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구에 집착이 더해지면 욕망이 된다. 식욕은 일종의 욕구다. 그 식욕에 더 좋은 것, 더 맛있는 것, 더 비싼 것의 집착이 붙으면 식욕은 욕망이 된다. 욕망의 전제는 비교다. 남들보다 더 좋은 것을, 더 많이, 더 자주 먹고픈 욕망이 우리의 식욕이 된다. 그 식욕은 식탐이 되어 나의 만족보다 더 많이, 더 자주, 더 오랫동안 먹는 과정을 밟는다. 그 시간 속에서 다이어트는 희망 고문이 된다. 식탐을 충족하고, 다이어트를 위해 먹은 것을 토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리고 그들은 허기진 배를 또다시 욕망과 탐욕으로 채우게 된다.

인생은 과정을 시간으로 적분하는 삶이다. 한 방의 성공 신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과정을 쌓아가는, 오늘을 조정하는 즐거움이 우리 추억으로 남는다. 그것이 삶인 거다. 우리 삶은 과정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과정을 즐거운 조정으로 채워 나갈 때, 어느 순간 여러분의 손에 빛나는 공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 공을 보며 웃고 있을 여러분을 발견할 것이다. 씨익 웃고 있을 당신의 미소를 기대한다.

우리 삶에서도 안개를 만날 때가 있다. 부정적 감정을 만날 때다. 분노, 화, 시기, 질투, 무시, 열등감, 고통, 괴로움 등이다. 이런 감정이 나타날 때, 우리의 선택은 두 가지다. 허용하거나, 억누르거나. 부정적 감정을 받아들이겠다는 것은 기꺼이 안개 구간을 지나겠다는 얘기다. 비상등을 켜고 두려움 속에 그 곳을 지나지만, 그 시간 속에서 안개는 사라진다. 허용하면 흘러간다. 안개가 사라지듯, 부정적 감정도 어느새 가라앉는다.

기도는 나와 내 무의식과의 연결이다. 그 연결 속에서 마음이 주는 현실을 허용하는 시간이다. 그 감사한 허용 속에서 오늘을 개즐소충하려는 나의 다짐이 기도다. 감사의 허용을 통해 내 마음이 감사로 물들고 있다. 그러면 나는 안다. ‘아 곧 감사와 함께 할 삶을 선물로 받겠구나.’
감사의 기도 속에서 우리는 성장하고, 그 시간 속에서 세상이 원하는 결과와 이어지게 된다. 그 세상이 나의 마음이며, 내 마음을 감사로 물들임이 바로 Pray다. ‘이거 해주세요, 저거 해주세요’라며 혼자 떠들며 노는 것은 Play다. 그러니 기복하며 혼자 놀지(play) 말고, 내 마음과 교감(pray)하며 감사하자. 그 감사의 시간이 기도의 축복이다.

명상하면 달라진다. 그 달라짐이 일상이 될 때, 삶은 이미 변해 있다. 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닌 두 사람으로 살기 때문이다. 그때 우리는 인간이 된다. 사람에서 인간으로의 전환은 이 명상을 통해서다. 인간은 사람 인(人), 사이 간(間) 이다. 사람의 사이가 인간이라는 말은 두 명의 사람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것이 한 명의 나와 또 다른 나를 의미한다. 두 명으로 사는 삶, 명상의 삶이다. 더 건강하게, 더 행복하게, 더 성공적으로 살아가는 나의 방식이다. 백짓장도 맞들면 낫듯이, 혼자 살 때보다 둘이 살 때가 외롭지도 않고 더 즐겁다. 세상을 보는 나와, 그 나를 바라보는 또 다른 나. 사람과 사띠(알아차림)의 동행이 명상을 통해 이루어진다. 다이어트의 성공을 넘어 건강하고 행복한 삶의 시작, 그것이 명상이다. 명상을 통한 알아차림, 그 시간 속에서 우리의 매일은 생일이 된다. 우리는 항상 새롭게 태어난다.
Happy Birthday to me.

