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번도 나의 존재 가치를 대단하게 여겨본 적이 없었다. 감히 이 세상에 태어났기에, 삶을 스스로 선택한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감히 이곳에 던져졌기에 묵묵히 그 삶을 감내할 뿐이었다.
그건 삶이 내게 준 형벌이었고 나는 온몸으로 그 형벌을 짊어져야만 했다. 내가 결정할 수 없었던 그 일에 대해 원망해본 적도 없었다. 그건 온전히 나의 몫이어야만 했다. 원망하면 할수록 더더욱 형벌의 무게에 짓눌릴 것 같았다.

터널을 지날 땐 숨을 참았다. 언젠가 어릴 적에 터널을 다 지날 때까지 숨을 참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숨을 참고 눈을 감고 터널이 끝나길 기다리며 하염없이 소원을 되뇌었다. 언젠가는 이 터널이 끝날 것을, 끝나고야 말 것을 나는 알았다.

바닥을 치는 자의 기분은 바닥을 치는 자만이 알 수 있다. 그가 아니고선 영영 알 수 없고 누구 하나 알려고 들지도 않을 것이다.
끝없는 밤의 바닥을 밟아 보았다. 그곳은 생각보다 단단했다.

가련한 여인. 엄마의 삶이 너무나도 안타까워서 나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때 밤의 택시에서 잘 아는 노래 한 곡이 흘러나왔다. 노래는 스피커에서 흘러나와 투명하게 몸을 감쌌고, 그러자 심장에 자리 잡은 포도덩굴이 사납게 자라고 있음이 느껴졌다.

고통 속에서 나는 마치 물속에 잠겨 있는 아이와도 같았다. 고통 속에서 발버둥 치던 처음과 달리 시간이 시나브로 넘어가면서 고통 속을 유영하게 되었고, 이내 샴쌍둥이처럼 고통과 딱 붙어 있을 수 있게 되었다.
태초에 하나였던 것 같은 느낌이 계속되면서 그것은 오히려 분리가 더 어렵게 변해버렸다. 언젠가 내가 사그라들 때 고통 또한 나와 함께 사라져가고 그렇게 나와 함께 묻힐 것을 나는 알았다.

눈을 뜨고 있으면서 자는 척을 하고, 살아 있는 척하면서 죽어 있는 날들 속에서 나는 뛰다가 걷고 걷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끝이 없는 굴속으로 하염없이 걸어 들어갈 때에 나는 어린 날의 내 모습을 보았다.
풀리지 않는 수학 문제를 앞에 둔 채 귀를 막고 끙끙대다가 고막을 찢을 듯한 "와장창" 소리에 놀라 뒤돌아봤을 때 발등이 찢어져 피가 흐르는 채로 엄마를 노려보던 아빠의 붉은 눈, 부러진 코를 감싸며 쓰러지면서 "도망가"라고 외치던 엄마의 까만 동공, 그저 동생의 손을 잡고 현관문을 넘어 달리던 그 어느 날. 유난히도 내가 무서워하던 주인집 할머니의 불도그가 앞길을 막아섰을 땐 차라리 어둠의 진창으로 곤두박질치고 싶던, 하릴없이 동생의 손만 꽉 그러쥐었던 내 모습.

수학은 깨끗이 포기하면 그만이지만 세상이란 곳은 그렇지 않다는 걸. 이 세상이란 곳은 수학보다도 더 어려운 곳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던 그날의 기억과 기어코, 마주해야 했다.

나는 두려웠다. 엄마처럼 살게 될까 봐 무서웠다. 때때로 그런 삶을 생각하면 숨이 막혔다.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듯했다. 엄마처럼 살기 싫었고, 아빠 같은 남자는 만나고 싶지 않았다.
언제부터였는지 나는 아빠 같은 남자는 절대 만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힘들어 하는 모습을 옆에서 오랫동안 지켜봐 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엄마!"
부르다 보면 눈물이 날 것 같은 단어. 약을 찾는 엄마의 엉금엉금한 무릎걸음이 떠올랐다. 어떤 병에 걸리면 낫기 위해 그 병에 해당하는 30알 분의 삶을 삼켜야 한다. 삼켜내야 한다. 그마저도 하나의 병의 무게다. 병들의 무게는 엄청나서 엄마는 도저히 다시 설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지나간 삶의 스산함은, 늘 가장 최악인 것처럼 보였던 그 순간이 지나고 나면 지금보다 낫다는 것이다. 매일 최악의 순간을 감내하지만 지나고 나면 최고의 순간들. 역설의 무게에 질식할 것 같은 순간. 그 순간에 꾸던 꿈속에서 쌀은 눈처럼 떨어졌다. 누런 쌀을 걷어내니 흰쌀들이 나왔다.
어떤 날은 잠에 들자마자 깨어났고, 밤이 되자마자 아침이 됐고, 집에 오자마자 출근을 했다. 빛이 아롱지며 손톱 위에 떨어졌다.

