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삶에 지치면 평범함도 꿈이 된다

그런데 이 ‘평범함’이란 놈이 참 애매했다.

평범함이 꿈인 것은 분명 사실인데, 시간이 지나도 도통 알 수가 없었다. 평범함이란 게 도대체 뭘까.

그래서 어른이 된 나의 목표는, 아니 꿈은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다. 불행해지지 않는 것이다. 아프지 않고 매일을 별 탈 없이 마무리할 수 있길 바란다. "오늘 저녁은 뭘 먹지?"라는 사소한 고민에 시간을 충분히 써도 괜찮은 지금이, 조금 더 지속되길 바란다. 행복이 더 많아진 삶이 아니라 불행이 더 줄어든 삶이다.

그렇기에 미안하지만 앞으로 시작될 이야기 역시 행복을 찾아가는 낭만적인 여정이 되진 않을 것이다. 오히려 매일 찾아오는 불행을 아득바득 수비해내는 꽤나 현실적이고도 세속적인, 낭만 없는 분투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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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막내 외삼촌은 집안의 온갖 미움을 독차지하며 자랐다. 하나는 들을 수는 있으나 늘 어설퍼 외할아버지의 호통과 마주서야 했다. 또 하나는 두 귀 모두 들리지 않으니 하릴없이 고스란히 바보 취급을 당하며 클 수밖에 없었다. 외할머니는 본인 배 속에서 낳은 두 남매가 가엾고 또 가여워 매일 밤 그들을 품은 채 옷고름으로 눈물을 찍어냈다.
엄마와 막내 외삼촌은 얼마 되지 않은 시린 삶의 무게가 버거워 흙냄새가 나는 따스한 그 품에서 오래도록 머물 수 있기를 바랐다.

엄마는 늘 당신 귀에서 냄새가 난다고 느꼈고 그래서 사람들 앞에 당당히 나설 수가 없었다. 엄마는 자신감이 없고 수줍었다. 놀림을 받을까 겁이 났다.
그러나 귀가 아파서 고통받는 건 엄마였고, 엄마의 귀가 그렇게 된 건 엄마 탓이 아니었다. 하지만 엄마는 모두가 스스로의 탓이라 생각했다. 남의 탓을 하기에 엄마는 너무 착했고 사회는 여성의 장애에 관심이 없었다.

외할아버지의 고함은 그칠 날이 없었고, 엄마의 가슴속엔 매일 시퍼런 멍이 들었다. 그러나 몰려오는 하루를 내칠 방법이, 엄마에겐 없었다.

"정철아. 너는 이 집에 남지 말고 떠나. 가능하다면 그러는 게 좋겠어."
엄마는 자신도 모르게 막내 외삼촌에게 그런 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막내 외삼촌이 떠나던 날 짐가방을 챙기면서 엄마는 참 많이 울었다. 엄마에게 막내 외삼촌은 늘 걱정되는 애틋한 존재였다. 그런 존재를 연고도 없는 타지에 보내야 한다니…. 이제 무슨 일이 있어도 막내를 지켜주기는 힘들 거란 생각에 엄마는 가슴을 쳤다.


만일 막내 외삼촌이 그곳에서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다면, 엄마는 집을 떠나라고 소리치던 과거를 발기발기 찢어버리고 싶을 터였다.

막내 외삼촌이 떠나자 엄마는 마음 둘 곳이 없었다. 몸 한가운데 구멍이 뚫린 것 같았다. 그 숭숭한 구멍 사이로 시종 바람이 불어 잠자리에 들 때마다 가슴이 쓰렸다.
‘빨리 이 집을 떠나야 해. 그런데 어떻게 하면 이 집을 떠날 수 있을까?’
엄마는 매일 밤 발로 이불 끝을 비비적거리며 골똘하게 생각에 잠겼다.

그 집에서 엄마는 사람이 아니었다. 소였다. 아니, 어쩌면 소보다 못한 존재였다. 소야 나중에 팔면 한 밑천이지만, 엄마는 결혼해서 이 집을 나가면 출가외인으로 취급받을 거였다. 그걸 아는 외할머니도 한쪽에서 소리 없는 울음을 울었다. 엄마는 첫 번째 남자친구를 그 이후로 다신 만날 수가 없었다. 멍이 빠지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엄마가 남자에게 마지막 편지를 보냈다.


