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으로 잊을 수 없는 이 순간에 콩코르드광장과 단두대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있는 센강에서 수많은 낚시꾼이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낚시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 대단한 광경에 등을 돌리고 서서 강물에 떠 있는 코르크 찌만 노려보았다. 국가 최대의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음을 알리는 군중의 환호에도 그들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젊은 시절 이 사소한 일화를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사실이라고 믿고 싶지 않았다. 내 안에서 거부감이 일었다. 역사적 순간에 그런 이기적인 무관심이라니, 말도 안 되었다.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일에 비추어 볼 때, 그 일화는 사실임이 분명할 뿐 아니라 없어서는 안 될 역사적 진실인 것 같다. 우리는 현재 매일 역사 속에서 교훈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적어도 프랑스혁명이나 종교개혁 못지않게 극적인 시대에 살고 있다. 지금 시대에도 매주, 매일이 역사적 사건들로 가득하다. 수백 년 된 제국이 무너지고, 인간의 자유를 빙자한 사상 최대의 전쟁이 진행 중이다. 매일, 매시간 새로운 긴장이 닥치고, 후세의 젊은이들은 이 엄청난 세계적 격변을 목격하고 거기에 참여한 우리를 무척이나 부러워할 것이다.

평범하지 않은 사건들이 사방에서 벌어지더라도 일상생활은 평범하게 계속 이어진다.

역사적 시대의 모든 낭만적 상상을 진실에 맞게 지우면, 역사적 사건이 벌어지는 바로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사건을 경험하고 그에 참여하기보다 오히려 그것을 잊으려 애쓴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이는 우리 모두에게 언뜻 부끄러운 고백처럼 보인다. 자기 시대에 진정으로 관심을 두고 참여하고 동시대 사람의 공포와 괴로움에 진심으로 공감하는 능력을 대다수 사람이 거부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부당한 비난이다. 사람들 대부분은 평범하지 않은 모든 사건에 관심을 둘 의향이 매우 강하고, 그것에 몰두하고 참여하려는 의지가 있으며, 심지어 그것을 소망한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모두 더 강한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이 자연법칙은 우리의 참여 의지와 공감 능력을 현명하면서도 경제적으로 제한한다.

세계의 극이 길어질수록 장면은 점점 더 끔찍해지고, 사건이 자극적일수록 그것을 진심으로 연민하는 능력이 더욱 줄어든다. 전쟁에 대한 끊임없는 생각은 마음을 파괴하고, 시대가 우리에게 연민을 더 많이 요구할수록, 우리의 지친 영혼이 느낄 수 있는 연민은 더 줄어든다.

그러므로 전쟁 첫해 말에 우리가 더는 전쟁에 신경 쓰지 않았던 것처럼 보였다면, 그것은 우리가 비인간적이어서가 아니라, 작은 심장 하나를 가진 인간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심장은 너무 작아서 일정량 이상의 불행을 감당하지 못한다. 공감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런 ‘역사적 시대’에 너무 많은 일이 벌어지기 때문이고, 우리의 마음이 당장 벌어지고 있는 일에서 잠시 떠나 아무런 감정도 일지 않는다면, 이는 그것을 감당할 힘이 부족하기 때문이지 선한 의지가 없어서가 아니다.

자연은 어떤 중단도 용납하지 않는다. 자연은 사람들 일부가 무참히 파괴되더라도, 나머지 사람들은 끈기 있게 인내하며 일상생활을 이어나가길 요구한다. 우리가 때때로 시대에 무관심해 보인다면, 그것은 자기 피조물의 고통에 무관심한 자연의 잘못이다. 그리고 무너져 가는 세계의 폐허를 계속 노려보는 대신 더 나은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려고 노력할 때 비로소 우리는 거부할 수 없는 자연의 명령에 순종하게 된다.

우리는 어떤 상황이나 만남이 우리 삶에 어떤 결정적 영향을 미쳤는지 되돌아보는 시간을 이따금 가져야 한다.

위대한 사람들은 거의 항상 매우 친절하다. 그리고 과하게 나서지 않는 사람에게 본능적으로 관대하다.

자기 일에 전념하는 사람은 언제나 큰 욕심 없이 소박하게 산다

완벽을 향한 의지로 모든 것을 잊는 열정! 크든 작든 자기 일에 완전히 몰입할 수 있는 사람만이 그 일을 제대로 해낼 수 있다. 다른 마법은 없다.