엄마가 돌아가신 뒤부터 나는 눈을 내리깔고 걷는 버릇이 생겼다. 기온이 한없이 낮춰져 있었다. 봄이지만 겨울 같은 날씨가 계속되고 있었다. 나는 늘 오한이 든 것처럼 몸이 떨렸다.

여기까지 오는 데 굉장히 오래 걸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의 생(生)만으로도 버거운데 네 사람의 생이 휘청였다. 각자의 생과 생이 손을 잡을 수 있을까? 아직은 서로 용서해야 할 일이 너무나도 많은데…. 이해하기도 쉽지 않지만 이해가 정답이 될 수도 없을 텐데….
손을 잡는다면, 그 생은 조금이라도 단단해질 수 있을까?

6년이 지나 나는 여전히 걷고 있다. 아빠와 엄마와 동생의 손을 잡고 걷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엄마는 연기처럼 사라졌고, 부유하는 공기 속에서 다만 엄마를 느낄 뿐이다. 그래도, 걸어야 할까? 걸어야 한다. 걸을 수밖에 없다. 아직은 걷는 것 외에 무얼 할 수 있을지 알지 못하므로….


여전히 나는 걷고 있다.

병으로 죽은 엄마의 상실 앞에서도 남겨진 가족들은 무너질 수밖에 없는데, 하다못해 자살 유가족들은 어떨까? 자살 유가족들은 우울증에 빠지기 쉽다. 특히 다른 사람의 죽음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남’들 때문에 더욱 그렇다.
자살 유가족들은 항상 손가락질에 시달려야 한다. ‘가족이 도대체 어떻게 했기에 또 다른 가족 구성원이 자살을 했을까?’ ‘그 죽음에 남겨진 가족들은 책임이 없을까?’ 등, 자살 유가족들은 그러한 손가락질 속에서 죄책감을 내면화한다. ‘나 때문일지도 몰라’에서 ‘나 때문이야’로 번지는 건 순식간이다.

우리 가족 역시 아직도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엄마는 왜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을까? 우리에겐 책임이 없을까? 우리가 뭘 잘못했을까? 단 한 번이라도 엄마가 이해받고 있다고 느낀 적이 있었을까?

남겨진 가족들은 오늘도 엄마와의 과거를 뒤져본다. 그 과거는 때로 애틋하고, 때로 따뜻하다. 그럼에도 회상을 멈출 수 없는 건 그렇게 하는 것이 엄마를 추억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모성에 대한 우리 모두의 부채감은 끊임없이 엄마를 반추하게 한다.

한 죽음은 지속적으로 삶을 환기시킨다. 많이 고통스럽더라도 엄마를 그리는 일을 멈출 수 없는 이유다.

상실 이후의 삶보다 더 중요한 건 삶 그 자체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가는가일 테다. 엄마를 잃고 내가 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아빠는 매일 엄마 생각을 한다. 어떤 이는 생각하면 가슴 아프니 이제 그만 생각하라 한다. 엄마의 사진도 더 이상 보지 말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엄마를 기억하고 싶다. 우리가 아플 걸 생각해 엄마를 기억하는 걸 그만두고 싶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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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식장 바닥은 딱딱했다. 거듭 뒤척이며 자세를 바꿨다. 끊이지 않고 오는 손님들을 맞이하며 온 가족이 두통약을 몇 개나 집어삼켰는지 모른다. 누워 있으니 굽었던 척추가 확 펴지는 느낌이었으나 잠이 오지 않기는 매한가지였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며 영정사진 앞에서 웅크려 있는 아빠와 동생을 생각했다.
눈물은 나지 않았다. 한 번쯤 소리 내어 크게 울어보고 싶었지만 곁에 있는 사람들을 떠올리면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그것은 눈치 보기가 아니었다. 나의 울음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까 조심스러운 두려움이었다.

2018년 5월 25일. 엄마가 돌아가셨다. 주민등록상 생일과 똑같은 월과 일에. 엄마가 중환자실에 입원한 건 며칠 되었지만 직장인이라 휴가를 내기가 여간 눈치 보이는 게 아니었다. 하필이면 마감 기한이라서 더욱 그랬다. 주말에 고향에 내려가기로 하고 일에 집중하는 와중에 급박한 전화가 걸려왔다. 병원에서 엄마가 오래 버티지 못할 거라고 했단다. 그 말을 듣는 와중에도 나는 그리 심각하지 않았다. 마감 걱정이 먼저였다.

