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 개정판
알베르 카뮈 지음, 이정서 옮김 / 새움 / 201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지금까지의 <이방인>오역 논쟁을 지켜보자니, 카뮈 <이방인>에 대해 독자들이 오해하고 있는 부분은 바로 이 지점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뫼르소가 총을 쏜 이유가 단지 태양 때문인가? 부조리 소설이고, 인간의 실존 문제를 다루고 있으니, 현재의 번역본도 크게 문제가 없어 보인다.”

 

이러한 의문에 대해 원래 카뮈의 <이방인>이 어떤 내용인지 설명해보겠습니다.

기존 번역본들, 김화영 교수 번역본이 아니라 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장면까지의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게 됩니다.

 

1. ‘이년 저년이라는 욕을 입에 달고 사는 생양아치 같은(포주인) 레몽이라는 사내가 자신의 정부인 여자를 피가 나게 때리고 쫓아낸 뒤, 그에 앙심을 품은 그녀의 오빠가 레몽을 해치기 위해 바닷가까지 따라와서는 싸움이 벌어진다. 뫼르소는 질이 안좋은 레몽이라는 사내의 요청에 따라 여자 친구까지 데리고, 레몽과 비슷한 수준의 친구인 마송의 해변가 오두막에 놀러와 있다가 우연히 그 사건에 연루되고, 해변에서 다시 우연히 그 여자인 오빠라는 사내와 단둘이 마주치게 되었을 때,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 때문에총을 쏘았다. 뫼르소는 이후에도 쓰러진 상대를 향해 연속해서 네 발을 더 쏘아 그 자리에서 사내를 확실히 죽게 만들었다. 그리고 법정에서 재판장이, ‘왜 그랬냐고 묻자, 무덤덤하게 태양 때문에그랬다고 대답한다.

(민음사판 김화영본을 비롯한 기존 번역서들)

 

그런데 새롭게 번역된 실제 카뮈의 이방인은 저런 내용이 아닙니다. 실제로는 이렇습니다.

 

2. 외모는 험상궂지만, 남자의 의리를 앞세우는 창고관리인인 레몽이라는 사내가 자신의 정부라고 믿고 생활비를 대주고 있던 여자가 있었는데, 실제는 그 여자의 뒤를 봐주는 '기둥서방'이 있었다. 레몽은 자신이 농락당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분노하여 이전에는 결코 손을 댄 적이 없었지만여자를 때려서 쫓아낸다. 그에 앙심을 품은 기둥서방이 레몽에게 복수하기 위해 해변까지 따라오고, 친구인 레몽을 따라 여자 친구와 함께 마송의 해변가 오두막에 놀러와 있던 뫼르소는, 이들의 싸움에 연루된다. 급기야 사람들을 피해 혼자 샘을 찾아왔던 뫼르소는 그곳에서 그 아랍사내와 마주치게 되고, ‘시뻘건햇볕을 피하기 위해 샘 쪽으로 한걸음 더 다가오는 뫼르소를 보고 자신에게 다가온다고 오해한 아랍사내는 먼저 칼을 빼들었고, 다시 뫼르소는 태양 때문에눈을 찔러오는 그 칼날에 위협을 느낀 나머지 무의식적으로 방아쇠를 당긴다. 그리고 약간의 텀을 두고엄마의 장례를 치르며 느꼈던 머리 위 오후 2시의 폭발하는 태양에 어지럼증을 느끼며 몽롱한 상태에서 네 발을 더 쏘아 사내를 죽음에 이르게 만든다. 법정에서 재판장이 왜 그랬냐고 물었을 때, 뫼르소는 정신이 없는 상태에서(검사가 막 사형을 구형한 뒤였던 것이다), ‘자기도 터무니없는 줄 알면서도 그것은 태양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새움출판사 이정서본)

 

기존 이방인을 읽은 독자님들은 아마 1번 내용에 대해 수긍할 것이고,

새움 이정서본을 읽은 분들은 1번 내용을 보면서 좀 어이없으실 겁니다.

또한 둘 다를 보신 분은 이야기가 섞이면서 어디가 크게 다른지 잘 모르실 겁니다. 다만 이전에 몰랐던 것 같은 내용은 이해하게 되었을 겁니다.

 

왜 이런 현상이 생기는가 하면, 바로 소설이 가지고 있는 특수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무슨 소린가 하면, 소설은 개연성이 있어야 합니다. “있음직한 비사실인 것입니다. 그러려면 모든 사건이 인과관계가 성립되어야 합니다. 소설이 보통 산문과 다른 이유가 그것입니다. 그래서 잘 읽히는 것이고 재미가 있는 것입니다. 잘읽히지 않는다는 것은 이야기가 잘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이고, 뭔가 맥이 끊긴다는 느낌 때문입니다.