당신이 날 만나러 오면 나는 그날로 죽게 되니 다신 찾아오지 마세요. 나는 참 바보 같지만 앞으로도 지금처럼 바보같이 살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정말 고마웠고 다만 미안해요.

외할머니는 매일 밤 구석에서 숨죽여 흐느끼는 엄마가 가여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 외할아버지가 외출하고 없을 때에 외할머니는 엄마가 좋아하는 반찬을 잔뜩 차려놓고 엄마에게 밥을 먹였다.
그러던 어느 날 외할아버지가 며칠 친척집에 머물다 돌아오겠다고 했을 때 외할머니는 옳다구나 싶었다.

엄마는 형제도 많지 않고 장남도 아닌 남자에게 시집가고 싶었다. 외동도 싫었다. 외동은 버릇없고 자기밖에 모른다, 는 어른들의 말보다 집안의 단 한 명뿐인 아들에게 쏟아질 기대가 엄마에게 전이될 게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이게 엄마의 결혼관이었다.
그러나 엄마가 바라는 몇 안되는 이 조건을 충족시키는 남자들이 많지 않았다. 엄마는 여전히 땡볕에서 농사를 짓고 소에 여물을 주고 부모를 위한 밥을 준비하고 때때로 외할아버지의 호통과 마주하며 소일했을 뿐이다.

비록 장남이었으나 남자는 엄마가 아는 남자들 중 가장 형제가 적었다.

엄마, 아빠의 결혼사진 속에는 술을 마시고 와서 얼굴이 붉은 아빠와 술 냄새가 싫어 이맛살을 찌푸린 엄마와 엄마의 배 속에 숨 쉬고 있던 아이, 이렇게 세 명이 함께 찍혀 있었다.

결혼 후 엄마의 삶엔 많은 변화가 있었다. 농사일에서 해방된 엄마는 결혼식을 올리고 3개월 뒤에 출산을 하자마자 성게 까는 일을 시작했다. 아빠가 일을 하러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빠는 대부분의 시간을 친구들과 술을 마시거나 도박을 하는 데 썼다. 젊은 시절의 아빠는 전형적인 한량이었다. 집에 들어오는 날보다 들어오지 않는 날이 더 많아서 엄마는 아빠의 얼굴마저 잊을 정도였다. 아니, 사실 엄마는 아빠의 얼굴을 잊고 싶었을지도 모른다다. 미치도록 잊고 싶은데도 아빠의 얼굴을 잊을 수가 없었던 건지도 모른다. 아니,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엄마 말에 따르면, 때때로 집에 들아오는 날 아빠는 술에 취해 엄마를 욕보이기 일쑤였다고 한다. 엄마가 거부하면 그때부터 매질이 시작됐다. 그 시절의 바닷가마을 남자들은 다 그랬다고 아빠를 미화하고 싶은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아빠는 아마 본인을 변호하고 싶을 테지만, 첨예한 사안에선 늘 엄마, 아빠의 이야기가 달랐다).
아빠는 피임도 하지 않았다. 엄마는 아빠를 닮은 사내아이가 태어날까 두려워 관계를 가지는 쪽보다 맞는 쪽을 택했다. 아빠의 아이는 한 명으로 족했으니까.

그럼에도 엄마는 도망치지 못했다. 어쩌면 엄마는 자신도 모르는 새 아빠에게 지배당하고 휘둘리고 있었을 거다. 아빠의 폭력은 싫었지만 아빠의 경제력은 필요했으니까. 아빠가 하는 잠수부 일은 목숨을 담보한 험한 일이라 설사 일하는 날이 며칠 되지 않더라도 아빠가 엄마보다 훨씬 많은 돈을 집에 가져다줄 수 있었다.

수십 회, 수천 회 죽을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그때의 엄마는 죽을 수가 없었다. 언감생심 아빠를 죽일 생각은 아예 하지조차 못했다. 그래도 엄마의 하나밖에 없는 아이, 그 아이의 아버지였다.
엄마는 아이를 두고 도망칠 수도, 죽을 수도, 남편을 죽일 수도 없었다. 경제력이 없었기에 혼자 아이와 함께 살아갈 자신도 없었다. 친정으로 돌아가 다시 농사일을 지으며 살아볼까도 생각했지만 손가락질할 아버지와 친척들, 동네 사람들이 무서웠다.