나는 못 말리는 일 중독자였고, 내심 우리 엄마는 툭툭 털고 다시 일어날 거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본래 병원이란 곳은 환자에게 필요 이상으로 겁을 주지 않던가’라고 여겼다. 하지만 먼저 언니를 떠나보낸 적이 있는 후배는 심상치 않은 조짐을 느꼈는지 얼른 고향에 내려가는 게 좋겠다고 했다. 나는 수 회, 수십 회 고민하다 결국 다음 날 저녁에 고향으로 떠났다.

다음 날 병원에서 긴박한 전화가 수차례 걸려왔고, 의사는 엄마를 위해 결정을 내려주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지금은 약의 힘으로 겨우 버티시는 거라고, 이 상태에서 계속 약을 추가한다면 생명은 연장할 수 있겠지만 그건 살아도 사는 게 아니라고 했다. 아빠는 계속 집에 가고 싶다고 했다. 머리가 아프다고 했다. 아빠는 떨고 있었다. 두려웠을 것이다. 사실 우리 전부 그랬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가족을 대표해 고개를 끄덕였다.

2018년 5월 25일 오전 9시. 엄마가 돌아가셨다. 마치 내가 오기만을 기다린 듯 내게 조금이나마 눈 붙일 수 있는 하루를 선물하고, 그렇게 마지막까지 딸을 배려하며 눈을 감으셨다. 약을 계속 투여했으면 어땠을까? 엄마는 내가 죽였다. 그런 거나 다름없다고, 나는 울음을 삼켰다.

장례가 끝나고 우리 가족은 저마다 각자의 방에 누워 시간을 보냈다. 아빠는 곡기를 끊었고 그러면서 죽음을 생각했고, 동생은 너무 많이 울었고 그러면서 죽음을 생각했고,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엄마의 꿈만을 계속 꾸며 죽음을 생각했다.
우리는 매일매일 죽어가고 있었고, 말을 했든 그렇지 않았든 저마다의 죄책감으로 말라가고 있었다. 그러면서 또한 서로의 곁에 남아 있는 방식으로 힘이 되어 주고 있었다.

나의 고통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사람들은 너무나도 쉽게 시간이 지났으니 이제 내가 고통에서 헤어났으리라 짐작하곤 한다. 하지만 우리 가족은 아직도 깊은 터널 속에 있다. 그 터널의 어두움은 터널에 있어 본 이들만이 알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쉽게 다른 사람의 고통을, 상실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이들이 무섭다. 나는 이제 다시는 누구의 고통도 섣불리 재단할 수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나 역시 다른 방법이 없다. 상실을 먹고 자라난 책들을 그저 쓰다듬고 읽고 그에 대해 토해내는 것 외에는. 죽음에 대해 말하기를 꺼리는 사회를 정면으로 마주한 채 애도를 꺼내놓는 것 외에는. 그리하여 충분히 슬퍼하는 것 외에는.

이제 나의 삶은 다시는 이전과는 같지 않으리란 걸 깊게 느낀다. 삶을 대하는 방식 역시 이전과는 절대 같지 않을 테다.

오늘도 나는 어두운 터널 속에서 아무도 피하지 못할 질문을 던진다. 삶과 죽음이 겹쳐진 페이지를 들고.

극심한 병증이 엄마의 온몸을 덮치자 엄마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엄마가 필요 이외의 말을 할 때, 그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고 원래 형태가 뚜렷하지 않던 그녀의 말들은 아예 형체를 잃어버렸다. 꼭 낡은 미래를 읽고 있는 것만 같았다. 누구라도 그런 류의 말들은 좀처럼 이해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 순간이 올 때마다 나는 어김없이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무게의 거대한 젤리들이 내 머리 위로 "쿵" 하고 떨어져 버리고 그것이 이내 작열하는 태양 아래 녹아내리는 기분이다. 어찌할 수 없고 손 쓸 새도 없이 나는 불쾌한 슬픔에 젖어 버리곤 했다. 그럼에도 엄마는 이해를 바랐고 여전히 나는 엄마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 매일이었다. 엄마와 나는 각기 다른 밤의 장막 뒤에 숨어 있었다. 우리는 그저 하릴없이 밤을 지새웠다. 그리고 그렇게 밤을 떠나보냈다. 거의 잠을 이루지 못한 채 뜬눈으로 새벽을 맞는 건 우리 모녀가 가장 잘하는 일이었다.