나는 인간의 모든 일이 어떻게 수행되어야 선하고 유효할 수 있는지 알았다. 자기 자신과 모든 목표 및 목적을 완전히 잊고, 오직 도달할 수 없는 궁극적 목표인 완벽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는 오로지 자신의 작품과 그 너머에 보이지 않게 존재하는, 그가 성취하고자 했던 더 높고 더 진실한 형태만 응시했다. 그의 육중한 몸이 가볍게 움직였고, 어떤 깨달음이 흡사 술에 취한 듯한 그의 존재를 감쌌다.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인식하지 못한 채, 마치 천지창조 첫날의 신처럼 홀로 창조 작업에 전념했다.

보기 드문 예술가 알폰소 에르난데스 카타는 성품이 호탕했고, 자신의 내적 풍요와 충만한 감성을 모든 사람과 공유하고자 했고, 친절이 넘쳐흘렀으며, 비교할 수 없는 선함을 끊임없이 발산하여 만나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고 활력을 불어넣었습니다.

지금 우리 심장이 아무리 지쳤더라도 체념하지 않고 그가 존재했었노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가 완전히 떠났음을 우리 심장이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것 역시 옳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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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지음, 홍한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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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으로 잘 보이지 않지만 분명 있는 무언가의 존재”


이 소설은 실제 인물을 기반으로 하지 않는 허구이지만 아일랜드의 마지막 막달레나 세탁소는 1996년에야 문을 닫았고,이 곳에서 은폐, 감금, 강제 노역 등을 당한 여성과 아이의 수가 얼마나 많은지는 알려지지 않았다고 한다. 목숨을 잃고, 아기를 잃고, 다른 곳으로 입양된 아기의 수도 알 수 없다고..

잘못 건드리면 무너지고 녹아내릴 것 같았고,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고 미묘하게 암시하며 번역하기 위해 무수히 읽으면서 알게 된 것을 번역에 설명하듯 담지 않으려 애썼다는 이 책의 번역가는 독자들도 천천히, 가능하면 두 번 읽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그럼 얼핏 봐서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아, 그래서 얇은 두께지만 읽을 때마다 앞부분을 다시 읽고 싶었고 그렇게 했던겐가…



“이러다 타이어가 닳아서 휠만 남겠어“ - p12

“속이 빈 자루는 제대로 설 수가 없는 법이지.” - p14

“시간은 아무리 흘러도 느려지지 않으니.“ -p41

“아무튼 우리는 괜찮지?” - p43

“아무 상관 없지. 우리한테 무슨 책임이 있어?“
”그게 아무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당신 말을 듣다 보니 잘 모르겠네.“
”이런 생각 해봤자 무슨 소용이야?“
”생각할수록 울적해지기만 한다고.“
“사람이 살아가려면 모른 척해야 하는 일도 있는 거야. 그래야 계속 살지.”
- 55~56p

“왕관을 쓴 자는 머리가 무거운 법이지“ - p104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거기 일에 관해 말할 때는 조심하는 편이 좋다는 거 알지? 적을 가까이 두라고들 하지. 사나운 개를 곁에 두면 순한 개가 물지 않는다고. 잘 알겠지만.”
“말했듯이 내가 상관할 일은 아니겠지만, 그 수녀들이 안 껴 있는 데가 없다는 걸 알아야 해.”
- p105~106

“잘했다.”
“다 게워내. 속에 든 거 시원하게 비워.” -p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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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이브, 펄롱이 이렇게 일하러 나가고 싶지 않았던 적은 처음이었다. 며칠째 뭔가 가슴에 얹힌 것 같았지만 펄롱은 평소처럼 옷을 입고 비첨스 감기약을 뜨거운 물에 타서 마시고 야적장으로 걸어갔다. 일꾼들이 벌써 나와정문 밖에 서서 추위에 손을 호호 불고 발을 구르며 서로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펄롱이 지금까지 데리고 있었던 일꾼들은 다 괜찮은 사람들이었고 게으름 피우거나 불평하지 않았다. 사람한테서 최선을 끌어내려면 그 사람한테 잘해야 한다고, 미시즈 월슨이 말하곤 했다.

