인생 따위가 아니라 의미 있는 생이었음을 대변하겠다. 앞으로 계속 소설을 써야 할 이유가 생겼다. 나는 캄캄한 눈으로 세상 가장 어두운 곳의 이야기를 밝은 세상에 내놓겠다고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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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

사라지는 것들에 대해 사력을 다해 쓰는 사람.

이번 책에서 그는 자신의 삶을 거쳐간 사람들과의 소설 같은 추억들을 어렵게 꺼내 보인다. 때로는 너무 그리워서 수년간 입에 올리지 못했던 사람을, 서럽고 고달파서 쉬이 삼키기 어려운 주방노동자들의 사연을, 또 때로는 서울 변두리 동네 가난했던 유년 시절의 추억을 끄집어내기도 하면서 연신 사라져 가는 것들을 어루만진다. 갈수록 냉기가 도는 세상에 기어이 차오른, 철없지만 다정했고 눈물 나게 고마웠던 음식과 사람에 얽힌 이야기들을 읽다 보면 독자들의 마음에도 울컥, 치미는 그리움이 있을 것이다.

사람이란 종족은 먹으면 저장하려고 든다. 유전이다. 언제 또 먹을지 모르니까. 고지혈증은 그러니까 원래는 좋은 시스템이다. 당대에 와서 언제든 먹을 수 있게 되니 병이 되었다. 맞다. 우리는 잘 먹는다. 많이 먹는다. 그렇지만 흘러간 기억 안의 사람들과 먹을 수는 없다. 그게 그립고 사무쳐서 잠을 못 이룬다.

기억해야 할 사람들 얘기를 쓰겠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죽은 사람이 여럿이다. 혼자서 막걸리를 마실 때면 그들이 더 생각난다. 그 기록이다. 《시사IN》에서 귀한 지면에 받아주었고, 독자들의 독촉으로 다음 이야기를 썼다. 책 한 권이 되어서 낸다.


2024년 1월
박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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