내 곁에 누워 함께 눈을 부릅뜬 채 밤을 지새우던 현실 속 엄마는 내가 자란 만큼이나 세월을 차곡차곡 쌓아 올린 상태였다. 피부는 생기를 잃었으며 오랜 불면으로 몸은 더욱 야위었다. 곱던 머리칼은 푸석거리고 세월의 흐름을 거스르지 못한 모발들이 한 움큼씩 빠지기 일쑤였다.
엄마는 매일 더 깊어지는 주름에 어찌할 바 몰랐다. 그런 엄마의 머리통은 아주 조그마했다. 놀라울 정도로 작아서 바라보고 있노라면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엄마의 봄.
엄마의 여름.
엄마의 가을.
엄마의 겨울.
엄마의 사계절.

엄마에게 들러붙은 시간.
시간의 더께들.

그 혹독하고 진득한 것들을 떠올리다 보면 온몸이 차가워졌다. 오소소 소름이 돋고 냉동 창고에 막 들어선 사람처럼 정신이 아찔해졌다. 그때마다 나는 갑자기 나에게로 밀려든 전 생애의 무게에 질식할 것만 같았다.

나는 태어나서는 안됐다. 어쩌면 나의 출생이 엄마의 전 생애의 발목을 걸어 넘어뜨린 건지도 모른다.
1987년 3월 26일, 무표정하게 서 있는 엄마의 결혼사진 속에 자리한, 그로부터 3개월도 채 지나지 않아 태어난 나란 아가는. 그래서 나는 그녀를 웃게 해주고 싶었다. 웃게 만들고 싶었다.

이제 더 이상은 용서를 위해 애쓰지 않기로 한다. 나는 엄마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내 노력은 위선이었다. 내가 결혼을 하고 나니 비로소 보이는 엄마의 삶이 있다. 그러나 내겐 아이가 없으므로 나는 끝내 엄마로서의 엄마 삶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죽음은 늘 삶의 뒤편에 있고 삶은 언제나 죽음의 양면이다.
그러니 나는 매일매일 아주아주 씩씩하게, 아주아주 훌륭하게 죽어갈 것이다.

엄마는 우울했다. 엄마가 신경정신과를 다니며 치료를 받기 시작한 게 내가 아홉 살 때쯤이었고 돌아가시기 직전까지도 입원을 고려했을 정도로 치료를 받았으니 엄마의 우울증은 20년 넘게 묵혀온 것이었다. 엄마의 우울에는 아들이 아닌 딸로 태어남으로써 받은 냉대와 장애에 대한 멸시, 시골 여성으로서 당한 노동력 착취와 아내이자 며느리, 엄마로서 받은 폭력이 기저에 도사리고 있었다. 거기에 가난이 디폴트로 얹어져 엄마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사회적으로 최약자의 삶만을 살다 갔다.

엄마는 자존감이 낮았다. 오랜 냉대와 멸시, 모욕들이 엄마를 그리 만들었다. 엄마는 모든 일에 자신이 없었다. 심지어 다른 사람이 보기엔 엄마가 정말 잘하는 일임에도 엄마 스스로는 그걸 인정하지 못했다. ‘내가 잘할 수 있는 게 있을 리 없잖아’가 보통의 엄마 반응이었다. 엄마가 움츠리고 고개를 숙일 때마다 내 마음도 무너져 내렸다.

칭찬은 엄마에게 가 닿지 못했다. 진정으로 그 사람을 사랑하는 단 한 사람만 있어도 우울은 많이 옅어진다는 말을 들었다. 내가 이렇게 엄마를 사랑하는데, 외할머니도 엄마를 그리 사랑했다는데, 우리 엄마의 우울이 나날이 짙어만 가는 이유는 뭘까? 매일 밤 고민했다.

엄마의 우울을 머리로만 받아들였다. 어쩌면 나는 엄마가 우울할 수 있음을 미처 생각지 못했던 걸 수도 있다. 엄마인데, 나의 엄마인데, 나를 낳은 사람인데 엄마가 어찌 불안하고 불안정한 존재일 수 있는지, 생생하게 마음속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것 같다. ‘부모란 원래 산처럼 든든하게 자식 뒤에 우뚝 선 존재 아니던가’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건 대단히 큰 잘못이었고 내가 엄마라는 타자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음을, 엄마의 고통을 전혀 나눠 짊어지지 않았음을 의미했다.