 

우선 저기, 1번 요약본을 보십시오. 자세히 보면 인과관계가 성립되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게 우연으로이루어져 있는 것입니다.

 

우선 1번이 소설이 되려면, 레몽이 자신의 정부를 때리게 된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보다시피 저기엔 아예 그런 설명이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냥 레몽이라는 사내가 생양아치라 이유도 없이 여자를 구타했다가 되야 하는데, 소설 속에서는 엄연히 처음으로 손을 댔다네가 나를 농락했어. 네가 나를 농락했다구라고 레몽이 소리치는 장면이 나옵니다. 김화영 교수번역본을 포함해 기존 번역에서는 이 농락의 이유가 전혀 드러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저기 등장한 남자가 그냥 여자의 오빠라면, 카뮈가 내용 속에 친절하게 복권전당포등을 언급할 하등의 이유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카뮈는 둘이 친남매가 아니라는 사실을 뫼르소만 알고 있다는 암시를 위해 소설적 장치를 해둡니다. “(레몽)가 여자의 이름을 말했을 때 나는 그 여자가 무어 여자임을 알았다.”(본문 93)는 뫼르소의 독백은 그래서 소설 속에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카뮈는 아랍인무어인이라는 태생적 차이를 가지고 분명하게 둘의 관계를 밝히고 있는 것인데, 기존 번역서들은 모두 한결 같이 이 점도 간과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뫼르소는 왜 굳이 해변까지 마리와 함께 와서 그 사건에 연루된 것일까요? 그냥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레몽이라는 사내가 1번에서처럼 저렇듯 생양아치에, 포주에, 여자에게 무차별적인 폭력을 휘두르는 자라면, 과연 저 이성적인 뫼르소가 자신의 여자 친구까지 데리고 그 친구의 오두막까지 따라와서 유쾌한 해수욕을 즐기고, 나아가 즐거운 마음으로 그들과 여름을 함께 보낼 계획을 짤 수 있었을까요? 마리 역시도?

마송과 레몽 그리고 나는 비용을 분담하여 8월을 함께 해변에서 지낼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Masson, Raymond et moi, nous avons envisagé de passer ensemble le mois d’août à la plage, à frais communs.)” (본문 77)

 

이렇듯, 뫼르소에게 생테스 레몽은, 김화영 교수나 다른 번역자들이 생각하는 대로 그런 양아치가 아닙니다. 그는 그냥 점잖고 지적인 셀레스트와는 조금 다르게 뫼르소가 뒤늦게 사귄 색다른 친구였던 것입니다. 그래야만 위와 같은 정황이 가능해지는 것이고, 다시 그래야만 최소한의 소설적 개연성이 확보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뫼르소는 죽음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하면서 마지막으로 이러한 독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레몽이 그보다 여러 면에서 훨씬 나은 셀레스트와 똑같이 나의 친구라는 게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Qu’importait que Raymond fût mon copain autant que Céleste qui valait mieux que lui?)”(본문 164)

 

뒷부분을 다시 한번 정리하면,

 

레몽을 따라 해변가에 놀러왔다 연루된 싸움, 이제 레몽과 아랍인과의 갈등은 해소되고, 참을 수 없는 답답함으로 혼자 산책을 나왔던 뫼르소는 다시 샘으로 돌아갔다가 친구인 레몽을 농락했던여자의 기둥서방인 아랍인 사내와 단둘이 마주치게 된 것입니다. 그 상황에서 뫼르소는 단지 뜨거운 태양을 벗어나고 싶어서 사내가 누워있는 샘 가까이로 한 걸음을 더 옮긴 것인데, 아랍남자는 오해하고 먼저 칼을 빼들었고, 그 칼날에 반사된 강렬한 햇빛이 뫼르소의 눈을 후벼 팠기에, 위협을 느낀 뫼르소는 가지고 있던 총의 방아쇠를 무의식적으로 당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기존의 번역서들은 이러한 여러 정황들을 모두 외면한 채, 주인공 뫼르소가 우연히 악한인 레몽을 따라 해수욕을 갔다가 싸움에 휘말리게 되고, 다시 우연히 사내와 단둘이 만나게 되자 태양 때문에총을 쏘고, 급기야 네 발의 확인사살까지 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소설적 전개를 완전히 무시한 번역인 것입니다.