엄마는 아빠의 결핍이 자신을 집어삼켜버렸다는 걸 깨달았지만, 이미 때는 늦어버린 뒤였다. 엄마는 온전히 뿌리 내리기를 원했지만, 아빠는 애당초 뿌리란 게 없는 사람이었다.

아빠는 뿌리 대신 두려움을 가지고 태어났다. 언제나 불안이 아빠를 잠식해 집안 분위기는 금이 간 휴대폰 액정처럼 위태로웠다. 숨만 쉰 채 두고 보더라도 언젠가 액정은 깨지고 엄마는 그렇게 아빠에게 얻어터질 것이었다. 뿌리 없는 자의 불안이 잉태한 것은 결국 폭력이었기 때문이다.

엄마의 우울은 커져갔고 원을 그리듯 퍼져갔다. 엄마는 지옥 같은 삶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면 칠수록 자신은 삶의 진창 한가운데로 더 깊이 빠져버린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엄마에겐 답이 없었고 답이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계속 생을 이어가야 한다는 게 길고 무거운 사슬처럼 느껴졌다. 엄마는 삶을 살아가고 싶었지만 자신의 삶은 오로지 생존 그 자체로 점철돼 있을 뿐임을, 어느 새벽 짙은 푸름 속에서 깨닫고야 말았다.
독처럼 자라나는 우울 속에서도 엄마는 끊임없이 살아냈다. 별 같은 엄마의 아이가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삶이라는 무서운 경기에 내던져진 엄마는 자신의 아이 또한 이 불안의 링에서 살게 해야 한다는 게 죄스러웠지만, 꼬물꼬물한 아이의 손을 잡을 때마다 이 아이만이 엄마의 유일한 구원이라는 걸, 그래서 아이의 손을 놓으면 안 된다는 걸, 아니, 자신은 이 아이의 작은 손을 놓을 수 없다는 걸, 아이의 손을 잡고 있으면 아주 어쩌면 팽팽 도는 이 세상의 팽이를 멈출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최 여사! 밤이 어두워도 다음 날에는 늘 아름다운 해가 뜨는 거 알죠?" 라고 말해주던 아이의 희망찬 입술을 믿었기에 자신이 살면서 유일하게 잘한 일은 이 아이를 세상에 내어놓은 것이고, 자신이 살면서 저지른 가장 최악의 일도 이 아이를 세상에 내어 보인 것이라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할 수만 있다면 이 여자, 그러니까 우리 엄마의 자궁으로 다시 돌아가 마치 영화 <나비효과>의 감독판 엔딩처럼 다시는 세상 밖으로 나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때때로 나 하나만을 믿고 누군가는 때리고 누군가는 얻어맞는 세상을 살아가는 엄마의 믿음과 희망을 짓밟아버리고 싶기도 했다. 그럼에도 내게 역시 엄마가 구원이었기에, 언젠가 내가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고 그래서 사람들이 다 나를 욕하고 발로 걷어찰 때에도 엄마만은 내 피난처가 되어줄 것을 믿었으므로.

어떤 한 사람에게는 다른 한 사람의 손이, 그 손이 아무리 작고 거칠더라도 어두운 숲속 가시덤불을 잘라낼 수 있는 칼이 된다는 것을 알았기에, 잃어버린 그녀의 이름을 불러주기로 했다. 정절이고 얌전함이고 다 벗어버리고 애초의 곧고 맑음 그대로인 이름, ‘정숙’을….
답이 없는 삶이 답인 생을 살아가고 있는,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 역시 누군가의 손을 잡아주고 이름을 불러주길 바라면서.

"정숙 씨!"
내가 부르면 엄마는 잘 들리지 않으면서도 들리는 척을 하며 희미하게 웃는다. 그 웃음이 엄마의 이름을 계속 부르게 했다. 엄마의 이야기를 쓰게 했다.


"정숙 씨, 정숙 씨, 정숙 씨…."
세상에서 가장 곧고 맑은 사람, 이 세상에 꼭 한 명쯤 있어야 할 사람, 정숙 씨가 웃는다.
언 땅 위에서 꽃이 피어나듯, 아프게.

