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과 만나는 첫 글을 어떻게 시작할지 고민하다가 이렇게 질문해본다. 우리는 왜 책을 읽을까? 지금 왜 의자에 앉아 이 책을 펼치고 있을까? 더 나아가 아침에 왜 출근을 할까? 왜 출근을 하고, 직장 상사에게 시달리며, 고객의 불평을 들어야 할까? 왜 시간을 들여 학원에 다니고, 자기계발을 하는 걸까? 돈은 또 왜 벌까? 좋은 신발과 좋은 가방을 사기 위해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색다른 곳으로 여행을 떠나기 위해서? 그렇다면 여행은 왜 할까? 이렇게 질문에 질문을 이어가다 보면 알게 된다. 정답은 행복하기 위해서다. 행복하기 위해 돈을 벌고, 행복하기 위해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 자기 성장과 자기 성취에서 오는 행복한 느낌을 위해 학원도 다니고, 책도 읽는다. 결국은 행복이다.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이 모든 것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마지막 질문이다. 우리는 왜 행복하려고 할까? 불행해서다. 그래서 행복을 삶의 최고 가치로 두고 그 행복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그런데 우리는 행복하지 않다. 우리는 괴롭다. 우리는 불행하다. 왜 그럴까? 답은 하나다. 우리가 행복을 추구하지 않고, 괴로움을 추구해서다. 거꾸로 이야기하면 우리는 즐거움을 추구하기에 행복할 수 없는 거다. 행복을 즐거움으로 착각해서, 그 즐거움을 추구하는 게 행복을 위한 삶이라고 교육받고 세뇌당했다. 그렇게 교육한 사회와 우리 부모들 역시 같은 방식으로 세뇌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즐거움의 추구는 행복의 추구가 아니다. 즐거움의 추구는 괴로움의 추구이고, 결국 불행한 삶을 위한 방식이다.

도파민은 상승했다가 감소하고 다시 정상화되는 과정을 반복한다. 우리 삶도 그렇다. 즐거운 도파민의 상승 시기가 지나면, 괴로운 도파민의 하강 시기가 찾아온다. 즐거움 뒤에는 반드시 괴로움이 있다. 즉 괴로움은 즐거움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즐거움은 괴로움을 등지고 있으며, 괴로움은 즐거움의 자궁에서 태어난다. 마치 손바닥과 손등처럼 즐거움과 괴로움은 하나로 붙어 있다. 그 둘은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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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내면이 긍정으로 채색되어 있다면, 나에게는 긍정의 관점이 생긴다. 그 긍정의 관점으로 우리는 세상을 바라본다. 그러면 현실을 긍정적으로 해석하게 된다. 빨간 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면 세상은 빨갛게 보인다. 긍정의 안경은 기분 좋은 산과 바다를 만들며, 시원한 푸른 하늘과 아련한 추억의 별을 만든다. 반대로 부정의 안경은 그 모든 것을 부정적인 것, 즉 두려움과 불안 혹은 분노로 물들인다. 산에 가도, 바다에 가도 괴롭고 우울하다. 하늘을 봐도, 별을 봐도 두렵고 불안하다. 내면의 관점이 세상을 그렇게 만들고 그렇게 생각하게 한다. 그러한 생각과 해석이 습관이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생각 패턴이자 행동 패턴이다. 즉, 자신의 매너다. 매너가 사람을 만들지만, 그 매너는 마음이 만드는 것이다.

기억하라. "Manners maketh man"은 <킹스맨>의 명언이지만, 우리 삶에 필요한 금언은 이것이다.

"Make men happ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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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은 어떤 측면에서는 오만한 것이기도 하다. 나는 죽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나와 내 가까운 이는 불행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그 배반으로 슬픔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내가 겪지 않아도 될 일을 겪었다고 생각하기에 슬프고, 화나고, 분노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나여서는 안 되는 것인가? 앞에서도 말했듯이 사고, 죽음, 고통은 우리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일이다.

부디 분노와 슬픔으로 시간을 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는 한 번 지나오면 결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길을 간다. 우리 삶은 리허설이 있는 연극 무대가 아니다. 시간을 되돌려 같은 길을 두 번 걸을 수도 없다. 죽은 자식을 그리워하다 정작 살아 있는 자식이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걸 방치하는 부모의 이야기를 많이 접해보지 않았나. 이 얼마나 부조리한 일인가.

지금 누구와 걷고 있는지, 누구와 마음을 나누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자. 곁에 있는 이에게 미소를 보내고 사랑한다는 말을 해주고 맛있는 음식을 나눠 먹는 일. 일상의 소중함을 함께 누리는 것, 그것이 인생이다. 이미 떠난 사람을 붙잡고 슬퍼하느라 지금 옆에 있는 사람을 지옥으로 몰아넣어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유한한 시간을, 더 늦기 전에 곁에 있는 이들과 함께 나누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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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 이렇게 살아 있기에 안전하다고 믿는다. 우리는 정당하고 완전하기 때문에 살아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누군가의 죽음은 바로 그 당사자에게 원인이 있을 거라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한다. 불의의 사고나 혹은 범죄로 누군가가 사망했다면 가장 먼저 그 사람의 부주의에서 원인을 찾으려 한다. 그가 부주의했기 때문에, 혹은 그 옆의 누군가가 부도덕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일 뿐, 완전하고 주의 깊은 우리는 안전하다고 믿는다. 그렇게 믿고 싶어 한다. 그래야 나는 안전하다는 착각 속에서 불안을 다스릴 수 있으니까.

그렇지만 우리는 사실 얼마나 위험에 가까이 있는지 알지 못한다. 죽음이 언제 어디서든 우리를 스칠 수 있다는 사실을 절대로 인지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한 사람의 생애의 마지막은 죽음이다. 우리가 누구와 누구의 혼인으로 출생되었다는 사실을 기록하듯이,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세상에 존재하게 되었는지를 앎으로써 인생을 이루어나가듯이, 죽음에도 앎의 완성이 필요하다.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죽게 되었는지 알아야 한다. 망자를 대신하여, 살아남은 우리가 죽음의 육하원칙을 완성해야 한다. 그것은 떠나간 사람을 위한 일이기도, 또 그들을 밀어낸 이 세상을 살아갈 우리를 위한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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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조상들의 생존에 더 중요했던 것은 ‘진실’과 ‘평판’ 중 과연 어느 쪽이었을까?

인간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이 책임감의 망(網)?안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이해하기 위해 테틀록은 아주 유용한 비유를 든다. 즉, 우리는직관적인 정치인처럼 행동하는데, 각양각색의 유권자를 앞에 두고 호소력 있는 도덕적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비지땀을 흘린다는 것이다.

우리는 일단 사고가 일어나면 그것을 확증하는 식으로 새로운 증거를 찾고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는 의미이다. 사람들은다른?이들이?내놓는 진술에는 잘도 이의를 제기하다가도,자신의?믿음이 도마에 오르면 태도가 달라진다. 그 믿음을 내 것(거의 내 자식)처럼 소중히 여겨 지키려고 하지, 괜히 이의를 제기해 그것을 포기해야 할 상황은 만들지 않는다.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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