 

, 보시다시피, 앞의 두 예문(1,2)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일하게 달라지지 않는 게 있습니다. 바로 뫼르소가 사람을 죽인 이유, 그것이 태양 때문이었다는 표면적 이유 말입니다. 여기에 이 문제의 핵심이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보다시피 저렇게 두고 봐도, 프랑스인이나 우리나 뫼르소가 태양 때문에 사람을 죽였다는 문학적 레토릭을 다르게 받아들일 이유가 하등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이게 말이 될까요? 그 어떤 개연성도 없이, 이런 우연만으로 이루어진 소설을 두고 세계인이 열광하고 노벨문학상 위원회에서 현대소설의 전범이라는 극찬을 쏟아냈을까요? 결코 아닐 것입니다. 그건 카뮈에 대한 모욕이고, 노벨문학상에 대한 모독이 될 것입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게 되자, 거기에 부조리라는 말로 포장을 한 게, 기존의 <이방인>이었던 것입니다. 사실 이 소설이 부조리 소설인 이유는 주인공이 그렇게 횡설수설하며 이유도 없이 그냥 태양 때문에사람을 죽이고 항소도 않고 죽음을 받아들여서 그런 것이 결코 아닙니다. 보시다시피 뫼르소의 살해 행위는 충분히 정상참작이 될 수 있는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평등과 정의를 위해 세웠다고 믿었던 법정에서 오히려 사형을 선고하고,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면서 프랑스인들은 충격에 빠졌던 것입니다. 바로 자신들이 발 딛고 있는 세계가 얼마나 부조리한가 깨닫게 된 것이고, 그래서 이 소설을 부조리 소설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읽은 이방인은 카뮈 <이방인>이 아니다라는 카피가 생겨난 이유이기도 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뫼르소의 살해 행위는 정말 태양 때문이었나?

 

1.

고마해라님께서는 제게 개인적 소회와 더불어 3가지 질문을 주셨습니다.

 

1) sirène가 프랑스에서 뱃고동을 의미하기도 하는가?

2) 정당방위가 이정서씨의 세계적으로 독창적인 해석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가?

3) tout de suite에는 '어디에 들르지 말고' 곧바로 라는 뜻이 있는가?

 

이상의 세 질문은 진지하지 않다고 여기셔서 대답하지 않으시는 것 같은데, (사실 저도 답을 기대하지는 않습니다), 저 중에서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질문은 2)번 입니다. 2)번 때문에 벌어진 혼란이 생각보다 크고, 혹시라도 이정서 씨 말듣고 외국사람이라도 만나서 저딴 소리 했다가는 나라 망신입니다. '독특한 놈' 소리는 듣겠죠.

 

그런데 도대체 뭐가 망설여지십니까? 이 해석에 대해 스스로 당당하시잖아요? 세상 사람이 다 아니라고 해도, 내가 그렇게 읽었다고 하면 되는 일입니다. 이정서 씨 해석은 존중합니다. 나름 이유가 있으시겠지요. (이정서 씨는 있다고 생각하시겠지만) 소설에 정답이 어디있습니까?

 

그러나 문제는 한국에서만 김화영의 오역 때문에 그렇게 이해되고 있다는 주장은 소설이 아닙니다. 여기엔 정답이 있고, 이정서씨도 그 답을 아신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다른 건 몰라도 이 부분만큼은 스스로 바로잡아 주셔야 합니다. 출판인으로서의 최소한의 양심 이전에, 인간의 양심에 호소합니다. 사기잖아요 이건.

 

더불어 이런 말씀도 주셨습니다.

 

이정서 씨. 우선 저를 모교수로 착각한 것에 대해 사과부터 하셔야 맞는 것 아닌가 싶고, 댓글 고치시면서 제 댓글들 삭제하신 것에 대해 유감 정도는 표해주셨어야 하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

 

화가 많이 나신 듯한데, 사실은 고마해라님이 누구신지 몰랐을 때는, 교수님 말씀대로 저는 저 질문을 포함해 고마해라님의 이러저러한 질문들이, ‘진지하지 않은 그만그만한 댓글쯤으로 여겨 무시했던 게 사실입니다. 누누이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역자이지 해설자나 평론가가 아니기도 하거니와, 그 모든 질문에 답할 여력 또한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번 댓글에서 님도 (제게 그러했듯) 실명을 밝히시면 답 드리겠다고 말씀드렸던 것입니다(여기서 다시 실명 필명 논란을 재현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다만 위의 질문처럼 저것이 정말로 세계적으로 독창적 해석인지 어떤지에 대해서는 그걸 주장하시는 분이 누구냐에 따라 그 발언의 무게가 달라지기 때문에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겠다는 생각에서 입니다).

 

상황이 여기에 이른 마당인지라, 이제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전번에도 말씀드렸다시피, 고마해라님이 문학동네에서 <이방인(이인)> 번역서를 내신 이기언 교수님이시라는 걸 저는 알고 있습니다(이전 새움출판사 편집부 실수로 빗어졌던 manquer에 대한 언급, 뱃고동과 호송경관 등에 대한 본인만의 이론적 주장, 전문가 이상의 불어 수준 등 두 분이 동일인이라는 사실을 여기서 다 설명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중요한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런 정도의 전제가 되어야 교수님 말씀대로 질의와 응답에 대한 그만한 무게가 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혜량해주시리라 믿습니다).