모두가 우울한 시대. 이러한 시대를 산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그림자처럼 달라붙은 우울을 안고 살아가던 엄마의 조용한 뒷모습을 그려본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진정으로 온기 가득한 손을 내밀고 엄마의 어깨를 마사지하고 싶다. 지금껏 엄마 어깨에 붙은 우울을 떼어 내려고만 했으니 이젠 그 우울을 감싸 안아 뭉치고 싶다.

납골당에는 ‘정숙’이라는 표지판이 있다. 그 표지판을 볼 때마다 나는 코끝이 매워진다. 엄마 이름이다. 표지판을 똑바로 보고 걷다 그 표지판이 등 뒤로 사라지면 매화실이 나온다. 오늘은 누군가 불을 켜 두고 갔다. 고인들께는 어두운 곳이 좋을까, 불빛 환한 곳이 좋을까.

때때로 엄마 생각이 너무 깊어질 때면 주위 사람들에게 립밤을 선물하곤 한다. 엄마가 좋아했던 니베아 벚꽃 립밤은 일본에서만 구할 수 있어서 니베아 라인의 립밤을 따로 챙겼다. 아마 사람들은 내가 왜 그들에게 립밤을 선물하는지 모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엄마를 추억한다. 엄마가 좋아하던 것들을 주위 사람들에게 나누는 나만의 방식으로….

동해에 온 김에 새파란 어달리 바다가 통째로 보이는 카페에 갔다. 부드러운 카페의 원목 테이블과 히비스커스를 베이스로 뭉근하게 끓인 딸기차의 달짝지근한 상큼함은 어쩐지 좋다. 그러나 아무래도 엄마가 보고 싶다. 엄마를 대체할 수 있는 건 엄마 외에 아무것도 없다.

어릴 적의 몇 년은 성인 시절의 몇 년보다 더 크게 영향을 미치는 것 같기도 하다. 엄마는 내게 한 번도 화를 낸 적이 없었다. 뭐든지 스스로 고르게 했고 그렇게 고른 것은 아무리 형편이 어려워도 꼭 사 주었다. 내 물건을 마음대로 처리한 적도 없어서 모든 결정의 처음부터 끝을 모두 내가 하게 했다.
막내 외삼촌은 여러 가지 부침 속에서도 내가 이렇게 잘 자란 게 신기하다고 했지만 삼촌이 모르는 게 하나 있다. 엄마의 온전한 지지와 양육이 없었다면 나는 결코 지금의 내가 될 수 없었음을….

어쩐지 엄마가 보고 싶은 밤이다.

엄마와 나는 서로를 늘 친구로 여겼다. 엄마는 나랑 다니면 심심할 새가 없다고 했다. 평소에 사람들 앞에서 그다지 말이 없는 나는, 엄마 앞에서라면 종일이라도 종알댈 수 있었다.

우리 엄마와 아빠는 늘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그들의 말을 경청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설사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타인을 먼저 배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때로는 내가 무지하게 손해를 보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나는 엄마의 말을 들었다.

엄마는 아닌 것에 있어서는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는 것도 행동으로 보여줬다.

선생님이 아주아주 잘 사는 집 애들만을 예뻐한다는 걸 나는 알았다. 그러나 그런 건 이제 내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내 할 일을 했다. 열심히 공부해서 기말고사에선 전 과목 백점을 받았다. 그렇게 나는 내게 중요하지 않은 사람에 대해선 신경 쓰지 않는 법을 배웠다.

경제적으로 그리 넉넉지 않았던 나의 유년 시절은 엄마로 인해 풍족하게 채워졌다. 나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친구들은 우리 집이 부자라고 생각했다. 그만큼 나는 구김 없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 모든 것이 나의 엄마 덕분이었다.

역시 엄마는 영원한 나의 히어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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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딸의 꿈
2018년 6월 3일 오전 7시
계속 기도했는데 드디어 꿈에 엄마가 나왔다. 하늘나라 가더니 엄마 눈이 파래졌다. 평소 즐겨 입던 옷을 갖추어 입은 엄마는 사람들을 따라 큰 테이블에 둘러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즐거워 보였고 건강해 보였다. 큰 통유리창 사이로 초록 잎들이 넘실거렸고 하얗게 햇빛이 부서졌다.
"엄마!" 하고 목멘 소리로 부르며 달려가자 잠깐 당황하던 엄마는 나를 꼭 안아줬다. 그 모습 그대로 그곳에서 편안하길, 행복하길, 아프지 않길….

작은딸의 꿈
2018년 6월 6일 오전 8시 10분
방금 꿈에 엄마가 나왔다. 장소는 동인병원 같기도 하고 주공아파트 살 때 같기도 하고….

