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왜 우리가 시간의 연결성을 알아야 할까? 그러면 사는 게 편해지기 때문이다. 시간의 진실을 알 때, 지금의 힘든 과정을 즐길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어차피 잘될 것이라는 앎’이 생길 때, 지금의 노력은 미래를 위해 꼭 필요한 과정임을 깨닫게 된다.

생각은 해석을 전제한다. 그 해석을 통한 판단이 우리의 생각이고, 그 도구는 바로 ‘기준’이다. 우리에게 기준이 없다면 분별은 사라지고 생각은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 0과 1의 이진법으로 컴퓨터가 돌아가듯, 좋고 나쁨, 유리와 불리, 긍정과 부정, 옳고 그름에 대한 기준이 없다면 세상은 해석되지 않는다. 해석과 판단은 기준을 통해 이루어지고, 그 판단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 우리의 생각, ‘나’라는 자아다.
그래서 자아는 늘 기준을 필요로 한다. 기준이 없다면 생각은 유지될 수 없다.

텅 빈 마음의 색깔이 있다. 나는 그 색을 보며 자주 느낀다. 알아차림의 색은 늘 우리 앞에 있었다. 보고도 알지 못했던 그 색의 시간을 나는 자주 만난다. 그것이 노란색의 시간이다. 붉은색에 물들지도 않고, 푸른색에 취하지도 않는 노란색. 불행에 빠지지도 않고, 행복에 교만해지지 않는 알아차림의 색깔이다. 그 짧은 노랑의 시간을 보며, 나는 알아차림을 준비한다. 그러면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 짜증으로 가득 찰 내 머리를 텅 비워버리고, 그 공간 속에 감사를 맞이할 준비를 한다. 그것이 노랑의 시간이다. 신호가 변할 때, 우리에게 보내는 삶의 신호다.

마음이 현실을 바꾼다는 것은 단순히 정신승리를 위한 말이 아니다. 세상 만물의 모든 것을 연결하는 힘을 이야기한다. 그 공간을 우리 마음의 알아차림을 통해 변화시킬 수 있다. 세상을 바라보고 나를 바라보며 ‘내가 이런 상태에 있구나’라는 알아차림 속에 그것을 변화시키는 힘은 여기에 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은 세상을 지켜보고, 그것을 창조하며, 그 창조를 변화시킨다. 이 진리를 머리가 아닌 몸으로 경험하고, 몸으로의 경험이 마음에 각인될 때, 우리의 마음은 공간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게 된다. 그것이 알아차림의 본질이고, 그것이 알아차림의 힘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리다. 우리는 그런 존재다.

지금 여기가 천국임을 알고, 지금 여기에 천국과 연결된 모든 것이 있음을 알 때, 우리는 오늘을 즐길 수 있게 된다. 그 즐거운 시간 속에서 여러분은 알게 될 것이다. 지금(地金, 다듬어서 상품화하지 아니한 황금)이 있어야 황금이 있다. 지금이 즐거우면 미래도 천국이다. 천국을 위해 빠삐코를 희생할 때, 지금이라는 천국은 사라진다. 지금이 없으면 미래도 없다.

우리의 마음에는 늘 바람이 분다. 마음의 숲인 ‘이너 포레스트’에서 부는 바람이다. 그 마음의 바람이 우리의 생각이 되고, 감정이 되고, 느낌이 된다. 마음이 부정적으로 채색되면,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이 떠오른다. 그 감정을 느끼기 위해 우리는 세상을 부정적 관점으로 해석한다. 똑같은 상황을 누구는 조언으로, 누구는 잔소리로 느끼는 이유는 이 관점의 차이다. 세상은 관점이 투영된 것이다. 세상은 해석된 것이고, 판단된 것이며, 우리 마음이 그렇게 인식한 것일 뿐이다. 그래서 세상이 바뀔 때 내 관점이 바뀌는 것이 아니다. 내 관점이 세상을 그렇게 펼쳐내고 있다. 그 관점을 만드는 곳이 우리 마음의 숲이다. 그곳이 긍정으로 채색되고 감사로 물들 때, 우리는 따뜻한 바람 속에서 살아간다. 그 바람이 나의 바람이다. 우리 독자분들이 그런 앎을 통해서, 앎이 삶이 되는 현실을 경험했으면 한다. 우리의 앎, 우리의 밑바탕에 깔린 그 알아차림, 그 무의식이 우리의 감정과 세상을 만들고 있다. 그리고 그 감정이 그런 현실과 상황을 부르고 있다. 그래서 세상은 거꾸로다. 그가 나를 무시한 게 아니었다. 내가 무시하는 그를 만들었다.