 

 

 

 

2.

일단 sirène가 사이렌이냐 뱃고동이냐는 문제, 교수님은 이것을 고동소리들이라고 해석하고 계시지만 저는 그것이 맞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고 믿는 측입니다. 이 문장은 다시 카뮈가 즐겨 사용하는 중의적 뜻의 문장과 정확히 일치하는 문장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서도 저 나름은 할 얘기가 너무나 많지만, 교수님 말씀대로 이 문항이 여기서는 그다지 중요치 않을 수 있기에 간단히 제 생각만 적어두고 가겠습니다.

 

저는 번역을 하면서 확실치 않은 부분에 대해서는 의역을 하기 보다는 정확히 원문 그대로를 살려 가능한 작가의 의도를 해치지 말아야 한다는 쪽이라고 이전에도 말씀드렸습니다. 무슨 소린가 하면 sirène은 우리말이 아닙니다. 그건 그냥, 그야말로 세이렌/시렌느 sirène인 것입니다. 앞의 정황으로 봤을 때 저것이 배에서 나는 어떤 소리일 가능성은 훨씬 큽니다. 그러나 저것이 배에서 나는 소리라 한다 해도 우리말 어떤 것과도 일대일 대응하기가 쉽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뱃고동 소리든, 배의 기적소리든 그것이 배에서 나는 소리라고 확실히 명기하기 위해서는 불어 원문에 navire가 들어있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저는 이 소설에서 가능한 쉼표 하나까지 맞추려 노력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확인해보시면 아시겠지만, 이 소설 번역 내내, 저는 원문에 없는 부사어나 형용사, 접속사를 제 임의로 넣은 게 하나도 없다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카뮈의 <이방인>이 우리 독자들에게 읽히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다는 걸 지금 확인하고 있는 셈이기도 하고요. 저는 만약 소설에 굳이 주석을 달아야 할 경우가 있다면 바로 이런 부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각주로, 세이렌이 쓰인 전락속 문장을 소개할 수도 있고, 김화영 교수님이 행복한 죽음을 언급하며 달아둔 주석을 설명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없는 수식어를 끌어와 이해를 돕기보다는 필요하다면 그렇게라도 해서 독자의 이해를 돕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뱃고동을 버리고 사이렌을 썼던 이유입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저는 본문에서(역자노트가 아닌) 그냥, 있는 그대로 아무런 수식 없이 카뮈가 쓴 그대로 사이렌이라고만 옮겨두고 있습니다. 그것이 배에서 들려오는 세이렌인지, 그 밖의 어디에서 들려오는 사이렌인지 그걸 판단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런 경우 작가가 아닌 바에는 그것을 역자가 임의로 해석할 필요가 없지 않겠느냐는 게 고전 소설 번역에 대한 제 기본적인 소견입니다.

아무튼, 교수님 말씀대로 정말 중요한 것이 2번 문항이라는 데 저도 동의하여, 이 문제는 여기까지만 답하겠습니다.

 

 

3.

뫼르소가 총을 쏜 이유가 단지 태양 때문인가? 하는 문제.

교수님, 일단 한번 거기까지의 소설 상황을 짧게 정리해보면 어떻겠습니까?

교수님의 번역서(김화영 교수님을 비롯 기존 번역자들 모두가 그러하지만)를 정리하면 아마 이렇게 될 것입니다.

 

1. ‘이년 저년이라는 욕을 입에 달고 사는 생양아치 같은(포주인) 레몽이라는 사내가 자신의 정부인 여자를 피가 나게 때리고 쫓아낸 뒤, 그에 앙심을 품은 그녀의 오빠가 레몽을 해치기 위해 바닷가까지 따라와서는 싸움이 벌어진다. 뫼르소는 질이 안좋은 레몽이라는 사내의 요청에 따라 여자 친구까지 데리고, 레몽과 비슷한 수준의 친구인 마송의 해변가 오두막에 놀러와 있다가 우연히 그 사건에 연루되고, 해변에서 다시 우연히 그 여자인 오빠라는 사내와 단둘이 마주치게 되었을 때,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 때문에 총을 쏘았다. 뫼르소는 이후에도 쓰러진 상대를 향해 연속해서 네 발을 더 쏘아 그 자리에서 사내를 확실히 죽게 만들었다. 그리고 법정에서 재판장이, ‘왜 그랬냐고 묻자, 무덤덤하게 태양 때문에그랬다고 대답한다.

 

어떠신지요? 교수님이 번역하신 그대로의 내용이 맞지 않습니까?