내가 부랴부랴, 마치 학교 끝나고 집에 가는 애마냥 엄마가 죽을까 봐 초조해 하며 집으로 가는데, 엄마로 보이는 모습이 보였다. 내가 반가워서 손을 흔들며 다가가니 정말 엄마가 나와 있었다.
내 마음 한편으론 생각했다.
‘죽은 엄마가 살아왔다! 하늘나라에서 5분만 휴가 나왔으면 했는데, 꿈인가? 생시인가?’
기쁘지만 불안한 마음도 컸다.

정말 하늘나라에서 5분 휴가 받고 내 꿈에 나왔나. 눈도 아프지 않은지 안경도 끼지 않은 채로….

동생이 동영상을 지금 확인해 보란다. 보내준 링크로 들어가니 죽은 사람과 만날 수 있다는 영상이었다. 영매 같은 사람이 있고 죽은 자를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었다. 곧이어 그 사람은 자신이 바라던 죽은 사람과 조우했고 펑펑 눈물을 쏟았다. 그 채널에는 그런 영상들이 가득했다. 동생은 그 사람을 찾아가고 싶다 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돌아가신 엄마를 만나고 싶단 거였다.
난 이런 건 다 사기라고 믿을 게 못된다고 했다. 게다가 돈이 드는 일이었다. 그러나 동생은 그까짓 돈이야 엄마를 만날 수 있다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다.
동생이 보고 싶었다. 그런 꿈이었다.

아빠 말이 다 맞았고 나 역시 자정에 동해에서 택시를 타고 집에 갈 생각을 하니 깜깜했지만 동해 집에 혼자 있을 엄마 생각이 났다.

엄마는 밤에 혼자 집에 있는 걸 유난히 무서워하곤 했다. 우리 집에 도둑이 세 번이나 든 전력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집에 아무도 없으면 엄마는 아마도 오늘 밤을 꼴딱 새울 것이다.

어린 시절 아빠랑 장흥에 낚시를 하러 간 적이 있다. 아빠 친구들과 함께 낚시를 하러 갔는데 아빠는 어린 나만 데리고 갔다. 저녁에 돌아오겠다 하고 나갔는데, 예상 외로 낚시는 길어졌고, 술에 취한 아저씨들은 운전을 못해 술을 깨고 가려다 보니 그다음 날 집에 도착하게 됐다. 그 사이 엄마는 한숨도 못 잔 채 우리를 기다렸다. 연락도 없이 외박을 한 아빠에 대한 화도 한몫 했을 거다. 게다가 어린 딸자식까지 데리고 가 날밤을 샜으니 엄마가 분노의 밤을 지샌 게 고스란히 이해가 된다.

갑자기 이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엄마를 생각하면 지금 당장 동해에 내려가야 했고 아빠 말을 듣고 보면 또 아빠 말이 맞는 것도 같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전화기를 들고 난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서 있었다.

오랜만에 엄마가 꿈에 나왔다. 엄마는 날씨가 왜 이리 우중충하냐며 우울하다고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날이 이리 더운데 우중충하다는 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꿈에 처음으로 엄마가 밝지 않은 모습으로 등장했다. 그게 참 아팠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우리의 단란한 한때였다.
엄마가 돌아가신 지 딱 100일째 되던 날이었다. 100일제를 지내러 고향에 내려가려 했는데 병들이 발목을 잡았다. 엄마가 겪었을 아픔을 이토록 느리게, 또한 뼈저리게 느끼면서 속상하고 죄송해서 제발 꿈에 나와 달라고 빌었는데 101일째, 엄마가 꿈에 나왔다. 마치 엄마는 천국에서 잘 지내고 잘 먹고 있다고, 엄마는 괜찮으니 엄마 걱정은 말라는 듯….
엄마는 꿈속에서조차 너무나도 나의 엄마여서 딸 마음 편하게 해주려고 애써 걸음하셨나 보다.

보고 싶은 우리 엄마….
다시 태어나도 난 엄마 딸로 태어날 테다.
우리 엄마는 그토록 좋은 엄마였다.

오늘만 눈물을 훔치고 또다시 나는 살아갈 것이다.
엄마의 너른 품을 기억하며 살아낼 것이다.

엄마의 첫 생신제가 다가오고 있다. 그래서일까. 요즘은 어디론가 떠났다 집으로 다시 돌아온 엄마의 꿈을 자주 꾼다.

