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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소설 읽는 노인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정창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3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읽고 뒤돌아서면 잊고 뒤돌아서면 잊는다.
왜인지 모르겠다.
뒤돌아서면 잊는 까닭에 지금 한 세 번쯤은 읽지 않았을까 싶은데 여전히 새롭다.
연애소설 읽는 노인.
밀림 오두막에 살고있는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는
독서 취향이 확고한 밀림 오두막에 살고있는 혜안이 깊은 사람이다.
그가 책을 구하는건 치과의사덕분이다.
˝연애 소설인가요?˝
치과 의사가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가슴 아픈 얘긴가요?˝
노인이 다시 물었다.
˝영감은 목 놓아 울고 말걸˝
치과 의사가 확신에 찬 어조로 대답했다.
-39p
그는 그만의 독서법으로 연애소설을 읽는다.
그에게 주어진 책이 몇권되지 않아도 그는 상상으로
뜨거운 키스, 혹은 베네치아 따위를 그려본다
모두가 그에게 묻는다.
글도 읽을줄 아시오?
그는 글 이상의 것을 읽는다.
˝ 노인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책을 읽었다. 그의 독서 방식은 간단치 않았다. 먼저 그는 한 음절 한 음절을 음식 맛보듯 음미한 뒤에 그것들을 모아서 자연스런 목소리로 읽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단어가 만들어지면 그것을 반복해서 읽었고 역시 그런 식으로 문장이 만들어지면 그것을 반복해서 읽고 또 읽었다. 이렇듯 그는 반복과 반복을 통해서 그 글에 형상화된 생각과 감정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음절과 단어와 문장을 차례대로 반복하는 노인의 책읽기 방식은 특히 자신의 마음에 드는 구절이나 장면이 나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도대체 인간의 언어가 어떻게해서 그렇게 아름다울 수 있는가를 깨달을 때까지 마침내 그 구절의 필요성이 스스로 존중될때까지 읽고 또 읽었다. ˝
- 46p
이 책은 전체적으로 노인의 읽기 방식이 필요한 책이다.
문장마다 아름답고 책장마다 경이롭다.
고향에 살던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 프로아뇨는 임신 스트레스를 겪는 아내를 위해 밀림으로 떠난다.
밀림에서 살아남기란 여간 힘든 일이었다.
고열로 아내가 죽었지만 다시 고향에 돌아갈 수는 없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모든 것을 용서해도 실패만큼은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곳에 남아서 사라진 기억들을 보듬고 살아야한다고 결심했다.˝ -54p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는 수아르족과 함께 살며 밀림에 대해, 자연에 대해 배울 수 있었다. 그들이 생각하고 가꾸는 인간과 자연의 삶은 가히 예술에 가까웠다.
이 책은 결국 자연과 사는 지혜를 말한다.
˝ 나는 글을 읽을 줄 알아.
그것은 그의 평생에 가장 중요한 발견이었다. 그는 글을 읽을 줄 알았다. 그는 늙음이라는 무서운 독에 대항하는 해독제를 지니고 있었다.˝
-75p
˝ 안토니오 호세 볼리비르는 책 한 권 갖지못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우기를 보냈다. 그는 생애처음으로 자신이 고독이라는 짐승에 잡혀있음을 절감했다. 그것은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쓸쓸한 강당에 찾아와서 하고 싶은 말을 몽땅 내뱉은 뒤에 유유히 사라지는 교활하기 이를 데 없는 짐승 같았다.˝
-80p
˝ 그가 엘 도라도에 머무는 동안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한 책은 에드몬도 데 아미치스의 소설, 특히 `사랑의 학교`였다. 그는 그 책을 거의 손에서 떼지 않은 채 눈이 아프도록 읽고 또 읽었다. 그러나 눈물을 쥐어짜며 그 책을 들여다보던 그의 마음 한구석에 주인공이 겪은 불행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그 많은 불행이 한 사람에게만 들이닥칠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롬바르디아의 소년에게 그토록 참기 힘든 고통을 안겨주는 내용을 읽는다는 것 자체가 비겁한다는 느낌이 들자 그 책을 덮어 버리고 말았다.˝
- 87p
˝나이가 들면 느는게 삶의 지혜라고 하지 않았던가. 사실 노인은 삶의 지혜라는 말을 떠올릴 때마다 자신에게도 그런 미덕이 찾아오리라고 기대했고, 내심 그런 미덕이 주어지길 간절히 기원했다. 물론 그가 기대하는 미덕은 그를 과거의 자신으로 되돌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지혜이자 스스로 만든 덫에 빠지지않도록 만들어 주는 지혜였다˝
-106p
˝ 그랬다. 짐승이 원하는 것은 죽음이었다. 그러나 그 죽음은 인간이 베푸는 선물이나 적선에 의한 죽음이 아닌 인간과의 물러설 수 없는 한판 싸움을 벌인 뒤에 스스로 선택하는 그런 죽음이었다.˝
-153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