죽음은 늘 삶을 돌아보게 한다. 생의 우울과 폭력, 나이 듦과 병듦, 장애와 학대, 냉대와 모멸, 지척에 있는 죽음과 그 죽음으로부터 해방되지 못하는 남겨진 이들의 삶, 그리고 누군가의 딸이자 누이이자 아내이자 엄마이자 여성이지만 그 모든 것을 떠나 존재 그 자체인, 우리 곁의 가장 소중한 누군가를….

글을 쓰는 동안 많은 이들의 위로와 격려를 받았다. 그중 한 분은 엄마가 남겨놓은 사랑이 있으니 곁에 없어도 늘 함께하는 거라는 이야길 해 주셨다. 나와 동생의 엄마였고, 아빠의 아내였고, 이모들과 외삼촌들의 누이였고,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의 막내딸이었던 최 여사, 정숙 씨.
엄마는 죽었지만 영원히 살 것이다.

이제 이 책을 읽는 여러분이 당신들의 엄마에 대해 기록할 차례다.

나의 엄마는 떠났다. 늘 가구처럼 내 곁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엄마의 죽음은 충분히 절망스럽고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생텍쥐페리의 표현대로라면 두 번째로 탯줄이 끊어진 셈이었다. 두 번째로 매듭이 풀어진 것이다. 한 세대와 다음 세대를 잇는 매듭 말이다.

엄마가 없는 나는 모든 것을 새로 배워야 했다. 그건 정말이지 어려운 일이었다. 엄마 없이 사는 법을 배우는 건 온 세계를 다시 배우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돌아보면 세상 누구보다 엄마를 사랑하고 자상하게 보살핀다고 생각했지만 그 기저에 깔려 있던 건 애거사 크리스티의 말마따나 ‘다정한 무심함’이었던 것 같다. 나는 딱 적당한 온기로 엄마를 대했던 것이다.

부끄럽게도 엄마가 돌아가시자 슬픔과 함께 해방감도 밀려왔다. 나는 엄마에게 의존하고 있었지만 엄마도 내게 의존하고 있다고 여겼고, 어느 순간부터는 엄마와 ‘긴 병에 효자 없다’며 간병살인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엄마와 나, 우리 가족은 죽음도, 삶도 모두 두려웠다. 그러나 엄마에게 있어 아픈 몸으로 사는 것은 살아도 사는 게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게 엄마가 돌아가신 뒤, 겉으로는 멀쩡하게 웃으며 아무 일 없다는 듯 일상을 살았지만 그 누구에게도 제대로 아픔을 표현할 수 없었던 나의 속은 곪고 있었다.
죽은 시간의 더께가 머리 위에 쌓이고 자책의 무게가 어깨 위에 얹어졌다. 그래서일까? 꿈을 꾸었다. 꿈속에선 엄마를 만날 수 있었고, 엄마가 있던 꿈에서 헤어 나오면 다시 현실을 살아갈 힘을 얻곤 했다. 현실과 꿈의 경계에서 외줄 타기를 하는 삶이었지만 그래도 꿈이 있어 매일의 하루를 제정신으로 여밀 수 있었다.

존재 자체가 삶과 죽음이었던 엄마. 엄마는 나에게 삶만 준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바로 서는 법, 씩씩하게 걷는 법, 편히 눕는 법을 나에게 알려 주었다. 피를 돌게 하고 살을 찌우는 음식들을 만들어 먹였고, 사랑스러운 말을, 깊이 있는 지식을 가르쳐 내면을 풍성하게 만들어 주었다. 엄마는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나를 환영해준 손길이었다.

엄마의 커다란 따뜻함과 다정함은 32년 동안 나의 세계를 촘촘히 채워주었다. 무엇보다 엄마는 여성으로서 세상에 지배당하지 않고 늘 당당한 나 자신으로 살길 당부했다. 그 말에 힘입어 나는 온전한 나 자신으로 살아왔다고 자부하는데, 실은 그 빛나는 32년이 엄마의 희생에 빚지고 있었음을, 엄마가 돌아가신 뒤에야 아프게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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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이름은 정숙이다. 곧을 정(貞)에 맑을 숙(淑)자를 써 ‘정숙(貞淑)’.