우리는 생각을 쓰면서 살아야 한다. 생각은 도구다. 우리가 세상을 판단하고 해석하는 도구가 생각이다.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워지자. 생각은 ‘하는 것’이 아니라 ‘쓰는 것’이다. 알아차리는 것이지 하나가 되는 게 아니다. 우리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말에 세뇌되어 살아왔다. 그러나 ‘나는 사유한다, 고로 행복하다’가 맞는 말이다. 부정 중독에서 벗어난 삶은 여기에서 시작한다. 생각은 쓰는 것이다. 그때 우린 행복해진다.

우리에게는 세 가지의 생각이 있다. 첫 번째 생각은 잡생각(Thought)이다. 그냥 마음이 떠올린 생각이다.

두 번째 생각은 내 생각(Being a thought)이다. 떠오른 생각과 하나가 된 상태다.

세 번째 생각이 알아차림(Think a thought)이다. 떠오른 생각을 알아차리고, 그 생각을 사유하는 거다. 부정적 생각을 바라보고, 그 부정성을 허용할 수 있는 긍정적 사유는 이때 생긴다. 삶의 긍정성, 긍정적 사고는 알아차림에서 시작된다. 현실이 힘들고 괴로워도, 우리는 그렇게 살 이유가 없다. 세상은 나의 해석일 뿐이다. 부정적인 현실이 떠올라도, 그 생각을 긍정적으로 해석할 때 우리의 사유는 곧 나만의 관점이 된다. 그 관점은 세상을 긍정으로 판단하고, 그 판단이 전혀 다른 인생 영화를 만든다. 생각 없이 사는 것이 아니라 사유하며 살아야 한다. 멍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알아차리며 지내야 한다. 명상이 일상인 이유는 이 알아차림 속에서 매일을 살기 때문이다.

세상은 소모품이고 삶은 렌털이다. 모든 것은 내 것이 아니다. 잠시 나에게 머물렀다 가는 것이다. 그것이 가족이라도 마찬가지다. 가족은 나의 소유가 아니다. 하지만 내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부모와 가족은 늘 나의 가족이었다. ‘나의’라는 소유격이 그들을 나의 소유로 만들었다. 언어가 가진 마법이다. 우린 언어를 통해 세상에 인식되기 때문이다. 그 인식이 그런 세상을 펼쳐낸다.

모든 과정 속에는 ‘나’만이 가득하다. 그래서 ‘우리의 사랑’은 사실 ‘나의 사랑’이다. 이것은 남자든 여자든 남편이든 부인이든 똑같다. 그러니 꼭 기억하자. 헤어짐은 고마움 속에서 하는 거다. 그것은 만남의 시간 속에서 이기적 사랑을 한 내가 상대에게 전하는 마지막 고마움이다. 사실 이 고마움도 그 기저에는 나를 위한 것임을 알고 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인간은 그렇게 태어났고, 모든 인류는 마음의 밑바탕에 이기심을 깔고 있다. 부처님이나 예수님이 아닌 이상 우리는 늘 이기적 사랑과 나를 위한 이별을 한다. 그러니 마지막은 꼭 상대에 대한 감사로 끝맺자. 그것이 예의다.

G는 Gratitude, 감사함이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세상의 선물을 받고 자란다. 부모와 세상의 보호 속에서 먹고, 자고, 공부하고, 성장한다. 그 모든 것들은 나를 성인으로 만들기 위한 재료가 되고, 경험이 되고, 선물이 된다. 그 선물의 감사함 속에서 우리는 어린 시절을 보낸다. 그리고 일정 나이가 되면, 이제 그 선물을 다시 세상에 전해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늘 받기만 하던 미성년에서, 이제는 세상에게 선물을 되돌려주는 나눔과 베풂을 실천하는 거다. 그 기부와 봉사 속에서 더 큰 선물을 받게 된다. 그것이 감사와 함께 하는 삶이다.

