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기를 ‘걷기 위해 음악을 듣던 때’라고 할 수 있겠다. 어디로 가고 싶은지도 모르면서 마냥 여기로부터 달아나고 싶어 답답했던 때. 음악은 아무 위험도 감수할 필요 없이 도피하게 하는 안내자였다. 언제부터였더라? 음악이 삶을 밀어내려는 마음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나의 안쪽으로, 현실 위에 서 있는 두 발끝 아래로 당기기 시작한 게
더는 나를 외면할 필요가 없었다. 이제 좀 알겠다 싶으면 또 모르겠는 것. 그건 내 삶도, 세상도 마찬가지였다
다시, 걷는다. 이번에도 어떤 음악은 나를 손쉽게 장악한 뒤 불안을 서서히 잠재운다. 어김없이 나를 향한 이야기인 것 같다. 책에 밑줄을 긋듯 음악을 반복해 들으며 가사를 기억한다. 꼭 그렇게 살 수 있을 것 같은, 아니 살아본 것 같은 기분. 한 곡의 음악을 듣는 것만으로도 하루의 일기를 쓴 셈이다. 믿고 싶은 포춘쿠키 같은 가사를 곱씹으며 걷기를 지속한다.
많은 이들이 어딘가로 이동할 때 음악을 든든한 동행자로 삼곤 한다. 그런 음악들엔 정확한 목적지가 있다. 도착할 곳을 알고서 그곳을 향해 재생되는 음악들. 반면 내 하루 속의 음악은 가끔 나를 예정보다 더 멀리 가게 한다. 어떤 음악을 듣느냐에 따라 최종 목적지는 변경되거나 아니면 여러 경유지를 거치게 된다.
인간은 누구나 고독하다. 인간은 누구나 외롭다. 이건 내가 가지고 있는 인간에 대한 편견이자 정의다. 나는 인간이 상상하고 꿈꿀 수 있기에 외롭다고 믿는다. 상상과 현실에는 간극이 있고, 그 간극 속에서 우리는 공허해진다. 현실에서 즐거움을 더 많이 발견하고, 현실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인간은 꿈꾸는 인간보다 덜 외롭다고도 믿는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인간은 꿈을 꿀 수 있는 존재기에, 꿈을 꾸지 않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모두가 외롭다. 빈도와 농도는 다르겠지만.
나는 모두가 꿈을 꿨으면 좋겠다. 하지만 이제 이 말은 마치 모두가 외로웠으면 좋겠다는 말처럼 읽힐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어차피 우리는 모두 외로우니까 외로운 김에 꿈을 더 꾸었으면 좋겠다는 말이다.
꼭 꿈뿐만이 아니라도, 어느 시인의 말처럼 시간이 어떤 모양으로 다가올지에 관해서는 궁금해하지 않기로 하자. 그건 그것대로 오겠지, 하며 지내보자. 잊은 듯이 살고 있다가, 어떤 모습으로든 좋은 모양이 문득 내게 닿으면 매일 그걸 기다려온 사람처럼 반가워하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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