살아가며 알게 된 ‘정숙’이라는 이름에는 ‘곧고 맑다’는 뜻 외에 다른 의미가 있었다. ‘정(貞)’이라는 한자에는 ‘곧다’는 뜻 외에도 비슷하게 ‘충실하고 올바르다, 정절’이라는 뜻이 있었다. ‘숙(淑)’이라는 한자에는 ‘맑다’는 뜻 외에도 ‘어질다, 얌전하다’는 뜻이 있었다.
고운 이름이었지만, 거기에는 정조 있고 얌전해야 한다는, 사회가 여성에게 강요하는 덕목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정숙 씨’라고 부르는 대신 늘 ‘최 여사’라고 불렀다.


최 여사, 그리고 정숙 씨. 그녀는 나의 엄마였다.

사랑을 하기에 엄마의 삶엔 구멍이 너무나도 많았다. 여기저기 해진 삶을 기우느라 엄마는 누군가의 입김만 닿아도 아팠고 두려웠다. 엄마가 생활에 익숙해져갈수록 엄마의 욕망은 시들었고, 종당에는 바짝 말라 "파락" 하고 잎이 떨어졌다.
무언가를 뜨겁게 원하기엔 엄마 앞에 놓인 굴곡이 너무 깊었다. 그리고 엄마는 절망을 우아하게 다루는 방법을 몰랐다. 절망은 절망 그 자체로 엄마에게 절망적이었기에….
대신 엄마는 무서움을 알았다. 엄마는 무서움 속에서 태어났다.

설상가상으로 엄마는 한쪽 귀가 들리지 않았다. 이모들 말로는 엄마가 어릴 때 심한 열병을 앓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시골 마을이라 의사가 귀했고 그나마 하나 있던 의사는 단순 감기로 보고 약을 잘못 처방했다. 그 약을 먹은 세 살 때부터 엄마는 반쯤 고요한 세계 속에 뿌리를 내렸다. 한쪽이 들리지 않는 세계는 한쪽만 물에 잠긴 식물처럼 부어올랐다. 그 세계는 고요해서 안온하지도, 소음이 사라져 평화롭지도 않았다.


웅웅거리는 낯선 소리들 사이에서 엄마는 홀로 무서움에 떨었다. 세계는 오직, 무서움뿐이었다.

엄마에게는 자신의 이름이 늘 저 멀리에서 들려왔다. 한 번에 알아듣는 경우가 드물어서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고 있는 게 맞는지를 확인해야 했다. 그렇게 엄마가 말귀를 못 알아들으면 이내 ‘못난이’라는 별명이 따라붙었다.

이후 엄마는 돌아가실 때까지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예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어릴 때부터 잘 듣지 못해 사람들과 섞이기 어려웠고, 늘 ‘못난이’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던 엄마는 스스로를 못났다 여기며 50여 년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외할아버지는 엄마가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하면 불같이 화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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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촌은 뾰족한 수가 없는 것 같다고 했다. 나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엄마의 집안에 뿌리를 깊게 내린 우울의 근원이 무엇일지, 나는 짐작도 할 수 없었다. 다들 마음속에 아무도 들여다볼 수 없는 우물을 가지고 있는 듯 보이지만 나는 쉽사리 그들에게 말을 건넬 수 없다.

삼촌은 엄마가 가시기 전 마지막으로 나누었던 대화를 기억한다고 했다. 바보처럼 착하기만 했던 누나에게 모진 말로 상처를 주었다고 했다. 그게 왜 마지막 대화가 돼야 했던 건지, 모든 것은 삼촌의 탓이라고 했다. 그런 삼촌의 전화를 내가 따뜻하게 받아주는 게 참으로 고맙다고 했다.

‘엄마의 가슴엔 어떤 상처가 새겨졌던 걸까?’
나는 혼란스러웠다. 나는 엄마에 대해 얼마큼 알고 있었던 걸까? 내가 모르는 부분은 어디까지일까? 큰외삼촌에게선 계속 전화가 걸려왔지만, 나는 삼촌의 전화를 차마 받을 수가 없었다. 혹시 엄마가 삼촌의 잘못을 요목조목 짚는 나의 모습을 바랐던 건 아니었을지 두려웠다.