그럼 이제 냉정하게 한번 보십시오. 이게 소설이랄 수 있는지.

 

소설은 개연성이 있어야 합니다. “있음직한 비사실인 것입니다. 그러려면 모든 사건이 인과관계가 성립되어야 합니다. 보통 산문과 다른 이유가 그것입니다. 그런데 저기서 인과관계가 성립되는 게 하나라도 있나요? 모든 게 우연히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선 저대로라 해도, 레몽이 자신의 정부를 때리게 된 이유가 있어야 하는데 저기엔 아예 그런 설명이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냥 레몽이라는 사내가 생양아치라 이유도 없이 여자를 구타했다가 되는데, 소설 속에서는 엄연히 처음으로 손을 댔다네가 나를 농락했어. 네가 나를 농락했다구라고 레몽이 소리치는 장면이 나옵니다. 교수님을 비롯한 기존 번역에서는 이 농락의 이유가 전혀 드러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저기 등장한 남자가 그냥 여자의 오빠라면, 카뮈가 친절하게 복권전당포등을 언급할 하등의 이유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카뮈는 둘이 친남매가 아니라는 사실을 뫼르소만 알고 있다는 암시를 위해 소설적 장치를 해둡니다. “(레몽)가 여자의 이름을 말했을 때 나는 그 여자가 무어 여자임을 알았다.”(본문 93)는 뫼르소의 독백은 그래서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카뮈는 아랍인무어인이라는 태생적 차이를 가지고 분명하게 둘의 관계를 밝히고 있는 것인데, 교수님을 비롯한 기존 번역서들은 이점을 어떻게 처리하고 계신가요? 어찌된 일인지 모두 한결같이 이 점도 간과하고 있지 않습니까?

 

또한 뫼르소는 왜 굳이 해변까지 마리와 함께 와서 그 사건에 연루된 것일까요? 그냥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레몽이라는 사내가 저렇듯 생양아치에, 포주에, 여자에게 무차별적인 폭력을 휘두르는 자라면, 과연 저 이성적인 뫼르소가 자신의 여자 친구까지 데리고 그 친구의 오두막까지 따라와서 유쾌한 해수욕을 즐기고, 나아가 즐거운 마음으로 그들과 여름을 함께 보낼 계획을 짤 수 있었을까요? 마리 역시도.

마송과 레몽 그리고 나는 비용을 분담하여 8월을 함께 해변에서 지낼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Masson, Raymond et moi, nous avons envisagé de passer ensemble le mois d’août à la plage, à frais communs.)” (본문 77)

 

뫼르소에게 생테스 레몽은, 교수님이나 김화영 교수님이 생각하시는 대로 그런 양아치가 아닙니다. 그는 그냥 점잖고 지적인 셀레스트와는 조금 다르게 뫼르소가 뒤늦게 사귄 색다른 친구였던 것입니다. 그래야만 위와 같은 정황이 가능해지는 것이고, 다시 그래야만 최소한의 소설적 개연성이 확보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뫼르소는 죽음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하면서 마지막으로 이러한 독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레몽이 그보다 여러 면에서 훨씬 나은 셀레스트와 똑같이 나의 친구라는 게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Qu’importait que Raymond fût mon copain autant que Céleste qui valait mieux que lui?)”(본문 164)

 

이제 제가 읽은 <이방인>은 어떤지 보겠습니다.

 

2. 외모는 험상궂지만, 남자의 의리를 앞세우는 창고관리인인 레몽이라는 사내가 자신의 정부라고 믿고 생활비를 대주고 있던 여자가 있었는데, 실제는 그 여자의 뒤를 봐주는 '기둥서방'이 있었다. 레몽은 자신이 농락당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분노하여 이전에는 결코 손을 댄 적이 없었지만여자를 때려서 쫓아낸다. 그에 앙심을 품은 기둥서방이 레몽에게 복수하기 위해 해변까지 따라오고, 친구인 레몽을 따라 여자 친구와 함께 마송의 해변가 오두막에 놀러와 있던 뫼르소는, 이들의 싸움에 연루된다. 급기야 사람들을 피해 혼자 샘을 찾아왔던 뫼르소는 그곳에서 그 아랍사내와 마주치게 되고, ‘시뻘건햇볕을 피하기 위해 샘 쪽으로 한걸음 더 다가오는 뫼르소를 보고 자신에게 다가온다고 오해한 아랍사내는 먼저 칼을 빼들었고, 다시 뫼르소는 태양 때문에눈을 찔러오는 그 칼날에 위협을 느낀 나머지 무의식적으로 방아쇠를 당긴다. 그리고 약간의 텀을 두고엄마의 장례를 치르며 느꼈던 머리 위 오후 2시의 폭발하는 태양에 어지럼증을 느끼며 몽롱한 상태에서 네 발을 더 쏘아 사내를 죽음에 이르게 만든다. 법정에서 재판장이 왜 그랬냐고 물었을 때, 뫼르소는 정신이 없는 상태에서(검사가 막 사형을 구형한 뒤였던 것이다), ‘자기도 터무니없는 줄 알면서도 그것은 태양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보다시피 앞쪽 1의 줄거리와는 완전히 다른 <이방인>이 아닌가요?(그래서 '우리가 읽은 이방인은 카뮈 <이방인>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노이즈가 아니라). 뒷부분은 제 것(2)을 두고 설명하겠습니다.