종교는 개인의 선택이고 우리에겐 종교의 자유가 있다.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자유권이 종교다. 종교는 사실 진리를 깨닫는, 더 행복하기 살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도구에 빠져서 주인의 자리를 내주지 마라. 주객전도된 삶이 비교하며 사는 모습이다. 비교에 빠지지 말고, ‘내가 지금 비교하고 있구나’라는 깨달음을 ‘비교’를 통해 얻어야 한다. 그 알아차림의 대상이 비교일 뿐이다.

열심히 혹은 게으르게. 이제 그러지 말자. 열심히 대신 즐겁게, 게으르게 대신 충실히 오늘을 보내자. ‘개처럼 즐겁고 소처럼 충실한.’ 그것이 여행자의 삶이다.
‘개즐소충’하며 오늘을 살아갈 때, 우리는 처음의 느낌으로 ‘하루’를 여행할 수 있다. 그 즐거운 여행의 과정이 행복한 미래와 이어진다.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지만, 여행은 즐겁고 추억은 행복한 거다. 그 여행의 추억 속에서 오늘의 미소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 미소 속에 이미 행복한 미래는 이어져 있다. 과정이 좋으면 결과도 좋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삶의 가치가 있다. 그것이 바로 ‘풍요’와 ‘감사’다. 나는 나의 내면을 이 두 단어로 채우고 있다. 나의 관념을 이 위대한 단어로 채색하고 있다. 내 무의식을 풍요로 채우고, 내면의 숲을 감사로 물들이는 것, 그것이 내가 이 지구별 여행을 하는 시간이고, 이유이며, 내 삶의 의미와 가치다.
감사와 풍요의 말이 담긴 문장. 나는 오늘도 그 문장을 찾으며 일상을 적분해나간다. 그 문장이 모여 감사로 채워질 나의 영화를 기대한다. 그리고 풍요와 함께하는 삶이 곧 나에게 드러남을 알고 있다. 그렇게 나는 살아왔고, 지금도 살고 있다. 우리 삶은 그렇게 펼쳐지고 드러난다. 이 앎을 여러분도 알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시간이 즐거웠으면 한다. 그 시간이 수행이고, 마음공부이며, 알아차림의 과정이다. 그것이 살아가는 즐거움이다.

과정이 즐거워야 결과가 즐겁다. 오늘이 달콤해야 내일도 달콤하다. 즐거움을 모르면 미래의 행복도 알 수 없다. 과정이 즐거워야 결과가 즐겁다. 오늘이 행복해야 미래도 행복하다. 함부로 열심히 살지 말라는 이유다. ‘열심히’는 내일을 위해 오늘을 희생하는 모습이다. 열심히 여행하는 사람은 없다. ‘즐겁게’는 내일의 즐거움과 함께하는 오늘의 모습이다. 즐겁게 여행해야 추억이 남는 것이다. 그 추억은 일상으로 돌아온 내일의 원동력이 된다. 즐거운 인생의 좋은 재료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꿈꾸는 미래를 좋아하지만, 그 미래를 위한 ‘지금’은 거부한다. 지금 여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래서 늘 지금이 변하길 바라고, 내 현실이 바뀌길 원한다. 과정을 사랑하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오직 결과를 원한다. 현실은 지옥이고, 미래는 천국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알고 있는가? 지금이 천국이다. 미래는 없다.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오직 미래와 연결된 지금뿐이다. 상상이 펼쳐진, 내가 원하는 미래의 모습이 바로 지금이다.