좋은 사람들이 있지, 펄롱은 차를 몰고 시내로 돌아오면서 생각했다. 주고받는 것을 적절하게 맞추어 균형 잡을 줄알아야 집 안에서나 밖에서나 사람들하고 잘 지낼 수 있단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하는 순간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특권임을 알았고 왜 어떤 집에서 받은 사탕 따위 선물을 다른 더 가난한 집 사람들에게 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늘 그렇듯 크리스마스는 다른사람들에게서 가장 좋은 면과 나쁜 면 둘 다를 끌어냈다.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거기 일에 관해 말할 때는 조심하는 편이 좋다는 거 알지? 적을 가까이 두라고들 하지. 사나운 개를 곁에 두면 순한 개가 물지 않는다고 잘 알겠지만."
펄롱은 갈색 카펫 위에 서로 엮인 검은 고리 무늬를 내려다보았다.
"기분 나쁘게 듣지 말고." 미시즈 케호가 펄롱의 소매를 건드리며 말했다. "말했듯이 내가 상관할 일은 아니지만,
그 수녀들이 안껴 있는 데가 없다는 걸 알아야 해."
펄롱이 뒤로 물러서며 미시즈 케호를 마주 보았다. "그사람들이 갖는 힘은 딱 우리가 주는 만큼 아닌가요?"
"그렇게 쉽게 생각할 일이 아냐." 미시즈 케호는 말을 멈추고는 극도로 현실적인 여자가 가끔 남자들을 볼 때 짓는표정, 철없는 어린애 보듯 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일린도 몇 번 그런 적이 있었다. 사실 꽤 많았다.
"내 말 너무 신경 쓰지 마." 미시즈 케호가 말했다. "하지만 자네 정말 열심히 살아서, 나만큼이나 열심히 해서 여기까지 온 거잖아. 딸들도 잘 키우고 있고, 알겠지만 그곳하고 세인트마거릿 학교 사이에는 얇은 담장 하나뿐이라고."
펄롱은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곧 누그러졌다.

잠시 멈춰서 생각이 마음대로 돌아다니고 떠돌게 하니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한 해 일을 마치고 여기 앉아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게 싫지 않았다. 머리를 자르고 값을 치르고 밖으로 나왔을 때는 눈이 쌓여 있었고 인도 위에 먼저 간사람과 뒤따라온 사람의 발자국이 양쪽으로 뚜렷하면서도 또 그다지 뚜렷하지 않게 남아 있었다.

추위와 피로가 온몸을 덮쳐왔다. 조금씩이지만 눈 계속 내리고 있었다. 하늘에서 내린 눈이 온 세상 위로 내려앉았다. 펄롱은 왜 편안하고 안전한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아일린은 벌써 자정미사 준비를 하면서 펄롱이 어디있을까 생각하고 있을 거였다. 그러나 펄롱의 하루는 지금 무언가 다른 것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펄롱은 언덕을 계속 올라가 집 안에서 흘러나오는 불빛과 가로등 불빛이 닿지 않는 곳까지 갔다. 어둠과 적막 속에서 수녀원 바깥쪽을 따라 돌며 수녀원을 둘러보았다. 뒤쪽의 거대하고 높다란 담 꼭대기에도 깨진 유리가 박혀 있었다. 눈이 쌓였는데도 뾰족한 끝이 보였다. 내부는 보이지 않았고 검게 칠한 3층 유리창에는 쇠창살이 달려 있었다.

펄롱은 이발소에 있을 때 상상했었다.
지금은 문이 잠겨 있을 거라고, 아니면 다행히도 아이가 그안에 없을 거라고, 아니면, 만약 자기가 그렇게 한다면, 아이를 업고 가야 할지도 모르는데 그게 가능할지, 아니면 어떻게 할지, 정말 뭔가를 할 것인지, 진짜로 거기 갈 것인지 생각했다. 하지만 모든 게 펄롱이 두려워하며 상상했던 그대로였다. 다만 아이가 이번에는 펄롱의 외투를 순순히 받아 들었고 기꺼이 부축을 받고 밖으로 나왔다.

펄롱은 어렵지 않게 아이를 데리고 진입로를 따라 나와 언덕을 내려가 부잣집들을 지나 다리를 향해 갔다. 강을 건널 때 검게 흘러가는 흑맥주처럼 짙은 물에 다시 시선이 갔다. 배로강이 자기가 갈 길을 안다는 것, 너무나 쉽게 자기 고집대로 흘러 드넓은 바다로 자유롭게 간다는 사실이부럽기도 했다. 외투가 없어서 추위가 더 선뜩했다.