 

 

레몽을 따라 해변가에 놀러왔다 연루된 싸움, 이제 레몽과 아랍인과의 갈등은 해소되고, 참을 수 없는 답답함으로 혼자 산책을 나왔던 뫼르소는 다시 샘으로 돌아갔다가 친구인 레몽을 농락했던여자의 기둥서방인 아랍인 사내와 단둘이 마주치게 된 것입니다. 그 상황에서 뫼르소는 단지 뜨거운 태양을 벗어나고 싶어서 사내가 누워있는 샘 가까이로 한 걸음을 더 옮긴 것인데, 아랍남자는 오해하고 먼저 칼을 빼들었고, 그 칼날에 반사된 강렬한 햇빛이 뫼르소의 눈을 후벼 팠기에, 위협을 느낀 뫼르소는 가지고 있던 총의 방아쇠를 무의식적으로 당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보시다시피, 앞의 두 예문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유일하게 달라지지 않은 게 있습니다. 바로 뫼르소가 사람을 죽인 이유, 그것이 태양 때문이었다는 표피적 이유 말입니다. 여기에 이 문제의 핵심이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보다시피 저렇게 두고봐도, 프랑스인이나 우리나 뫼르소가 태양 때문에 사람을 죽였다는 문학적 레토릭을 다르게 받아들일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아무튼 이러한 여러 정황들을 모두 외면한 채, 주인공 뫼르소가 우연히 악한인 레몽을 따라 해수욕을 갔다가 싸움에 휘말리게 되고, 다시 우연히 사내와 단둘이 만나게 되자 태양 때문에총을 쏘고, 급기야 네 발의 확인사살까지 했다고 말하고 있는 게 교수님을 포함한 기존 번역서들의 일관된 시각입니다.

 

교수님, 과연 이게 말이 되나요? 그 어떤 개연성도 없이, 이런 우연만으로 이루어진 소설을 두고 세계인이 열광하고 노벨문학상 위원회에서 현대소설의 전범이라는 극찬을 쏟아냈을까요? 결코 아닐 것입니다. 그건 카뮈에 대한 모욕이고, 노벨문학상에 대한 모독이 될 것입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게 되자, 거기에 부조리라는 말로 포장을 한 게, 기존의 <이방인>이었던 것입니다. 사실 이 소설이 부조리 소설인 이유는 주인공이 그렇게 횡설수설하며 이유도 없이 그냥 태양 때문에사람을 죽이고 항소도 않고 죽음을 받아들여서 그런 것이 결코 아닙니다. 보시다시피 뫼르소의 살해 행위는 충분히 정상참작이 될 수 있는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평등과 정의를 위해 세웠다고 믿었던 법정에서 오히려 사형을 선고하고,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면서 프랑스인들은 충격에 빠졌던 것입니다. 바로 자신들이 발 딛고 있는 세계가 얼마나 부조리한가 깨닫게 된 것이고, 그래서 이 소설을 부조리 소설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http://saeumbook.tistory.com/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이방인 - 개정판
알베르 카뮈 지음, 이정서 옮김 / 새움 / 201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제 번역에 대한 장정일씨의 지적, 

경관이냐, 간수냐?

이 물음은 바로 아래 문장을 두고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À sept heures et demie du matin, on est venu me chercher et la voiture cellulaire m’a conduit au Palais de justice. Les deux gendarmes m’ont fait entrer dans une petite pièce qui sentait l’ombre.

 

위 문장을 김화영 교수는 이렇게 옮겨두었습니다.

나는 아침 730분에 불려 나가서 호송차로 법원까지 호송되었다. 그리하여 간수 두 사람의 지시에 따라 어둠침침한 작은 방 안으로 들어갔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이방인> 김화영 역, 93)

 

경관의 뜻을 가진 gendarmes여기서 처음 나와서 이 장면에만 3번 더 쓰인 뒤 더 이상 나오지 않습니다.