엄마처럼 품이 너르지 못한 나는 살아생전 엄마를 괴롭혔던 삼촌이 밉다. 애도의 방법은 각자 다양하겠지만, 애도는 삶의 한 방식으로서 드러난다.

큰외삼촌은 오늘도 엄마를 떠올리며 긴긴 불면의 밤을 후회와 자책과 눈물로 지새울까? 나는 잘 모르겠다. 아직 마음의 키가 다 자라지 못한 내겐 그저 엄마가 필요할 뿐.

분명한 것은 누구나 겪는 사건이더라도 우리 기억 속의 그 사건은 세상 그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온전한 자신만의 일로 새겨진다는 것이다.
누구나 언젠가 어머니의 죽음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그 죽음이라는 사건은 저마다의 기억 속에서 오롯이 자신만의 일로 새겨질 것이다.

‘엄마의 죽음이 처음이었기에’라는 말로는 끝내 이야기할 수 없는 당황과 혼란과 슬픔이 내 안에 뭉쳐 있었기에 나는 결국 우물우물 하고 싶은 말을 내뱉다 씹어 삼키고 말았다.

그렇게 애쓰지 않는 태도 때문인지 오히려 바라는 것, 원하는 것은 모두 성취하고 가지며 살아왔다. 어쩌면 절실히 원했던 큰 꿈이 없었기에 다 이루며 살아온 건지도 모른다.
그런 내가 샅샅이 나의 역사를 훑었을 때, 간절히 원했던 게 하나 있다. 돌아가시기 직전의 엄마가 일어나시길 간절히 빌었던 것. 돌아가시기 직전의 몸 곳곳에 보라색 울혈(鬱血)이 맺혔던 엄마의 몸을 잊지 못한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선 꿈에서라도 제발 엄마를 만날 수 있길 역시 간절히 빌었다.

우리 엄마는 살지 못했다. 오래 아팠고 고통받았던 엄마가 그곳에선 더 이상 아프지 않길, 우리와 떨어진 슬픔에 외롭지 않길 바랄 뿐이다. 다만 꿈에서는 난 늘 엄마와 함께다. 엄마가 살아 계셨을 때보다 더 자주 꿈에서 뵙는 듯하다. 심지어는 엄마가 꿈에 등장하지 않아도 꿈을 꾸는 나의 가슴엔 엄마가 늘 함께하는 기분이다. 엄마와 내가 손을 붙잡고 서서 같이 내 꿈을 들여다보는 느낌이다.
내게 가장 소중한 엄마. 가슴속에 오랫동안 남은 ‘엄마’라는 기억과 추억….

그녀의 자살 시도를 보면서 어쩌면 엄마가 진정한 자유를 원한 건 아닐까 싶었다. 병으로부터, 가족으로부터, 세상으로부터의 자유 말이다. ‘자살’이라는 선택은 삶의 한가운데서 삶의 주인이 되는 방법일 수 있으며 고통까지 기꺼이 사랑할 줄 아는 삶에 대한 완벽한 집중으로서의 방법일 수 있다는 걸, 린저의 소설을 통해 알게 됐다.

고통과 격정에 헌신하지 못하는 사람은 죽을 수도 없다. 죽는다는 것은 마지막 헌신이기 때문이다. 돌아가시기 직전 엄마는 안락사를 원한다고 수없이 말할 정도로 아픈 몸의 고통을 처절히 감내하고 계셨다.

그렇다면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삶을 비켜간, 한 번도 모험을 하지 않은 그래서 아무것도 얻지도 못했고 잃지도 않은 내가 어떻게 엄마와 니나를 이해할 수 있을까?

니나는 생을 너무나 사랑하고 꽉 껴안은 사람만이 스스로의 죽음을 선택한다고 말했다. 생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노여워하지도 못한다. 가만히 있기보다는 차라리 모험을 택해 전부를 기꺼이 잃으려고 하는 자가 진정으로 생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어쩌면 우리 엄마는 너무 최선을 다했기에 쓰러진 건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엄마가 죽은 도시에서, 끊임없이 뭇 생명들이 꺼지고 켜지는 이 세계에서 이런 글을 쓰지 않고서는 배겨내지 못하는 것이다.