어른이 되지 못한 ‘어른이(kidult)’는 그 ‘대상’의 삶을 스무 살이 넘어서도 하고 있는 거다. 그래서 SNS를 통해 나를 봐 달라고, 자신을 인정해 달라고, 나에게 관심을 달라고 하는 거다. 신체적으로는 성인이지만, 스스로의 존재로 살아가는 어른은 아니다. 어른이 아닌 어른이로 살아가는 대부분의 성인이다. 어른은 대상이 아니라, 주체로 살아간다. 칭찬받지 않고, 칭찬을 주고 있으며, 관심의 대상이 아닌 관심의 주체다. 사랑받기 위한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랑을 주는 사람이 어른이다. 그래서 어른은 기브(give)하고 있다.

어떤 선택이든 후회가 따라온다. 후회 없는 선택은 없다. 하지만 그 후회를 긍정할 수 있는 알아차림이 있으면 후회는 또 다른 경험이 된다. 혼자 살 때는 그 삶의 긍정과 부정이 있고, 결혼을 하면 결혼 전과 비교할 수 없는 행복과 불행이 있다. 그런데 우리는 늘 부정 없는 싱글을 원하고, 불행하지 않은 결혼 생활을 원한다. 혼자 살 때는 외로움이 없어야 하고, 같이 살 때는 괴로움이 없어야 한다. 그래서 싱글 생활은 힘들고, 결혼 생활도 두렵다. 삶의 부정성을 껴안으려는 책임감이 없기 때문이다.

나이는 중요한 게 아니다. 나이보다 에이지가 중요하다. 그 에이지를, 당신은 가지고 있는가? 성인이 되고, 가장이 되고, 중년이 되고, 노인이 되어도,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성인은 괴롭지만, 어른은 행복하다. 알아차림이 있어서다. 성인은 이기적이지만, 어른은 이타적이다. 이타를 통해 이타와 이기를 동시에 누리는 자리이타의 삶을 사는 거다. 그래서 그들은 감사 속에서 살아간다. 감사를 주고받으며, 그 경험 속에서 자신의 마음을 긍정적으로 채색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늘 웃고 있다. 알아차림과 감사, 그리고 또 다른 감사의 경험이 그들에게 미소를 선물한다. 세상의 선물 속에서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이다. 그것이 여러분이었으면 좋겠다. 성인이 아닌, 중년도, 장년도, 노인도 아닌 어른의 삶, 그것이 여러분이 되길 바란다.

세상 모든 것은 사라진다. 탄생했기에 소멸한다. 그래서 소멸은 탄생을 전제로 한다. 나타난 것은 무조건 사라진다. 그래서 만물은 생주이멸(生住異滅)한다. 나타나고, 잠시 머물렀다가, 변화하고, 사라진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인간도 세상 만물이다. 세상이 생주이멸할 때, 인간은 생로병사(生老病死)한다. 인간도 ‘사’를 통해 소멸한다. 그 소멸하는 인간에 대해 우리는 누구나 슬픔을 느낀다. 그 속에는 두려움도 함께한다. 그의 죽음은 나의 죽음을 예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의 죽음은 슬픔이지만 나에게 괴로움은 아니다. 그는 나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AGE의 A는 Awareness, 알아차림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스스로의 자각이 있어야 한다. 나를 바라보고, 나를 관찰하면서, 내가 어른의 자존감이 있는지, 내 마음이 상처받은 사춘기 아이로만 채워져 있지 않은지, 내가 어떤 생각과 말과 행위를 하는지에 대한 앎이 있어야 한다. 내가 나를 알 때, 우리는 스스로 변할 수 있다. 성인과 어른의 차이는 여기에 있다. 어른은 내가 어떤 사람인 줄 알지만, 성인은 그 앎이 부족하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존재를 남을 통해서 확인하려 한다. 스스로의 앎이 없기에 타인의 시선을 통해 자신을 세우려 한다. 그래서 그들은 남의 눈치를 봐야 하고, 자신의 생각이 아닌 세상의 상식 속에 스스로를 가두려 하는 것이다. 자기 존재의 감각, 자존감은 스스로에 대한 앎에서 시작된다. 그것이 어른의 기본이다.