일단 김화영 교수의 위 번역은 한눈에 보기에도 의역이 너무 심하다는 걸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보시다시피 그리하여라는 접속사도 본문에는 없거니와, 카뮈의 문체라고는 흔적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작가의 문체 운운하면 번역이니 그럴 수 있다고들 하니, 정확히 단어만 가지고 이야기하겠습니다. 이 문장을 카뮈가 쓴 쉼표까지 살려서 원본대로 하면, 이렇습니다.

 

아침 730, 사람들이 나를 데리러 왔고, 나는 호송차에 실려 법원으로 인도되었다. 경관 둘이 나를 어둠의 냄새가 나는 작은 방으로 들여보냈다. (새움 이방인 이정서 옮김 115)

 

완전히 다른 느낌이라는 것을 아실 겁니다. 아무튼 본래 문장은 이런 것이고, 여기서 gendarmes를 경관으로 볼 것이냐 간수로 볼 것이냐는 문제인데, 적어도 책을 읽었다면 이러한 질문이 얼마나 허무맹랑한지 알 것입니다. 장정일씨의 저 질문을 받고 이게 무슨 지적거리가 되나 싶어서 김화영 교수본을 찾아보았습니다. 역시 김화영 교수가 저 명민한 장정일조차 바보로 만들어버린 것입니다(죄송합니다). 무슨 소린가 하면, 이방인 본문에는 바로 앞장에 경관과 구분되는 간수gardien’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멀리도 아니고 바로 앞 페이지입니다

 

Lorsqu’un jour, le gardien m’a dit que j’étais là depuis cinq mois, je l’ai cru, mais je ne l’ai pas compris.

 

이 문장을 김화영 교수도 당연히(gardien을 간수라고 보고) 이렇게 옮기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날 간수로부터 내가 들어온 지 다섯 달이 지났다고 하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그의 말을 믿기는 했지만 그 말을 이해할 수는 없었다.

 

장정일은 아마 이러한 김화영의 번역을 보고 착각을 했거나, 아니면 그냥 앞뒤 살펴보지도 않고, 무명의 그자가 틀릴 것은 당연한 일이니, 눈에 들어온 김화영 교수와 다른 한 문장을 떼어내 도착어가 어떠니, ‘프랑스 법제가 어떠니 알은 체를 하며 지적을 해온 모양입니다.

참고로 저는 이 문장을 이렇게 옮겨두고 있습니다.

 

어느 날 간수가 내게 다섯 달이 지났다고 말했을 때, 나는 그 말을 믿었지만, 받아들이기는 힘들었다. (새움 <이방인> 이정서 옮김 113)

 

카뮈는 아마 사후 60년이 지나 바다 건너 이 머나먼 타국에서 벌어질 이러한 논쟁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가를 깨닫게 해주기 위해 이런 식으로 문장 구성을 해두었는지도 모릅니다.

무슨 소린가 하면, 카뮈는 문장 중 중의적으로 의견이 엇갈릴 수 있을 소지가 있는 단어는 (이건 그런 차원도 못 되지만) 반드시 앞, 혹은 뒤에서 다른 표현을 곁들여 그 오해의 소지를 없애주고 있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만약 이것이 간수가 되려면 실지 감방에서 죄수를 관리하는 간수를 가리키는 gardien에 대해 달리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카뮈가 gendarmesgardien를 구분해 쓴 이유까지도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장정일은 저보고 카뮈 번역으로 명성을 쌓은 김화영의 <이방인>에서 무려 58개 항목의 오역을 발견했다고 주장한다고 하는데, 저는 역자노트에 실은 58개의 넘버링은 그냥 상징적인 것일 뿐 김화영 교수 번역은 죄송스럽게도 보다시피 거의 전부가 잘못되어 있다고 누누이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한때 장정일의 독서노트등을 들척이면서 가끔씩 보이던 그 명민함에 고개를 끄덕이던 시절이 있었는데, 장정일씨의 지금과 같은 모습을 보면, 25년 오역의 세월이 정말이지 무섭긴 무서운 것이구나, 하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낍니다. 씁쓸할 따름입니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위증가 2014-04-23 09:04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리뷰코너 아래에 있는 'jaibal'님의 문제 제기에 답하시는 것이 먼저인듯요.
 

 

 

 

 

 

 

오늘 다시 제 번역서를 두고 장정일씨가 “‘이방인번역 비판의 99%는 자의적 해석과 생트집이라는 글을 썼네요. 한겨레신문이 한권의 번역서 <이방인>을 두고 10일 사이 6번째 내보내는 관련 기사입니다. 휴일을 빼고 거의 매일이다시피 한데, 도대체 왜 그러는 걸까요? 더군다나 이 엄중한 시국에. 그들은 저보고 처음에 도를 넘는 노이즈마케팅이라고 했습니다. 솔직히 저는 억울했습니다. '우리가 읽은 이방인이 카뮈의 이방인이 아니다'라는 카피 하나가 무슨 노이즈 마케팅이라니...