잔인한 꿈에 소리를 지르며 일어나 남편을 껴안았다.
남편은 본인도 악몽을 꾸고 있던 중이었다고 했다. 우리는 서로를 끌어안고 토닥였다.
남편에게 악몽 이야기를 해보라고 했다. 나는 그 꿈 이야기를 들으며 다시 잠에 빠졌다. 이번 꿈은 몹시도 잔혹했지만 이상하게 소설적인 데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꿈속에서 엄마가 요리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꿈속에서라도 엄마가 집안일에서 해방되었으면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나의 꿈의 본질 같았다.

나는 전부터 이사를 가고 싶었다. 모든 게 지금 사는 아파트에서 시작됐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집터가 좋지 않은 건 아닐까, 갈수록 그런 생각이 들었더랬다. 마침내 기다리고 기다리던 새 아파트로 이사를 했고 모든 게 좋아졌다, 나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모든 건 그대로고 엄마는 내가 만들어낸 환상이며 나는 신경 쇠약에 걸려 점점 미쳐가고 있지 않나 여겨졌다.

남편에게 말하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꿈 덕분에 매일 일어나는 시각보다 30분 먼저 깨게 됐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엄마를 떠올렸다. 꿈속 축 늘어진 채 화장실에 엎드려 있던 엄마가, 중환자실에서 눈을 감고 누워 있던 현실의 엄마와 겹쳐져 마음이 따끔거렸다.


창 밖에선 햇살이 부서졌지만 침대 밑 매트리스는 이상하게 차가웠다.

사라짐. 꿈과 죽음은 그 속성이 비슷하다.
정처 없고 가는 데 없이 잊힐 뿐이다.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내가 아득한 것은 곧 휘발될 꿈의 기억과 그 기억의 끄트머리를 붙잡고서라도 돌아가신 엄마 곁에 머물고 싶은 나의 마음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지은의 남자친구처럼 밤을 걸으며 밤의 장막이 걷히길…. 엄마를 기억하려고 애쓰며, 부유하는 엄마와의 추억들을 볼 것이다. 아마도 나의 평생에 걸쳐 매일을 오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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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엄마를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들

이 책은 한 번도 진정으로 엄마 편을 들지 못했던 아이가 커서 기어코 엄마 편을 드는 이야기다.

50여 년을 살다 간 우리 엄마의 이야기가 그저 ‘나의 엄마 이야기’로 그칠 것 같았다면 애초에 이 책을 펴낼 용기를 내지 못했을 테다. 나의 엄마는 시대의 딸로서, 누이로서, 여성으로서, 장애인으로서, 아내로서, 엄마로서, 말 그대로 사회적 최약자의 삶을 살다 갔기에 최 여사의 이야기 속에서 읽는 분들 각자가 무언가 느끼거나 사유하거나 포착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회사였다. 팀원들과 회의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 전화가 걸려 와서 나는 회사 복도로 나갔다. 복도는 어두웠다. 짙고 푸르스름한 어둠이라면 무서웠을 텐데, 갈색의 부드러운 어둠이었다.
"여보세요."
전화 속 여성은 병원이라고 했다.

"그래서요?"
나는 전화 속 목소리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전화 속 여성은 현재 우리 엄마가 병원에 입원 중이라고 했다. 나는 너무 놀라 전화기를 붙잡지 않은 손으로 입을 막았다. 엄마 상태가 너무 심각하고 증세가 급박해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그전에 보호자인 나에게 전화를 한 거라 했다.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생각과 일들이 실타래처럼 엉켜 있었지만 최대한 침착하려고 노력했다.

막 깨어난 나는 남편에게 엄마 상태에 대해 이야기했다. 병원에서는 아직 연락이 없다고 말했다. 남편은 얼굴을 찡그리며 엄마가 아픈데 지금 뭐하고 있는 거냐고 물었다. 나는 당황해서 "병원에서 전화를 줄 테니 그때 오라고 해서…."라고 말끝을 흐렸다. 남편은 당장 옷을 입으라고, 씻지도 말고 병원으로 가자고 했다.
"그럼 회사는? 학교는?"
내가 묻자 남편은 "촌각을 다투는 상황에서는 일과 학교, 책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 법이야"라고 했다. 그건 우리 엄마라고….
나는 엄마를 후순위로 미뤘다는 자괴감과 자책감에 펑펑 울며 옷을 끌어다 입었다.

꿈에서처럼, 2018년 5월의 그날처럼….
나는 또다시 회사로 돌아가고 있었다. 꿈과 현실의 엄마를 뒤로 한 채.