길에서 만난 사람 누구도 세라에게 말을 걸거나 펄롱에게 어디로 데려가냐고 묻지 않았다. 펄롱은 말하거나 설명할 의무는 없다고 생각했으므로 최대한 상황을 넘기며 계속 갈 길을 갔다. 가슴속에 설렘과 함께, 아직 알 수는 없지만 반드시 맞닥뜨릴 것이 분명한 무언가에 대한 두려움이 솟았다.

두 사람은 계속 걸었고 펄롱이 알거나 모르는 사람들을 더 마주쳤다. 문득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나날을, 수십 년을, 평생을 단 한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보지 않고도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고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마주할 수 있나?

아이를 데리고 걸으면서 펄롱은 얼마나 몸이 가볍고 당당한 느낌이던지, 가슴속에 새롭고 샤삼스럽고 뭔지 모를 기쁨이 솟았다. 펄롱의 가장 좋은 부분이 빛을 내며 밖으로 나오고 있는 것일 수도 있을까? 펄롱은 자신의 어떤 부분이 그걸 뭐라고 부르든 거기 무슨 이름이 있나?-밖으로 마구 나오고 있다는 걸 알았다. 대가를 치르게 될 테지만, 그래도 변변찮은 삶에서 펄롱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와 견줄 만한 행복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갓난 딸들을처음 품에 안고 우렁차고 고집스러운 울음을 들었을 때조차도.

펄롱은 미시즈 월슨을, 그분이 날마다 보여준 친절을, 어떻게 펄롱을 가르치고 격려했는지를, 말이나 행동으로 하거나 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을, 무얼 알았을지를 생각했다.

저 문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는 고생길이 느껴졌다. 하지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이미 지나갔다. 하지 않은 일,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 — 평생 지고 살아야 했을 일은 지나갔다. 지금부터 마주하게 될 고통은 어떤 것이든 지금 옆에 있는 이 아이가 이미 겪은 것, 어쩌면 앞으로도 겪어야 할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자기 집으로 가는 길을 맨발인 아이를 데리고 구두 상자를 들고 걸어 올라가는 펄롱의 가슴속에서는 두려움이 다른 모든 감정을 압도했으나, 그럼에도 펄롱은 순진한 마음으로 자기들은 어떻게든 해나가리라 기대했고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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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펄롱은 가끔 다른 삶, 다른 곳을 상상했고 혹시 그런 기질이 자기 핏속에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자기아버지도, 갑자기 불쑥 영국행 배를 타고 떠나버린 건 아니었을까? 삶에서 그토록 많은 부분이 운에 따라 결정된다는 게 그럴 만하면서도 동시에 심히 부당하게 느껴졌다.

차가 수녀원에 가까워지면서 창문으로 비치는 트럭 헤드라이트 불빛 때문에 펄롱은 마치 자기 자신을 만나러 가는듯한 기분이었다.

이 위는 이렇게 고요한데 왜 평화로운 느낌이 들지 않는걸까? 아직 동이 트기 전이었고 펄롱은 검게 반짝이는 강을 내려다보았다. 강 표면에 불 켜진 마을이 똑같은 모습으로 반사되었다. 거리를 두고 멀리서 보면 훨씬 좋아 보이는게 참 많았다. 펄롱은 마을의 모습과 물에 비친 그림자 중에 어느 쪽이 더 마음에 드는지 마음을 정할 수가 없었다.

마음 한편에는 오늘이 월요일 아침이어서 다른 건 다잊고 그냥 도로로 나가 평일 일상의 노동에 기계적으로 빠져들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요일이 너무나 공허하고 힘겹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왜 펄롱은 다른 남자들처럼 미사 마치고 맥주 한두 잔 마시면서 쉬고 즐기고 저녁 배부르게 먹고 불가에서 신문을 보다가 잠들 수 없는걸까?

펄롱은 억지로 자동차 키에 손을 뻗어 시동을 걸었다. 다시 길로 나와 펄롱은 새로 생긴 걱정은 밀어놓고 수녀원에서 본 아이를 생각했다. 펄롱을 괴롭힌 것은 아이가 석탄광에 갇혀 있었다는 것도, 수녀원장의 태도도 아니었다. 펄롱이 거기에 있는 동안 그 아이가 받은 취급을 보고만 있었고 그애의 아기에 관해 묻지도 않았고 그 아이가 부탁한 단 한 가지 일인데 수녀원장이 준 돈을 받았고 텅빈 식탁에 앉은 아이를 작은 카디건 아래에서 젖이 새서 블라우스 얼룩이 지는 채로 내버려두고 나와 위선자처럼 미사를 보러 갔다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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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그렇게 했지만 펄롱은 다른 아이들이 그토록 반기는 것을 겁내는 자기 아이를 보니 마음이 아팠고 이 아이가 용감하게 세상에 맞서 살아갈 수 있을까 걱정하지 않을수가 없었다.