마지막 E는 Experience, 경험이다. 우리의 삶은 기억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기억에 감정이 담길 때, 기억은 추억이 된다. 이 추억은 하나의 경험으로 우리의 마음에 각인된다. 그 각인된 씨앗이 내면의 숲이 되어 늘 나와 함께하고 있다. 인생의 좋은 경험, 나쁜 경험은 없다. 이런 경험, 저런 경험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 경험을 긍정하고, 그 기억에 긍정의 감정을 담아 우리의 마음에 심을 때, 나의 내면의 이너 포레스트엔 풍요와 감사의 바람이 불게 된다. 그 바람이 나의 생각이 되고, 나의 감정과 느낌이 되어, 내일의 삶도 따뜻해진다.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세 가지다. 적응, 허용, 기브다. 먼저 적응은 상대에 대한 존중에서 시작된다. 존중의 본질은 서로가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다. 내가 너와 다르기에 나와 너의 생각 또한 다를 수밖에 없다. 생각이 다르면 세상을 보는 관점도 달라지고, 그 관점에서 나오는 말과 행동 역시 달라진다. 이러한 다름을 인정하고, 상대를 존중할 때, 우리는 비로소 그 사람에게 적응할 수 있다. 적응은 ‘아 그렇구나, 나와 다르게 생각할 수 있구나’라는 알아차림이 있을 때, 시작된다.

40대까지는 나이가 정말 중요했다. 한두 살 차이에 형, 동생이 나뉘고, 술을 사고 밥을 사야 했다. 그 나이 차이 하나로 선배가 되고, 어쩔 수 없이 조언자가 되어야 하며, 때때로 인생 멘토 역할도 해야 했다. 존칭과 예의, 리액션의 정도까지도 나이에 따라 달라졌다. 한국 사회에서 나이라는 숫자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관계의 질서를 결정짓는 기준이다.

결혼은 적응하는 것이다. 그 적응 속에서 더 성장하고, 한층 성숙할 인생을 꿈꾸기도 한다. 그때 그런 선택을 한다면 나는 기꺼이 그 선택을 긍정하고 책임질 것이다. 다만 지금은 지금의 삶이 좋다. 싱글의 삶을 긍정하면, 이 속에서 느껴지는 즐거움과 행복도 많다. 그러니 선택하고 긍정하자. 그리고 그 긍정 속에서 다른 선택을 부러워하지 말자. 다른 선택도 후회를 포함한다. 그리고 알고 있는가? 선택한다는 것은 그것의 득과 실이 비슷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득이 실보다 크면 이미 했을 것이고, 실이 크다면 고민도 안 할 것이다. 그러니 선택에 고민 말고, 선택을 긍정하자. 결혼도, 싱글도 둘 다 당신의 선택이다. 싱글도 즐거운 것이고, 결혼도 행복한 것이다. 그러니 정답은 하나다. 선택하고, 긍정하고, 고민 말고, 행복하자.

나이를 먹다 보니, 나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성인이 된 이후로 더 중요한 것은 나이가 아니라 또 다른 의미의 ‘에이지(A.G.E)’다. A.G.E는 Awareness(알아차림), Gratitude(감사), Experience(경험)을 의미한다. 이 에이지가 있는 성인을 우리는 ‘어른’이라고 부른다.

내 마음이 긍정으로 채색되고 있음을 아는 앎(A)이 있고, 그 마음에 부는 감사의 바람이 나의 말과 행동(G)이 되어, 인생의 또 다른 감사의 경험(E)을 내 마음에 각인시킨다. 그것이 어른의 삶이다. 깨닫고, 감사하고, 세상과 나누는 것, 그것이 어른이다. 성인은 어른이 아니다. 어른은 대중 속에서 빛나고 있는 자존감의 빛이다.