그냥 선택하고,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며 살자. 다른 결정을 했어도 비슷한 정도의 과보를 받을 거다. 그러니 가볍게 선택하고, 그 선택을 긍정하며, 결과를 즐겁게 받아보자. 선택하고 셔터 내리라는 말이다. 다른 선택지는 찢어 버리고 나의 선택을 긍정하며 즐겁게 지내보자. 그것이 정답이다. 그것이 결정장애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얼마나 쉬운가. 그냥 결정하자. 아니면 주머니에서 동전이라도 찾아보자. 그것도 어려우면 첫 번째 떠오른 걸 선택하자. 우리 어릴 때 시험 많이 쳐봐서 알지 않는가? 처음 선택이 맞았다.

지금, 지치고 무력해진 당신에게 꼭 말해주고 싶다. 삶은 과정으로만 존재한다. 과거, 현재, 미래라는 건 없다. 지금밖에 존재하지 않기에 ‘지금을 얼마만큼 잘 보내는가’가 결국에는 삶의 모든 것이다.

번아웃은 ‘나약한 것’이 아니다. 번아웃은 나약한 나를 성장시키는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 그래서 번아웃은 ‘당연한 것’이다. 모든 사람이 겪지만, 그 방향성이 달라지는 것이 번아웃이다. 번아웃을 무기로 쓸지, 무력으로 쓸지는 여러분에게 달렸다. 그리고 한 가지만 기억하라. 제발 ‘힐링’을 찾지 말자. 이는 스스로를 환자로 만드는 일이다. 번아웃을 소진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자세다. 대신 이렇게 하자.
‘눈 감고 꿀잠 자자.’
번아웃의 모든 경험이 내 몸과 마음에 각인될 수 있도록.

번아웃은 소진이 아니다. 더 높은 발전을 위한 마찰력이라고 생각하자. 그 마찰의 생채기가 우리를 아프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성장이라는 선물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병과 약은 공존하기 때문이다. 소진의 순간이 곧 회복의 순간이며, 그 회복을 통해 더 강한 추진력을 얻는다. 훗날 지금의 과정을 되돌아보며 ‘내가 벌써 여기까지 왔구나’를 알게 되는 순간이 반드시 온다는 것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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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과 만나는 첫 글을 어떻게 시작할지 고민하다가 이렇게 질문해본다. 우리는 왜 책을 읽을까? 지금 왜 의자에 앉아 이 책을 펼치고 있을까? 더 나아가 아침에 왜 출근을 할까? 왜 출근을 하고, 직장 상사에게 시달리며, 고객의 불평을 들어야 할까? 왜 시간을 들여 학원에 다니고, 자기계발을 하는 걸까? 돈은 또 왜 벌까? 좋은 신발과 좋은 가방을 사기 위해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색다른 곳으로 여행을 떠나기 위해서? 그렇다면 여행은 왜 할까? 이렇게 질문에 질문을 이어가다 보면 알게 된다. 정답은 행복하기 위해서다. 행복하기 위해 돈을 벌고, 행복하기 위해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 자기 성장과 자기 성취에서 오는 행복한 느낌을 위해 학원도 다니고, 책도 읽는다. 결국은 행복이다.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이 모든 것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마지막 질문이다. 우리는 왜 행복하려고 할까? 불행해서다. 그래서 행복을 삶의 최고 가치로 두고 그 행복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그런데 우리는 행복하지 않다. 우리는 괴롭다. 우리는 불행하다. 왜 그럴까? 답은 하나다. 우리가 행복을 추구하지 않고, 괴로움을 추구해서다. 거꾸로 이야기하면 우리는 즐거움을 추구하기에 행복할 수 없는 거다. 행복을 즐거움으로 착각해서, 그 즐거움을 추구하는 게 행복을 위한 삶이라고 교육받고 세뇌당했다. 그렇게 교육한 사회와 우리 부모들 역시 같은 방식으로 세뇌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즐거움의 추구는 행복의 추구가 아니다. 즐거움의 추구는 괴로움의 추구이고, 결국 불행한 삶을 위한 방식이다.