늘 이렇지, 펄롱은 생각했다. 언제나 쉼 없이 자동으로 다음 단계로, 다음 해야 할 일로 넘어갔다. 멈춰서 생각하고 돌아볼 시간이 있다면, 삶이 어떨까, 펄롱은 생각했다.
삶이 달라질까 아니면 그래도 마찬가지일까 아니면 그저 일상이 엉망진창 흐트러지고 말까?

가끔 까만 머리카락에 눈빛이 똘망똘망한 딸들이 작은 마녀처럼 보일 때가 있었다. 여자들이 힘과 욕구와 사회적 권력을 가진 남자들을 겁내는 건 그럴 만하지만, 사실 눈치와 직관이 발달한 여자들이 훨씬 깊이 있고 두려운 존재였다. 여자들은 어떤 일이 일어나기 전에 예측하고, 밤에 꿈으로 꾸고, 속마음을 읽었다.

펄롱은 자기 빵을 까맣게 태워버리고는 잘 지켜보지 않고 불에 너무 가까이 갖다 댄 자기 탓이라며 그냥 먹었는데, 갑자기 무언가가 목구멍에서 울컥 치밀었다. 마치 이런 밤이 다시는 오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 일요일 밤에 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심란한 걸까?
펄롱은 어느새 또 미시즈 윌슨 집에서 지내던 때를 생각하고 있었다. 펄롱은 생각할 시간이 너무 많아서, 색전구와 음악 등등 때문에 어쩐지 감상적인 기분이 되어서, 또 조앤이 합창단에서 노래할 때 합창단의 일원으로 완전히 어우러진 듯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던 탓에, 또 레몬 냄새가 그정든 옛 부엌에서 크리스마스 무렵의 어머니를 떠올리게했기 때문일 거라고 결론을 내렸다.

곧 펄롱은 정신을 다잡고는 한번 지나간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고 생각을 정리했다. 각자에게 나날과 기회가 주어지고 지나가면 돌이킬 수가 없는 거라고. 게다가 여기에서 이렇게 지나간 날들을 떠올릴 수 있다는 게, 비록 기분이 심란해지기는 해도 다행이 아닌가 싶었다. 날마다 되풀이되는 일과를 머릿속으로 돌려보고 실제로 닥칠지 아닐지모르는 문제를 고민하느니보다는.

펄롱은 생각했다. 일 그리고 끝없는 걱정. 캄캄할 때 일어나서 작업장으로 출근해 날마다하루 종일 배달하고 캄캄할 때 집에 돌아와서 식탁에 앉아저녁을 먹고 잠이 들었다가 어둠 속에서 잠에서 깨어 똑같은 것을 또다시 마주하는 것. 아무것도 달라지지도 바뀌지도 새로워지지도 않는 걸까? 요즘 펄롱은 뭐가 중요한 걸까

펄롱은 트럭에 올라타자마자 문을 닫고 달리기 시작했다. 한참 달리다가, 길을 잘못 들었으며 최고 속도로 엉뚱한 방향을 향해 가고 있었음을 깨닫고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가자고 스스로를 달랬다. 바닥에서 기어다니며 걸레질을 해서 마루에 윤을 내던 아이들, 그 아이들의 모습이 계속 생각났다. 또 수녀를 따라 예배당에서 나올 때 과수원에서 현관으로 이어지는 문이 안쪽에서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는 사실, 수녀원과 그 옆 세인트마거릿 학교 사이에 있는 높은 담벼락 꼭대기에 깨진 유리 조각이 죽 박혀있다는 사실도 놀라웠다. 또 수녀가 석탄 대금을 치르러 잠깐 나오면서도 현관문을 열쇠로 잠그던 것도.

강한 타격은 아니었으나, 그때까지 아일린과 같이 살면서 그런 말을 들어보기는 처음이었다. 뭔가 작지만 단단한것이 목구멍에 맺혔고 애를 써보았지만 그걸 말로 꺼낼 수도 삼킬 수도 없었다. 끝내 펄롱은 두 사람 사이에 생긴 것을 그냥 넘기지도 말로 풀어내지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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