두 번째가 허용이다. 상대가 나와 다르다는 것을 알면 이제 우리는 그를, 그녀를 받아들일 수 있다. 상대의 말을, 그의 행동을, 그녀의 생각을 허용한다는 것은 타인의 삶을 온전히 존중한다는 의미다. 그 허용이 바로 사랑이다. 사랑의 정의가 ‘완전한 허용’임을 안다면, 우리는 상대를 바꾸려 하지 않는다. 온전한 그 모습을 더욱 사랑하게 된다. 내가 원하는 모습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상대의 있는 그대로를 좋아하게 된다. 커피는 늘 아이스만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따뜻한 커피도 좋아할 수 있게 된다. 커피를 사랑하면 커피의 숨겨진 맛과 향도 경험하고픈 거다. 이상형에 집착하지 않고, 내 곁의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그 허용 속에서 많은 사랑과 관심을 주려고 할 때, 우리는 오랫동안 좋은 관계로 지낼 수 있다. 이것은 단순히 연인 관계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 부부 관계, 친구 관계 등 다양한 인간관계의 핵심이다. 적응, 허용, 기브의 자세를 지닌 채 상대를 바라보자. 윤활유 같은 접착제의 관계가 어느새 만들어진다. 그 속에서 우정도, 사랑도, 신뢰도 쌓여감을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이 관계의 시작이고 행복의 출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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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왜 우리가 시간의 연결성을 알아야 할까? 그러면 사는 게 편해지기 때문이다. 시간의 진실을 알 때, 지금의 힘든 과정을 즐길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어차피 잘될 것이라는 앎’이 생길 때, 지금의 노력은 미래를 위해 꼭 필요한 과정임을 깨닫게 된다.

생각은 해석을 전제한다. 그 해석을 통한 판단이 우리의 생각이고, 그 도구는 바로 ‘기준’이다. 우리에게 기준이 없다면 분별은 사라지고 생각은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 0과 1의 이진법으로 컴퓨터가 돌아가듯, 좋고 나쁨, 유리와 불리, 긍정과 부정, 옳고 그름에 대한 기준이 없다면 세상은 해석되지 않는다. 해석과 판단은 기준을 통해 이루어지고, 그 판단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 우리의 생각, ‘나’라는 자아다.
그래서 자아는 늘 기준을 필요로 한다. 기준이 없다면 생각은 유지될 수 없다.

텅 빈 마음의 색깔이 있다. 나는 그 색을 보며 자주 느낀다. 알아차림의 색은 늘 우리 앞에 있었다. 보고도 알지 못했던 그 색의 시간을 나는 자주 만난다. 그것이 노란색의 시간이다. 붉은색에 물들지도 않고, 푸른색에 취하지도 않는 노란색. 불행에 빠지지도 않고, 행복에 교만해지지 않는 알아차림의 색깔이다. 그 짧은 노랑의 시간을 보며, 나는 알아차림을 준비한다. 그러면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 짜증으로 가득 찰 내 머리를 텅 비워버리고, 그 공간 속에 감사를 맞이할 준비를 한다. 그것이 노랑의 시간이다. 신호가 변할 때, 우리에게 보내는 삶의 신호다.

마음이 현실을 바꾼다는 것은 단순히 정신승리를 위한 말이 아니다. 세상 만물의 모든 것을 연결하는 힘을 이야기한다. 그 공간을 우리 마음의 알아차림을 통해 변화시킬 수 있다. 세상을 바라보고 나를 바라보며 ‘내가 이런 상태에 있구나’라는 알아차림 속에 그것을 변화시키는 힘은 여기에 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은 세상을 지켜보고, 그것을 창조하며, 그 창조를 변화시킨다. 이 진리를 머리가 아닌 몸으로 경험하고, 몸으로의 경험이 마음에 각인될 때, 우리의 마음은 공간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게 된다. 그것이 알아차림의 본질이고, 그것이 알아차림의 힘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리다. 우리는 그런 존재다.

지금 여기가 천국임을 알고, 지금 여기에 천국과 연결된 모든 것이 있음을 알 때, 우리는 오늘을 즐길 수 있게 된다. 그 즐거운 시간 속에서 여러분은 알게 될 것이다. 지금(地金, 다듬어서 상품화하지 아니한 황금)이 있어야 황금이 있다. 지금이 즐거우면 미래도 천국이다. 천국을 위해 빠삐코를 희생할 때, 지금이라는 천국은 사라진다. 지금이 없으면 미래도 없다.