도파민은 상승했다가 감소하고 다시 정상화되는 과정을 반복한다. 우리 삶도 그렇다. 즐거운 도파민의 상승 시기가 지나면, 괴로운 도파민의 하강 시기가 찾아온다. 즐거움 뒤에는 반드시 괴로움이 있다. 즉 괴로움은 즐거움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즐거움은 괴로움을 등지고 있으며, 괴로움은 즐거움의 자궁에서 태어난다. 마치 손바닥과 손등처럼 즐거움과 괴로움은 하나로 붙어 있다. 그 둘은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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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내면이 긍정으로 채색되어 있다면, 나에게는 긍정의 관점이 생긴다. 그 긍정의 관점으로 우리는 세상을 바라본다. 그러면 현실을 긍정적으로 해석하게 된다. 빨간 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면 세상은 빨갛게 보인다. 긍정의 안경은 기분 좋은 산과 바다를 만들며, 시원한 푸른 하늘과 아련한 추억의 별을 만든다. 반대로 부정의 안경은 그 모든 것을 부정적인 것, 즉 두려움과 불안 혹은 분노로 물들인다. 산에 가도, 바다에 가도 괴롭고 우울하다. 하늘을 봐도, 별을 봐도 두렵고 불안하다. 내면의 관점이 세상을 그렇게 만들고 그렇게 생각하게 한다. 그러한 생각과 해석이 습관이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생각 패턴이자 행동 패턴이다. 즉, 자신의 매너다. 매너가 사람을 만들지만, 그 매너는 마음이 만드는 것이다.

기억하라. "Manners maketh man"은 <킹스맨>의 명언이지만, 우리 삶에 필요한 금언은 이것이다.

"Make men happ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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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은 어떤 측면에서는 오만한 것이기도 하다. 나는 죽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나와 내 가까운 이는 불행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그 배반으로 슬픔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내가 겪지 않아도 될 일을 겪었다고 생각하기에 슬프고, 화나고, 분노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나여서는 안 되는 것인가? 앞에서도 말했듯이 사고, 죽음, 고통은 우리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일이다.

부디 분노와 슬픔으로 시간을 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는 한 번 지나오면 결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길을 간다. 우리 삶은 리허설이 있는 연극 무대가 아니다. 시간을 되돌려 같은 길을 두 번 걸을 수도 없다. 죽은 자식을 그리워하다 정작 살아 있는 자식이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걸 방치하는 부모의 이야기를 많이 접해보지 않았나. 이 얼마나 부조리한 일인가.

지금 누구와 걷고 있는지, 누구와 마음을 나누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자. 곁에 있는 이에게 미소를 보내고 사랑한다는 말을 해주고 맛있는 음식을 나눠 먹는 일. 일상의 소중함을 함께 누리는 것, 그것이 인생이다. 이미 떠난 사람을 붙잡고 슬퍼하느라 지금 옆에 있는 사람을 지옥으로 몰아넣어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유한한 시간을, 더 늦기 전에 곁에 있는 이들과 함께 나누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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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 이렇게 살아 있기에 안전하다고 믿는다. 우리는 정당하고 완전하기 때문에 살아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누군가의 죽음은 바로 그 당사자에게 원인이 있을 거라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한다. 불의의 사고나 혹은 범죄로 누군가가 사망했다면 가장 먼저 그 사람의 부주의에서 원인을 찾으려 한다. 그가 부주의했기 때문에, 혹은 그 옆의 누군가가 부도덕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일 뿐, 완전하고 주의 깊은 우리는 안전하다고 믿는다. 그렇게 믿고 싶어 한다. 그래야 나는 안전하다는 착각 속에서 불안을 다스릴 수 있으니까.

그렇지만 우리는 사실 얼마나 위험에 가까이 있는지 알지 못한다. 죽음이 언제 어디서든 우리를 스칠 수 있다는 사실을 절대로 인지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한 사람의 생애의 마지막은 죽음이다. 우리가 누구와 누구의 혼인으로 출생되었다는 사실을 기록하듯이,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세상에 존재하게 되었는지를 앎으로써 인생을 이루어나가듯이, 죽음에도 앎의 완성이 필요하다.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죽게 되었는지 알아야 한다. 망자를 대신하여, 살아남은 우리가 죽음의 육하원칙을 완성해야 한다. 그것은 떠나간 사람을 위한 일이기도, 또 그들을 밀어낸 이 세상을 살아갈 우리를 위한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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