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자들의 쾌락은 차분하고 절제되어 있으며, 활기가 적고 억제되어 거의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쾌락을 의도적으로 추구하지 않고, 쾌락이 찾아와도 무시하며, 반가워하지도 않습니다. 단지 삶의 진지한 순간들 사이에 가볍게 끼워 넣는 농담처럼 다룰 뿐입니다.

과도한 쾌락은 해롭지만, 미덕 안에 머물면 지나침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미덕에는 절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과도하여 고통을 주는 것은 선이라 할 수 없습니다.

[1]미덕을 깃발 든 선봉으로 내세우십시오. 그래도 우리에게 쾌락은 있겠지만, 우리가 쾌락의 주인이자 감시자가 될 것입니다. 쾌락은 우리에게 청할 수는 있어도 강요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쾌락에게 주도권을 넘긴 자는 미덕과 쾌락 모두를 잃게 됩니다. 그들은 미덕을 잃을 뿐 아니라, 쾌락이 그들을 지배하게 되면서 쾌락이 부족하면 고통받고, 넘치면 질식하며, 버림받으면 비참해지고, 파묻히면 더욱 비참해집니다

미덕에서 비롯되는 즐거움은 분명 선한 것이지만, 미덕이라는 온전한 선의 일부는 아닙니다. 이는 기쁨과 평온이 고귀한 삶에서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결과이긴 하나, 그 고귀함을 구성하는 본질적인 요소는 아닌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선이기는 하나 최고선에서 파생된 부수적인 것일 뿐, 최고선을 완성하는 요소는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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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자의 삶은 어느 한 시기에 묶이지 않고, 모든 시대를 자유롭게 품습니다. 오직 현자만이 시간의 흐름을 초월하여 모든 순간을 온전히 소유합니다. 그는 지나간 시간은 기억으로 간직하고, 현재는 낭비 없이 살아내며, 다가올 시간도 미리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에게는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모두 지금으로 존재합니다. 그리하여 현자는 시간 전체를 한데 모아, 넓고 깊은 삶을 살아갑니다.

행복할 때든 불행할 때든, 불안과 근심은 그림자처럼 따라붙습니다. 수많은 일에 매여 바쁘게 살다 보면, 삶은 내 뜻과는 상관없이 흘러가버리고 말며, 여가를 바라기만 할 뿐 누리지는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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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구를 떠나자마자 거센 폭풍을 만나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사방에서 불어오는 광풍 때문에 한 자리에서 맴도는 이를 오래 항해했다고 하겠습니까? 그는 오래 항해한 것이 아니라, 오래도록 이리저리 내팽개쳐진 것일 뿐입니다.

나는 사람들이 남에게 시간을 달라 하고, 또 그런 요청을 받은 이들이 쉽게 시간을 내주는 것을 보며 놀랍니다. 양쪽 모두 해야 할 일은 신경 쓰면서도, 정작 시간 자체는 마치 하찮은 것을 주고받듯 가볍게 여깁니다. 사람들은 이처럼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을 장난감처럼 다룹니다. 하지만 이는 시간이 형체도 없고 보이지도 않아서, 그것을 가장 값싼 것, 거의 가치 없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목표를 미루다 보면 우리에게 오는 모든 날을 빼앗기고, 현재는 미래를 위해 희생됩니다. 인생의 가장 큰 걸림돌은 미래에 대한 기대, 즉 내일을 기약하며 오늘을 희생하는 것입니다. 이는 운명의 손에 있는 것을 바라며 자신의 손안에 있는 것을 놓아버리는 일입니다. 당신은 어디를 보고, 어디로 손을 뻗고 있습니까? 앞으로 올 모든 것은 불확실합니다. 현재를 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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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시간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생은 충분히 길고, 시간을 잘 활용한다면 가장 훌륭한 것을 이루어낼 만큼의 여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유익한 일에는 시간을 쓰지 않고 사치와 방탕 속에 무심히 시간을 흘려보내다 보면, 결국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인생이 다 지나가버렸음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짧은 인생을 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그것을 짧게 만든 것이며, 시간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낭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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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를 ‘걷기 위해 음악을 듣던 때’라고 할 수 있겠다. 어디로 가고 싶은지도 모르면서 마냥 여기로부터 달아나고 싶어 답답했던 때. 음악은 아무 위험도 감수할 필요 없이 도피하게 하는 안내자였다.
언제부터였더라? 음악이 삶을 밀어내려는 마음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나의 안쪽으로, 현실 위에 서 있는 두 발끝 아래로 당기기 시작한 게

더는 나를 외면할 필요가 없었다. 이제 좀 알겠다 싶으면 또 모르겠는 것. 그건 내 삶도, 세상도 마찬가지였다

다시, 걷는다. 이번에도 어떤 음악은 나를 손쉽게 장악한 뒤 불안을 서서히 잠재운다. 어김없이 나를 향한 이야기인 것 같다. 책에 밑줄을 긋듯 음악을 반복해 들으며 가사를 기억한다. 꼭 그렇게 살 수 있을 것 같은, 아니 살아본 것 같은 기분. 한 곡의 음악을 듣는 것만으로도 하루의 일기를 쓴 셈이다. 믿고 싶은 포춘쿠키 같은 가사를 곱씹으며 걷기를 지속한다.

많은 이들이 어딘가로 이동할 때 음악을 든든한 동행자로 삼곤 한다. 그런 음악들엔 정확한 목적지가 있다. 도착할 곳을 알고서 그곳을 향해 재생되는 음악들. 반면 내 하루 속의 음악은 가끔 나를 예정보다 더 멀리 가게 한다. 어떤 음악을 듣느냐에 따라 최종 목적지는 변경되거나 아니면 여러 경유지를 거치게 된다.

인간은 누구나 고독하다. 인간은 누구나 외롭다. 이건 내가 가지고 있는 인간에 대한 편견이자 정의다. 나는 인간이 상상하고 꿈꿀 수 있기에 외롭다고 믿는다. 상상과 현실에는 간극이 있고, 그 간극 속에서 우리는 공허해진다. 현실에서 즐거움을 더 많이 발견하고, 현실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인간은 꿈꾸는 인간보다 덜 외롭다고도 믿는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인간은 꿈을 꿀 수 있는 존재기에, 꿈을 꾸지 않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모두가 외롭다. 빈도와 농도는 다르겠지만.

나는 모두가 꿈을 꿨으면 좋겠다. 하지만 이제 이 말은 마치 모두가 외로웠으면 좋겠다는 말처럼 읽힐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어차피 우리는 모두 외로우니까 외로운 김에 꿈을 더 꾸었으면 좋겠다는 말이다.

꼭 꿈뿐만이 아니라도, 어느 시인의 말처럼 시간이 어떤 모양으로 다가올지에 관해서는 궁금해하지 않기로 하자. 그건 그것대로 오겠지, 하며 지내보자. 잊은 듯이 살고 있다가, 어떤 모습으로든 좋은 모양이 문득 내게 닿으면 매일 그걸 기다려온 사람처럼 반가워하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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