우리의 마음에는 늘 바람이 분다. 마음의 숲인 ‘이너 포레스트’에서 부는 바람이다. 그 마음의 바람이 우리의 생각이 되고, 감정이 되고, 느낌이 된다. 마음이 부정적으로 채색되면,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이 떠오른다. 그 감정을 느끼기 위해 우리는 세상을 부정적 관점으로 해석한다. 똑같은 상황을 누구는 조언으로, 누구는 잔소리로 느끼는 이유는 이 관점의 차이다. 세상은 관점이 투영된 것이다. 세상은 해석된 것이고, 판단된 것이며, 우리 마음이 그렇게 인식한 것일 뿐이다. 그래서 세상이 바뀔 때 내 관점이 바뀌는 것이 아니다. 내 관점이 세상을 그렇게 펼쳐내고 있다. 그 관점을 만드는 곳이 우리 마음의 숲이다. 그곳이 긍정으로 채색되고 감사로 물들 때, 우리는 따뜻한 바람 속에서 살아간다. 그 바람이 나의 바람이다. 우리 독자분들이 그런 앎을 통해서, 앎이 삶이 되는 현실을 경험했으면 한다. 우리의 앎, 우리의 밑바탕에 깔린 그 알아차림, 그 무의식이 우리의 감정과 세상을 만들고 있다. 그리고 그 감정이 그런 현실과 상황을 부르고 있다. 그래서 세상은 거꾸로다. 그가 나를 무시한 게 아니었다. 내가 무시하는 그를 만들었다.

종교는 개인의 선택이고 우리에겐 종교의 자유가 있다.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자유권이 종교다. 종교는 사실 진리를 깨닫는, 더 행복하기 살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도구에 빠져서 주인의 자리를 내주지 마라. 주객전도된 삶이 비교하며 사는 모습이다. 비교에 빠지지 말고, ‘내가 지금 비교하고 있구나’라는 깨달음을 ‘비교’를 통해 얻어야 한다. 그 알아차림의 대상이 비교일 뿐이다.

열심히 혹은 게으르게. 이제 그러지 말자. 열심히 대신 즐겁게, 게으르게 대신 충실히 오늘을 보내자. ‘개처럼 즐겁고 소처럼 충실한.’ 그것이 여행자의 삶이다.
‘개즐소충’하며 오늘을 살아갈 때, 우리는 처음의 느낌으로 ‘하루’를 여행할 수 있다. 그 즐거운 여행의 과정이 행복한 미래와 이어진다.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지만, 여행은 즐겁고 추억은 행복한 거다. 그 여행의 추억 속에서 오늘의 미소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 미소 속에 이미 행복한 미래는 이어져 있다. 과정이 좋으면 결과도 좋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삶의 가치가 있다. 그것이 바로 ‘풍요’와 ‘감사’다. 나는 나의 내면을 이 두 단어로 채우고 있다. 나의 관념을 이 위대한 단어로 채색하고 있다. 내 무의식을 풍요로 채우고, 내면의 숲을 감사로 물들이는 것, 그것이 내가 이 지구별 여행을 하는 시간이고, 이유이며, 내 삶의 의미와 가치다.
감사와 풍요의 말이 담긴 문장. 나는 오늘도 그 문장을 찾으며 일상을 적분해나간다. 그 문장이 모여 감사로 채워질 나의 영화를 기대한다. 그리고 풍요와 함께하는 삶이 곧 나에게 드러남을 알고 있다. 그렇게 나는 살아왔고, 지금도 살고 있다. 우리 삶은 그렇게 펼쳐지고 드러난다. 이 앎을 여러분도 알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시간이 즐거웠으면 한다. 그 시간이 수행이고, 마음공부이며, 알아차림의 과정이다. 그것이 살아가는 즐거움이다.

