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문장,살을 에는 찬 공기가 적막하고 광활한 땅 위로 펼쳐졌다. 나는 노인이 될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 산다.어느 순간 어느 날에 갑자기 죽어버릴 거라는 기대나 확신을 하고 산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노인이 되어 버린다면쓸모없지 않기를. 쓸데없지 않기를.세상을 위한 쓸모나 세상을 위한 쓸 데가 아닌나를 위한 쓸모가 있기를 나를 위한 쓸 데가 있기를. 제발 우아하기를 제발 풍요롭기를 제발 평안하기를.알래스카 극지방 유목민들은 떠돌아 다니며 산다.먹을 것을 찾아야 하니까. 순록처럼.버림받은 두 노인이 버림 받은 이유가 자명하다.그들은 자신을 위해서도 집단을 위해서도 쓸모가 없었다.자신들이 쓸모 있음을 자각하지 않았다.어른이라서 대접 받고 보호 받는 사이에 그 모든 것들을 망각하고 투덜거림만 늘었다.그래서 버림받았다.그랬더니 모든 걸 아직 할 수 있는 사람 둘이 남았다.그들은 그 어떤 알래스카 부족보다 영리하고 지혜롭게 먹을 걸 쌓아두고 사냥을 하고 어느 지점이 풍요로운 줄을 알았다.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쓸모를 입증하고 다시 부족으로 돌아갔다. 둘이서도 충분했겠지만. 그래서 부족민들이 찾으러 왔을 때 나는 짜증을 냈지만. 책을 읽으며 우리집에서 유일하게 늙어 계셨던 외할머니를 떠올린다.우리 외할머니는 나를 좋아하지 않았다.우리 엄마 말로는 내가 엄마를 괴롭혀서 그렀다는데...글쎄... 그냥 내 존재가 우리 외할머니 마음에 들지 않는 타입이었던 것 같다.나도 우리 외할머니를 별로 안 좋아했으니... 쌤쌤친다.스스로가 늙어 할 줄 아는게 없어 투덜거림만 늘었다는 두 늙은 여인의 반성을 읽으며 우리 할머니도 그랬었는데... 라고 생각했다.우리 엄마와 우리 할머니는 참 많이도 싸웠다.싸우면서 할머니는 작아지고 무능해지고 스스로를 쓸모없게 되었다.난 엄마와 싸우지 말아야지. 우리 엄마를 무능해지게 만들지 말아야지.할머니가 마늘을 다듬거나 나물을 다듬거나 반찬을 만들어서우리 엄마의 퇴근길에 엄마에게 선물로 줬다면그랬다면 그걸로 괜찮았을텐데... 그럼 엄마와 할머니가 덜 싸웠을텐데...나와 엄마가 사이가 좋지 않을때처럼 둘이 편먹고 그냥 나만 욕했을텐데... ㅋㅋㅋㅋㅋㅋ하지만 우리 할머니는 절대 그런걸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왜 안했을까. 그런건 기지배들이나 하는 일이라는 적극적 문명화된 사상이 할머니 머릿속에 있으셨을까. 젊어 너무 많이 하셔서 늙어선 진절머리가 나셨을까.그래도 딸이니까 좀 해주셨음 좋았을텐데.난 우리 엄마의 엄마가 되지 못할거다. 난 아직도 우리 엄마를 좋아하고 무서워하고 어려워하니까. 그래도 혹시라도 다음 생에 엄마의 동생으로 태어나거나 엄마의 이모로 태어나거든 내가 살뜰히 그렇게 챙겨야지.맛없어도 가지고 가라 뒤통수에 대고 소리 질러야지.저 기지배가 저렇게 싸가지가 없다고 흉보면서도 때되면 보약을 쌓아놓고 너 요즘 왜이렇게 상했냐며 꼭꼭 챙겨야지.내가 그래야지.왜냐면 우리 할머니가 이런걸 안했었거든...우리 엄마는 동생도 이모도 없는데... 그런걸 할 수 있는 할머니였다면 쓸모와 쓸데가 있단 자부심이 생기셨을텐데... 할머니를 생각하다 엄마를 생각한다.효녀가 따로 없다.이 책은 책의 문장보다 옮긴이의 문장이 더욱 빛난다.꼭 옮긴이의 말까지 읽어 보시기를. -170p마흔 개의 여름이 어떻게 여든 개의 여름을 이기겠는가.마흔 살에게 마흔한번째 봄은 미지의 시간이지만 여든 살에게는 무엇으로도 쓸 수 있는 단단한 기억인 것을. 자작나무를 네 조각으로 갈라 가죽끈과 연결해 생애 최고의 눈신발을 만들었던 게 마흔여덟째 가을이었다면 ?눈을 깜빡이지 않고 상대의 눈을 쏘아볼 줄 알게 된 것이 쉰두번째 겨울이었다면? 연어 껍질로 말린 물고기를 담을 주머니를 만드는 데 성공한 것이 일흔번째 늦여름이었다며?적막하고 고요한 대지를 마주하고 홀로 서서 우주 속의 나를 바라볼 거리를 여든한번째 봄에 갖게 되었다면?시간이란 길이의 문제가 아니라 깊이의 문제이고, 그림을 그림이게 하는 것 역시 원근이 아니라 깊이(메를로 퐁티)라는 것을 칙디야크와 사가 그들이 본 여든한 개의 여름과 일흔여섯 개의 가을로 확인해준다.몇 번째인지 모르지만 깊이를 더해가는 그대의 봄 앞에 이 이야기를 드린다.그대의 눈신발,그대의 바라봄,그대의 연어 껍질 주머,아직 오지 않은 그대 삶의 절정을 위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