지금껏 나는 다시 생이 주어지는 걸 거부하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해오곤 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엄마의 딸로 태어나 엄마와 함께할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다시 태어나는 쪽을 택하고 싶다.
영원히 우리 엄마의 딸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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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번도 나의 존재 가치를 대단하게 여겨본 적이 없었다. 감히 이 세상에 태어났기에, 삶을 스스로 선택한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감히 이곳에 던져졌기에 묵묵히 그 삶을 감내할 뿐이었다.
그건 삶이 내게 준 형벌이었고 나는 온몸으로 그 형벌을 짊어져야만 했다. 내가 결정할 수 없었던 그 일에 대해 원망해본 적도 없었다. 그건 온전히 나의 몫이어야만 했다. 원망하면 할수록 더더욱 형벌의 무게에 짓눌릴 것 같았다.

터널을 지날 땐 숨을 참았다. 언젠가 어릴 적에 터널을 다 지날 때까지 숨을 참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숨을 참고 눈을 감고 터널이 끝나길 기다리며 하염없이 소원을 되뇌었다. 언젠가는 이 터널이 끝날 것을, 끝나고야 말 것을 나는 알았다.

바닥을 치는 자의 기분은 바닥을 치는 자만이 알 수 있다. 그가 아니고선 영영 알 수 없고 누구 하나 알려고 들지도 않을 것이다.
끝없는 밤의 바닥을 밟아 보았다. 그곳은 생각보다 단단했다.

가련한 여인. 엄마의 삶이 너무나도 안타까워서 나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때 밤의 택시에서 잘 아는 노래 한 곡이 흘러나왔다. 노래는 스피커에서 흘러나와 투명하게 몸을 감쌌고, 그러자 심장에 자리 잡은 포도덩굴이 사납게 자라고 있음이 느껴졌다.

고통 속에서 나는 마치 물속에 잠겨 있는 아이와도 같았다. 고통 속에서 발버둥 치던 처음과 달리 시간이 시나브로 넘어가면서 고통 속을 유영하게 되었고, 이내 샴쌍둥이처럼 고통과 딱 붙어 있을 수 있게 되었다.
태초에 하나였던 것 같은 느낌이 계속되면서 그것은 오히려 분리가 더 어렵게 변해버렸다. 언젠가 내가 사그라들 때 고통 또한 나와 함께 사라져가고 그렇게 나와 함께 묻힐 것을 나는 알았다.

눈을 뜨고 있으면서 자는 척을 하고, 살아 있는 척하면서 죽어 있는 날들 속에서 나는 뛰다가 걷고 걷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끝이 없는 굴속으로 하염없이 걸어 들어갈 때에 나는 어린 날의 내 모습을 보았다.
풀리지 않는 수학 문제를 앞에 둔 채 귀를 막고 끙끙대다가 고막을 찢을 듯한 "와장창" 소리에 놀라 뒤돌아봤을 때 발등이 찢어져 피가 흐르는 채로 엄마를 노려보던 아빠의 붉은 눈, 부러진 코를 감싸며 쓰러지면서 "도망가"라고 외치던 엄마의 까만 동공, 그저 동생의 손을 잡고 현관문을 넘어 달리던 그 어느 날. 유난히도 내가 무서워하던 주인집 할머니의 불도그가 앞길을 막아섰을 땐 차라리 어둠의 진창으로 곤두박질치고 싶던, 하릴없이 동생의 손만 꽉 그러쥐었던 내 모습.

수학은 깨끗이 포기하면 그만이지만 세상이란 곳은 그렇지 않다는 걸. 이 세상이란 곳은 수학보다도 더 어려운 곳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던 그날의 기억과 기어코, 마주해야 했다.