과정이 즐거워야 결과가 즐겁다. 오늘이 달콤해야 내일도 달콤하다. 즐거움을 모르면 미래의 행복도 알 수 없다. 과정이 즐거워야 결과가 즐겁다. 오늘이 행복해야 미래도 행복하다. 함부로 열심히 살지 말라는 이유다. ‘열심히’는 내일을 위해 오늘을 희생하는 모습이다. 열심히 여행하는 사람은 없다. ‘즐겁게’는 내일의 즐거움과 함께하는 오늘의 모습이다. 즐겁게 여행해야 추억이 남는 것이다. 그 추억은 일상으로 돌아온 내일의 원동력이 된다. 즐거운 인생의 좋은 재료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꿈꾸는 미래를 좋아하지만, 그 미래를 위한 ‘지금’은 거부한다. 지금 여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래서 늘 지금이 변하길 바라고, 내 현실이 바뀌길 원한다. 과정을 사랑하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오직 결과를 원한다. 현실은 지옥이고, 미래는 천국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알고 있는가? 지금이 천국이다. 미래는 없다.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오직 미래와 연결된 지금뿐이다. 상상이 펼쳐진, 내가 원하는 미래의 모습이 바로 지금이다.

그냥 선택하고,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며 살자. 다른 결정을 했어도 비슷한 정도의 과보를 받을 거다. 그러니 가볍게 선택하고, 그 선택을 긍정하며, 결과를 즐겁게 받아보자. 선택하고 셔터 내리라는 말이다. 다른 선택지는 찢어 버리고 나의 선택을 긍정하며 즐겁게 지내보자. 그것이 정답이다. 그것이 결정장애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얼마나 쉬운가. 그냥 결정하자. 아니면 주머니에서 동전이라도 찾아보자. 그것도 어려우면 첫 번째 떠오른 걸 선택하자. 우리 어릴 때 시험 많이 쳐봐서 알지 않는가? 처음 선택이 맞았다.

지금, 지치고 무력해진 당신에게 꼭 말해주고 싶다. 삶은 과정으로만 존재한다. 과거, 현재, 미래라는 건 없다. 지금밖에 존재하지 않기에 ‘지금을 얼마만큼 잘 보내는가’가 결국에는 삶의 모든 것이다.

번아웃은 ‘나약한 것’이 아니다. 번아웃은 나약한 나를 성장시키는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 그래서 번아웃은 ‘당연한 것’이다. 모든 사람이 겪지만, 그 방향성이 달라지는 것이 번아웃이다. 번아웃을 무기로 쓸지, 무력으로 쓸지는 여러분에게 달렸다. 그리고 한 가지만 기억하라. 제발 ‘힐링’을 찾지 말자. 이는 스스로를 환자로 만드는 일이다. 번아웃을 소진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자세다. 대신 이렇게 하자.
‘눈 감고 꿀잠 자자.’
번아웃의 모든 경험이 내 몸과 마음에 각인될 수 있도록.

번아웃은 소진이 아니다. 더 높은 발전을 위한 마찰력이라고 생각하자. 그 마찰의 생채기가 우리를 아프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성장이라는 선물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병과 약은 공존하기 때문이다. 소진의 순간이 곧 회복의 순간이며, 그 회복을 통해 더 강한 추진력을 얻는다. 훗날 지금의 과정을 되돌아보며 ‘내가 벌써 여기까지 왔구나’를 알게 되는 순간이 반드시 온다는 것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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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과 만나는 첫 글을 어떻게 시작할지 고민하다가 이렇게 질문해본다. 우리는 왜 책을 읽을까? 지금 왜 의자에 앉아 이 책을 펼치고 있을까? 더 나아가 아침에 왜 출근을 할까? 왜 출근을 하고, 직장 상사에게 시달리며, 고객의 불평을 들어야 할까? 왜 시간을 들여 학원에 다니고, 자기계발을 하는 걸까? 돈은 또 왜 벌까? 좋은 신발과 좋은 가방을 사기 위해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색다른 곳으로 여행을 떠나기 위해서? 그렇다면 여행은 왜 할까? 이렇게 질문에 질문을 이어가다 보면 알게 된다. 정답은 행복하기 위해서다. 행복하기 위해 돈을 벌고, 행복하기 위해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 자기 성장과 자기 성취에서 오는 행복한 느낌을 위해 학원도 다니고, 책도 읽는다. 결국은 행복이다.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이 모든 것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마지막 질문이다. 우리는 왜 행복하려고 할까? 불행해서다. 그래서 행복을 삶의 최고 가치로 두고 그 행복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그런데 우리는 행복하지 않다. 우리는 괴롭다. 우리는 불행하다. 왜 그럴까? 답은 하나다. 우리가 행복을 추구하지 않고, 괴로움을 추구해서다. 거꾸로 이야기하면 우리는 즐거움을 추구하기에 행복할 수 없는 거다. 행복을 즐거움으로 착각해서, 그 즐거움을 추구하는 게 행복을 위한 삶이라고 교육받고 세뇌당했다. 그렇게 교육한 사회와 우리 부모들 역시 같은 방식으로 세뇌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즐거움의 추구는 행복의 추구가 아니다. 즐거움의 추구는 괴로움의 추구이고, 결국 불행한 삶을 위한 방식이다.