죽은 친구가 살아 있을 때처럼 꿈에 나와서 우리 엄마가 모월 모일 모시에 영면하실 거라 말했다. 나는 과거, 현재, 미래를 모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친구의 말이 맞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악몽을 꿨다고 남편을 소리쳐 깨운 뒤 다시 잠들려고 보니 어디선가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나는 힘이 없어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로 우리가 문단속을 제대로 했냐고 남편에게 물었다. 남편은 그런 내가 무섭다는 듯 깜짝 놀라 쳐다보다가 제대로 문단속을 했으니 걱정 말라고 했다. 너무나도 무서워서 다시 잠들지 못하고 동생에게 카톡을 보내고 유튜브로 웃긴 영상을 보려다 말고 남편을 꼭 끌어안고 다시 잠들었다.

할 수만 있다면 엄마도, 친구도, 꼭 끌어안고 싶었다.

잠들기 전에 계속 생각했다. 오늘은 엄마 꿈을 꿨으면 좋겠다고…. 엄마한테 물어볼 게 아주아주 많다고…. 엄마를 한 번만이라도 안아보고 싶다고…. 그래서 잠들기 직전까지 엄마한테 물어볼 것들의 리스트를 끝없이 작성했다. 그런데 정말로 엄마가 나타난 거다.

"그래도 행복해? 천국에 있어서 행복해?"
꿈 밖의 내가 꿈속에서 엄마를 만나게 된다면 엄마에게 가장 물어보고 싶었던 질문이었다. 엄마의 눈가가 눈물로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사랑하는 우리 김. 미. 향, 김. 소. 라 너무 보고 싶은데, 어떻게 행복해. 둘 다 너무 사랑해. 정말 보고 싶어."
이제 나의 울음은 더욱 커져갔다.

그때, 꿈속의 대지가 지진이 난 듯 흔들리더니 선풍기가 돌아가는 소리, 누군가 자판을 타닥타닥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주위의 공기와 온도가 다시 한 번 바뀌었다.
눈이 저절로 떠졌다. 남편은 오늘 약속이 있어 늦는다고 했다. 나는 이불로 얼굴을 감싸고 운다. 잠들기 직전 빨리 하늘에 가 엄마를 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게 떠오른다.

이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나 엄마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들의 목록은 아직 너무도 길다.

꿈속에서 나는 엄마가 돌아가셨다고 생각지 못했다. 평소의 엄마였다. 현실에서는 엄마가 슬플 때, 화날 때, 우울할 때 도통 공감해주지 못했던 나의 죄책감이 표출된 꿈이었을까? 꿈에서처럼 엄마의 말에 깊이 공감해주었다면, 엄마 맘이 좀 더 평안했을까?


도대체 요즘 왜 이런 꿈들을 꾸는지 모르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게 있다. 엄마 목소리를 많이 들을 수 있어 좋았다.

그때 엄마에게 반려동물 친구를 만들어주지 못한 죄책감이었을까? 그 후로도 엄마는 종종 내 꿈에 찾아오곤 했다. 어떤 꿈은 기억이 생생했고, 어떤 꿈은 엄마가 나와 주었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빨리 누웠다. 누워서 잠이 들면 엄마를 만날 가능성이 조금은 높아진다. 그래서 나는 이불을 덮었다. 엄마가 보고 싶었다.

꿈속에서 엄마는 거짓말처럼 내 곁에 있었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늘어지게 잠을 자고 싶다. 3일 사이 앓느라 겨우 끌어올린 입맛은 달아났고, 몸무게가 3킬로그램이 빠졌다. 진통제 한 상자를 다 비웠다. 잘 먹고 잘 살아보겠다고 영양제를 10만 원어치 샀다.
그런데 이런 거 다 필요 없고, ‘한 일주일 미친 듯이 자고 나면 회복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엄마 꿈이나 실컷 꾸면서….
그러나 이 여름은 내게 너무 가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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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 회고되어 「필요한 건 오직 용기뿐!」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일화는 학창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공감을 표현했어야 할 중요한 순간을 놓쳤고, 그래서 친구의 인생에 평생 남을 결과를 남겼던 일화를 회상한다. 당시의 머뭇거림, "가장 필요할 때 올바른 말을 못 하게 막는 것은 많은 경우 용기 부족"임을 깨닫는 경험을 통해, 그는 "누군가를 돕고 싶은 첫 번째 충동에 주저 없이 순종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웠다. 공감의 말과 행위는 도움이 가장 절실한 순간에만 참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사후에 알려진 츠바이크의 편지와 기록이 생생하게 보여주듯이, 이런 깨달음은 이후 그의 행동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취하는 것보다 더 많이 내어주고, 자신의 재능을 최대한 발휘하고자 평생 노력했다. 덕분에 그의 동시대 사람뿐 아니라 우리와 미래 세대 역시 인식의 폭을 확장하고 강화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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