나는 두려웠다. 엄마처럼 살게 될까 봐 무서웠다. 때때로 그런 삶을 생각하면 숨이 막혔다.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듯했다. 엄마처럼 살기 싫었고, 아빠 같은 남자는 만나고 싶지 않았다.
언제부터였는지 나는 아빠 같은 남자는 절대 만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힘들어 하는 모습을 옆에서 오랫동안 지켜봐 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엄마!"
부르다 보면 눈물이 날 것 같은 단어. 약을 찾는 엄마의 엉금엉금한 무릎걸음이 떠올랐다. 어떤 병에 걸리면 낫기 위해 그 병에 해당하는 30알 분의 삶을 삼켜야 한다. 삼켜내야 한다. 그마저도 하나의 병의 무게다. 병들의 무게는 엄청나서 엄마는 도저히 다시 설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지나간 삶의 스산함은, 늘 가장 최악인 것처럼 보였던 그 순간이 지나고 나면 지금보다 낫다는 것이다. 매일 최악의 순간을 감내하지만 지나고 나면 최고의 순간들. 역설의 무게에 질식할 것 같은 순간. 그 순간에 꾸던 꿈속에서 쌀은 눈처럼 떨어졌다. 누런 쌀을 걷어내니 흰쌀들이 나왔다.
어떤 날은 잠에 들자마자 깨어났고, 밤이 되자마자 아침이 됐고, 집에 오자마자 출근을 했다. 빛이 아롱지며 손톱 위에 떨어졌다.

엄마가 돌아가신 뒤부터 나는 눈을 내리깔고 걷는 버릇이 생겼다. 기온이 한없이 낮춰져 있었다. 봄이지만 겨울 같은 날씨가 계속되고 있었다. 나는 늘 오한이 든 것처럼 몸이 떨렸다.

여기까지 오는 데 굉장히 오래 걸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의 생(生)만으로도 버거운데 네 사람의 생이 휘청였다. 각자의 생과 생이 손을 잡을 수 있을까? 아직은 서로 용서해야 할 일이 너무나도 많은데…. 이해하기도 쉽지 않지만 이해가 정답이 될 수도 없을 텐데….
손을 잡는다면, 그 생은 조금이라도 단단해질 수 있을까?

6년이 지나 나는 여전히 걷고 있다. 아빠와 엄마와 동생의 손을 잡고 걷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엄마는 연기처럼 사라졌고, 부유하는 공기 속에서 다만 엄마를 느낄 뿐이다. 그래도, 걸어야 할까? 걸어야 한다. 걸을 수밖에 없다. 아직은 걷는 것 외에 무얼 할 수 있을지 알지 못하므로….


여전히 나는 걷고 있다.

병으로 죽은 엄마의 상실 앞에서도 남겨진 가족들은 무너질 수밖에 없는데, 하다못해 자살 유가족들은 어떨까? 자살 유가족들은 우울증에 빠지기 쉽다. 특히 다른 사람의 죽음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남’들 때문에 더욱 그렇다.
자살 유가족들은 항상 손가락질에 시달려야 한다. ‘가족이 도대체 어떻게 했기에 또 다른 가족 구성원이 자살을 했을까?’ ‘그 죽음에 남겨진 가족들은 책임이 없을까?’ 등, 자살 유가족들은 그러한 손가락질 속에서 죄책감을 내면화한다. ‘나 때문일지도 몰라’에서 ‘나 때문이야’로 번지는 건 순식간이다.

우리 가족 역시 아직도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엄마는 왜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을까? 우리에겐 책임이 없을까? 우리가 뭘 잘못했을까? 단 한 번이라도 엄마가 이해받고 있다고 느낀 적이 있었을까?

남겨진 가족들은 오늘도 엄마와의 과거를 뒤져본다. 그 과거는 때로 애틋하고, 때로 따뜻하다. 그럼에도 회상을 멈출 수 없는 건 그렇게 하는 것이 엄마를 추억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모성에 대한 우리 모두의 부채감은 끊임없이 엄마를 반추하게 한다.

한 죽음은 지속적으로 삶을 환기시킨다. 많이 고통스럽더라도 엄마를 그리는 일을 멈출 수 없는 이유다.

상실 이후의 삶보다 더 중요한 건 삶 그 자체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가는가일 테다. 엄마를 잃고 내가 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아빠는 매일 엄마 생각을 한다. 어떤 이는 생각하면 가슴 아프니 이제 그만 생각하라 한다. 엄마의 사진도 더 이상 보지 말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엄마를 기억하고 싶다. 우리가 아플 걸 생각해 엄마를 기억하는 걸 그만두고 싶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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