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3.학문•철학/양명학

명나라 당시 왕양명에 의해 주창된 사상으로, 유학의 한 계보이면서 성리학을 비판하며 등장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양명학에 대한 배척 기운이 높았고, 영조 때 정제두 정도가 수용했을 뿐이다. 정제두는 강화도에 유배된 기간 동안 양명학에 대한 이해를 심화했고, 이를 일가친척에게 전파하여 가학(家學) 형태로 발전한다. 구한말 박은식 등이 양명학을 계승했다.

이후 왕양명은 성리학의 주지주의적인 기풍을 비판하면서 심즉리와 지행합일설 등을 주장한다. 마음이 곧 이치이며, 마음의 뜻을 실천해야 한다는 간명한 논리를 제안한 것이다. 성리학은 우주의 본질, 인간의 본질 그리고 인간 안의 도덕과 마음의 관계 등 복잡한 사변적 논리를 강화시켜나갔는데, 왕양명이 보기에 이런 것들은 잘못된 태도였다. 그가 보기에 마음은 언제나 진리로 나아갈 단초를 제공하고 사람들이 이를 따르지 않을 뿐이었다. 누군가 사고를 당하면 도와주고 싶은 마음을 가지게 되고, 누군가 어려움을 겪으면 함께 슬퍼하고 애통하는 것이 모든 인간에게 있는 기본적인 심성이다. 따라서 왕양명은 그러한 마음의 이치에 따라 직접 행동에 옮기는 삶을 군자의 삶으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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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2.문화/편두

아이가 태어나면 곧 돌로 그 머리를 눌러서 납작하게 만들려고 하므로 지금 진한 사람의 머리는 모두 납작하다. 왜(倭)와 가까운 지역이므로 남녀가 문신을 하기도 한다.

중국의 역사서 <삼국지> <위서> 오환선비동이전의 기록이다. 진한과 변한 지역에서 편두 문화가 있었다는 기록으로 고고학적 연구 결과와 일치한다. 예안리 85호, 99호분에서 출토된 두개골이 편두 모양이기 때문이다.
편두 풍속은 삼한에서만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신체 특정 부분의 모양을 조절하는 문화는 원시사회의 특징이기도 한데 편두 문화는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등 다양한 지역에서 보고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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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1.유적•유물/약탈 문화재

거의 대부분의 묘가 온전한 모양새를 가지지 않은 참상을 보여주었다.
- 우메하라 스에지

왕릉군 근처에 가면 무수한 묘영이 파헤쳐져 모든 산과 언덕이 벌집처럼 구멍이나 있다.
- 다나카 만소

21세기 초반 강화도와 개성 일대를 돌아본 일본인 고고학자들의 기록이다. 조선침발의 역사는 조선 문화재 수탈과 궤를 같이한다.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이 외규장각 도서를 약탈한 것으로 시작해 열강의 침탈이 가속화되면서 무차별적인 도굴과 약탈이 벌어진다. 특히 일본인들에 의한 문화재 약탈이 심각했는데 조선이 병합되면서 이 경향은 가속화된다. 조선에 파견된 일본인 관료나 총독부의 정책을 통한 합법적인 수탈부터 수집가들의 후원을 받아 한몫 챙기려는 도굴까지 그 수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이토 히로부미가 고려자기를 좋아해서 닥치는 대로 사들였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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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0.장소/남영동 대공분실

경찰청 산하 대공 수사 기관. 1976년 5층규모로 만들었다가 1983년 7층 규모로 증축돼 현재의 모습이 됐다. ‘해양연구소‘라는 위장 기관으로 운영됐고 국가 안보를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수많은 시민과 대학생을 빨갱이로 몰고 고문과 가혹 행위를 벌인 독재 정권의 하부 기관이자 인권 유린 장소였다.

남영동 대공분실은 김수근에 의해 설계됐다. 그러나 보통 김수근의 건축을 이얘기할 때 남영동 대공분실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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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9.인물/윤봉길

윤봉길(1908년~1932년)은 홍커우 공원 투탄 의거를 성공시킨 독립운동가로, 윤봉길의 의거는 당시 중국의 지배자 장제스를 크게 감동시킨다. 이후 장제스가 임시정부를 지원하고 광복군을 결성하는 등 임시정부는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한다.

윤봉길 의거의 성과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1931년 말부터 김구가 이끄는 한인애국단은 일본의 점령 지역에서 광범위한 의열 활동을 전개한다.
1931년 10월에는 난징에서 만주철도회사(일본이 만주국을 세운 후 일대를 경영하기 위해만든 회사)의 총재를 처단하려 했다. 1932년 1월에는 이봉창 의거가 있었고, 2월에는 상해 일본 조계지를 관할하는 이즈모호를 폭파하고자 했고, 3월에는 윤봉길과 여러 지사들이 상해 비행장 폭파를 시도했다. 같은 달 이덕주, 유진식 등은 국내로 잠입해 조선총독 처단을 시도했다. 그리고 4월에 윤봉길 의거가 성공했고, 5월에 최흥식, 유상근 등은 만주에 잠입해 관동청 폭파를 시도했다. 알려진 것이 이 정도로, 이 밖에 각종 거사가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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