 

다음에는 필명을 문제삼았습니다. 도덕성이라는 가장 무서운 칼날을 들이대었습니다. 제가 필명을 쓴 이유는 같은 출판인끼리 남의 번역서를 비판하는 것이 오히려 독자들 눈에 '부도덕하게' 비칠까봐여서였는데... 그것이 왜 문제가 되어야 하는지 지금도 모를 일입니다. 다시 필명을 인정하고 사과하자, 이번엔 영어판을 두고 했으니, 사기 번역이라는 것입니다. 역시 번역과정을 세세히 공개했습니다.중역과 참고는 다르다고... 

 

노여움을 모르는 바 아닙니다. 충분히 이해하고, 한때 흥분했던 제 방식도 많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어찌하면 이 혼란스러운 상황을 정리할 수 있을지, 매일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연일 같은 내용의 기사가 이름만 바꿔가며 나오는 형국입니다. 아침마다 각오를 다지지만  솔직히 힘든 게 사실입니다.

 

어찌해야 좋을런지... 진심으로 여기 님들의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고 기자님, 그런데 논쟁을 끝내기 위해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 또 한겨레신문에서 관련기사를 올렸다는 지인의 메시지가 도착했네요. 한 권의 번역비평서를 두고 사회적 공기인 일간 신문이 10일 사이에 내보내는 5번째 기사인가요? 그 기사는 보지 않겠습니다(제게 노이즈 마케팅의 너울을 씌우셨는데 이쯤 되면 노이즈 마케팅을 하고 있는 건 오히려 그쪽이 아닐는지요?). 시간이 지나면, 한겨레신문사의 친절한기자들이 얼마나 역사의 진보를 늦추는 데 일조했는지, 다시 신문이 기록하게 되겠지요.

 

주변의 모두는 말합니다. 제게 그만 조용히 있으라고. 신문과 싸워서 될 일이냐고. 소란은 멈추고 차츰 책을 읽은 독자들이 알아봐줄 거라고. 그러나 저는 그러지 않을 생각입니다. 악법도 법이라고 말한 그분,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진심으로 고언해준 제자들의 말을 뿌리치고 독배를 마신 그분처럼 저 역시 도망칠 생각은 없습니다. 왜 꼭 그래야 하냐고 물으신다면 역시 그처럼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일을 스스로 깨닫고 그 느낌에 충실하게 행동하고 싶기 때문이라고.“

 

-<이정서의 사과- 한겨레신문 고 기자님께 중에서http://saeumbook.tistory.com/436

 

 

 


댓글(14)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위약가 2014-04-22 0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우리가 읽은 이방인이 카뮈의 이방인이 아니다'라는 카피와 컨셉은 무슨 마케팅 전략일지요? 아무 생각없이 넣지는 않았을텐데요. 설마.. 니치마케팅?

정서 2014-04-22 0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정도의 카피는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책과 상품에는 나름의 포인트가 있는 것이고, 그것이 너무 과장되거나 악의적이라고 하면 독자가 먼저 거부할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그 카피가 문제될 수준은 아니었다고 봅니다.
예컨대, 더이상의 '대하소설은 없다. 이전 것은 모두 잊어라' 라고 한다고 조정래씨를 이용해 노이즈한 것 아니지 않겠습니까?
더불어 마케팅은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아무리 의미 있는 책을 내도 그것을 제대로 홍보하지 못하면 독자들의 손에 들어가기는 요원해지는 것입니다. 모조록 넓은 마음으로 이해하시길...

2014-04-22 11: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4-22 11: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4-22 16: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4-23 07: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4-23 08: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4-23 09: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4-22 12: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4-22 16: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4-23 09: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4-23 10: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Lumi Lee 2014-04-27 17: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 정도의 카피라니... 어이가 없네요. 어떤 의미로 금방 느껴지는지 아세요? 김화영번역은 엉터리고 내 번역이 옳다는 뜻이며 이미 이방인 김화영본으로 깊은 감동을 느낀 모든 사람들을 머저리로 만드는겁니다. 듣보잡 번역가가 난데없이 나와 교만을 떠니 이것도 한국병중 하나로 보이네요.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카피.. 2014-05-15 1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설마 이 카피와 조정래 작가의 그 카피가 같은 선상에 설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죠...?
 
이방인 - 개정판
알베르 카뮈 지음, 이정서 옮김 / 새움 / 201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다시는 이런 논쟁에 개입하고 싶지 않았는데...

한겨레신문이 10일중 5일째 이방인 기사를 써대네요.

노이즈는 도대체 누가하고 있는 걸까요?

제가 변명할 수 있는 방법은 이것밖에 없네요.

 

http://saeumbook.tistory.com/43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