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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르미날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21
에밀 졸라 지음, 박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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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딜 수 없이 뜨겁고 한없이 어둡고 다시 극단적으로 추운 공간을 상상합니다. 

격하게 기침을 해대는 노인의 까만 가래가 떠오릅니다. 앙상한 팔다리로 검정을 캐는 성실한 소녀가 보입니다. 이제 막 그곳에 내던져진 어느 실업자의 우울한 얼굴이 그려집니다. 고개를 드니 그런 얼굴을 한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아서 도리없이 절망하는 심정이 됩니다. 절망감은 차갑고 고통스럽고 질깁니다. 저는 그저 상상만 했을 뿐인데도 손톱 밑이 파랗게 질립니다. 

다시 한 번 춥고, 고통스럽습니다. 


거대한 지옥이 있습니다. 

지옥은 욕망의 뱃속으로 매일 인간들을 집어 삼킵니다. 저기 어딘가 신(神)인 척 군림하고 있는 자본은 점점 더 가혹하게 그들을 쥐어짜고, 부조리 앞에서도 그들은 분노할 줄도 모르고 묵묵히 임무를 수행할 뿐입니다. 체념이 몸에 밴 그들에게 희망이나 미래 따위가, 있을 리 없습니다. 그들의 미래, 자식들에 대해서는 그저 밥만 축내지 말고 얼른 커서 함께 뱃속으로 들어가 (보잘 것 없는, 터무니 없이 적은)돈을 캐오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렇게라도 해야 굶어죽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절망적인 삶이라니요!


다들 탄광에서 차례로 죽어간 것처럼 그 아이들도 결국 그렇게 되겠지. -2권, 359쪽


마외 가족은 대대로 석탄을 캤습니다. 탄광의 주인들이 배를 불리고 풍요로운 생활을 영위하는 동안 탄광 노동자들의 형편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마외 가족 역시 그러했죠. 아버지,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까지 살펴보아도 이 가족의 삶은 그대로입니다. 매일 노예의 삶을 살고 굶주림에 시달리면서 곧 쓰러질 것 같은 노인이 혹여 일을 못하게 되는 건 아닐지 걱정할 따름입니다. 그가 벌어오는 몇 푼 되지 않는 돈이나마 이들 가족에게는 아주 소중해요. 그마저 없다면 당장 내일을 예측할 수 없습니다. 빚은 나날이 쌓입니다.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부잣집으로 구걸을 하러 다녀야 하는 순간도 곧 올 겁니다. 일찍이 여자를 안 장남이 결혼이라도 한다면 그의 수입마저 바랄 수 없게 되겠죠. 이들은 매일 죽어라 일하지만 제자리 걸음입니다. 뼛속까지 내려앉은 체념과 헤어질 줄 모릅니다.  




그들의 삶 안에 청년 에티엔이 들어옵니다. 운명과 같은 우연에 이끌려 마외 가(家)의 노인과 대화를 나누고, 마외 가의 가장과 만나고, 큰 딸과도 만납니다. 그들 덕분에 취직을 하게 되지만 청년은 이미 그곳에 낮게 깔린 깊은 좌절감을 함께 느낍니다.  


그 시각, 청년은 자신의 주변 어디에서나 끝 간 데 없이 내리깔린 절망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1권, 17쪽


그는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동료들은 매일 죽도록 일을 하는데 터무니없는 돈을 받고 가난에 붙박혀 있어요. 반면 그들을 통해 배를 불리는 사람들은 따로 있고요. 그들이 동료들의 고혈을 빼먹는 우리의 적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도다시 두꺼운 커튼과 안락한 소파를 비롯한 호사스러운 가구들을 힐끔거리며 둘러보았다. 그중에서 하찮아 보이는 장식품 하나만 내다팔아도 그들이 한 달 동안 먹을 수프를 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1권, 344쪽


자유가 있다고 저들은 말합니다. 자신들의 삶을 제 힘으로 일으킬 수 있는 기회가 있다고 말합니다. 아, 자유를 가장한 속박은 얼마나 더 잔인한지. 노동자들에게 있는 자유란 '굶어죽을 자유'에 불과하겠지요. 


부르주아들은 노동자들이 자유의 몸이 되었다고 선언했을 뿐 그들의 삶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랬다. 그들은 마음대로 굶어죽을 수 있었고, 실제로도 그 자유를 마음껏 누렸다. -1권, 226쪽


그래서 그는 공부를 하고 동료들에게 변화를 요구합니다. 파업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심고 우리 삶을 바꾸자고 말합니다. 그렇게 끝내 폭발하고 만 노동자들의 분노로 소설은 가득차 있습니다. 실제로 그런 분노가 노동권이라는 개념이 이제 막 싹트기 시작할 무렵에 그들의 땀과 눈물, 그들이 쏟은 피로 보다 진보한 사회를 다음 세대에 물려주었습니다. 저는 아주 자주 우리가 얼마나 많은 피 위에 맺힌 열매를 먹고 있는지 몸서리 치도록 생생하게 생각하곤 합니다. 그래서 이 소설이 이토록 마음 아프고 뇌리에 남았는지도요. 


현실은 언제나 가혹해서 가난한 자들이 겨우 품었던 희망조차 쉽게 허락하지 않습니다. 파업은 실패로 끝나고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가져갑니다. 좌절감이 팽배하고 믿었던 것에 대해 불신도 해요. 그렇지만 파업 이후의 삶은 이전의 삶과는 결코 같아지지 않습니다. 에티엔을 떠나보내는 라 마외드의 결연함은 모든 것이 변했음을 알려줍니다. 겉으로는 아무것도 변한 게 없어보이지만, 여전히 터무니없는 급여에 죽도록 일을 하지만, 당장 내일 끼니를 걱정해야 하지만, 언젠가 '그날'이 오리란 걸 우리 모두는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성장이자 사회의 성장입니다. 변화는 시작됐고, 이미 변화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렇게 조금씩 자라나는 것이겠지요. 


아! 자라나고 있었다. 조금씩 자라나고 있었다. -1권, 262쪽


작품 속에서 저는 뜨거운 희망과 깊은 절망 사이를 몇 번이나 오갔습니다. 백 년도 넘은 이야기가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에 몸 떨었습니다. 인간이란 어쩔 수 없이 그런 존재일까요. 그렇지만 말이에요. 깊은 절망 틈에 뜨겁게 희망했던 이유는 다름 아닌 이 작품의 존재였습니다. 민중의 삶을 성실하게 기록한 이 이야기, 21세기를 사는 우리가 이 이야기를 만났다는 것 그것만이 희망이고 변화의 씨앗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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