도파민은 상승했다가 감소하고 다시 정상화되는 과정을 반복한다. 우리 삶도 그렇다. 즐거운 도파민의 상승 시기가 지나면, 괴로운 도파민의 하강 시기가 찾아온다. 즐거움 뒤에는 반드시 괴로움이 있다. 즉 괴로움은 즐거움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즐거움은 괴로움을 등지고 있으며, 괴로움은 즐거움의 자궁에서 태어난다. 마치 손바닥과 손등처럼 즐거움과 괴로움은 하나로 붙어 있다. 그 둘은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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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내면이 긍정으로 채색되어 있다면, 나에게는 긍정의 관점이 생긴다. 그 긍정의 관점으로 우리는 세상을 바라본다. 그러면 현실을 긍정적으로 해석하게 된다. 빨간 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면 세상은 빨갛게 보인다. 긍정의 안경은 기분 좋은 산과 바다를 만들며, 시원한 푸른 하늘과 아련한 추억의 별을 만든다. 반대로 부정의 안경은 그 모든 것을 부정적인 것, 즉 두려움과 불안 혹은 분노로 물들인다. 산에 가도, 바다에 가도 괴롭고 우울하다. 하늘을 봐도, 별을 봐도 두렵고 불안하다. 내면의 관점이 세상을 그렇게 만들고 그렇게 생각하게 한다. 그러한 생각과 해석이 습관이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생각 패턴이자 행동 패턴이다. 즉, 자신의 매너다. 매너가 사람을 만들지만, 그 매너는 마음이 만드는 것이다.

기억하라. "Manners maketh man"은 <킹스맨>의 명언이지만, 우리 삶에 필요한 금언은 이것이다.

"Make men happ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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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은 어떤 측면에서는 오만한 것이기도 하다. 나는 죽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나와 내 가까운 이는 불행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그 배반으로 슬픔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내가 겪지 않아도 될 일을 겪었다고 생각하기에 슬프고, 화나고, 분노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나여서는 안 되는 것인가? 앞에서도 말했듯이 사고, 죽음, 고통은 우리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일이다.

부디 분노와 슬픔으로 시간을 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는 한 번 지나오면 결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길을 간다. 우리 삶은 리허설이 있는 연극 무대가 아니다. 시간을 되돌려 같은 길을 두 번 걸을 수도 없다. 죽은 자식을 그리워하다 정작 살아 있는 자식이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걸 방치하는 부모의 이야기를 많이 접해보지 않았나. 이 얼마나 부조리한 일인가.

지금 누구와 걷고 있는지, 누구와 마음을 나누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자. 곁에 있는 이에게 미소를 보내고 사랑한다는 말을 해주고 맛있는 음식을 나눠 먹는 일. 일상의 소중함을 함께 누리는 것, 그것이 인생이다. 이미 떠난 사람을 붙잡고 슬퍼하느라 지금 옆에 있는 사람을 지옥으로 몰아넣어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유한한 시간을, 더 늦기 전에 곁에 있는 이들과 함께 나누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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