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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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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여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 윤동주, '쉽게 쓰여진 시' 중에서

 

때때로 '평화'에 대해 생각합니다. 어른 손을 잡고 유치원 가는 아이들과 철마다 모습 바꾸는 나무들, 뭉게구름과 고추잠자리 같은 것들. 공원을 산책하는 사람들과 그들의 소곤거림, 신체에 대한 어떤 강제나 억압도 없고 자유와 권리에 대해 당연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공기, 어디서 시작된, 어떻게 구축된 '평화'인지 궁금해 할 틈도 없는 그런 '평화'에 대해 말입니다.

요즘 같은 계절에 맹렬하게 우는 매미 소리를 듣고 있으면 또 그렇게 평화를 생각하다 시간이란 개념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기억과, 나라는 존재 단둘만 그 자리에 남곤 합니다. 내 속에 쌓인 내 부모들의 피와 그 부모들의 피와 그 부모들의 피... 그 안에 아로새겨진 과거를 조금 선명하게 느끼는 순간 나는 보이지 않는 먼지처럼 작아지는 걸 느껴요. 역사란 그토록 거대해서 먼 곳에만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여기, 완전히 다른 곳에 있다고 말이죠.

 

하지만 우리가 딛고 선 평화 - 과연 현재에도 완벽한 '평화'를 이야기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잠시 접어두기로 합니다. 과거에 있었던 압도적인 상황과 지금은 분명 차원이 다르니까요. - 를 한 꺼풀만 걷어내도 알 수 있습니다. 그곳에 선연한 핏빛 기억이 채 위로도 받지 못하고 빳빳하게 고개 들고 있는 걸 볼 수 있어요. 아직 해결되지 않은 과거들, 새카만 가슴을 안고 겨우 살아내고 있는 사람들이 여전히 곁에 있다는 걸 실감하게 됩니다.

정형화되는 혹은 왜곡되는 과거의 기억들 때문에 고통 받는 건 그들뿐이 아닐 겁니다. 우리만이 아닐 겁니다. 해결되지 않는 것들은 반드시 곪아 터지기 마련이니까요. 내 피에 새겨진 경험들이 그대로 자식들에게, 또 그 자식들에게 전해지겠지요. 이대로라면 그들 역시 과거에 산 사람들과 똑같이 고통 받을 겁니다.

그러고 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평화가 그 양이나 질적인 면에서 결코 기대만큼 팽창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슬프고, 미안한 일입니다. 그래서 자꾸만 윤동주의 시가 생각납니다.

 

체육관이 있습니다. 감히 상상할 수 있다고 결코 말 못하는 경악스러운 광경이 체육관 안에 있습니다. 사람들이 있습니다. 밀려들어오는 시체들을 기록하고, 닦고, 체육관에 눕히는 사람들은 모두 어제까지도 평범했던 시민들입니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그런 험한 일을 맡았습니다. 아무리 양초를 태워도 지워지지 않는, 지워지기는커녕 점점 심해지기만 하는 부패한 냄새 속에 평범한 사람들이 그들을 위로합니다. 시체들은, 어제까지 평범한 사람들이었던 그 시체들은 누구의 총에 죽었나요. 누가 총을 쐈나요. 누가 총을 쏘라고 명령했나요.

 

죽어서도 자기 몸 곁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과 살아서도 제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담담한 목소리 안에 들어있는 공포와 질문이 낱낱이 만져집니다. 그것들이 너무나 가깝게 느껴져서 공포를 느끼고 질문을 하는 사람이 다름 아닌 나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나는 2014년 여름에 있지만 1980년 5월에 시청 앞에 나가 총 맞은 친구를 두고 도망쳤다가 그 친구를 찾으려 시체를 보관하던 체육관에서 지내다가 친구를 따라 죽고 만 소년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 화자가 들려주는 같은 날의 기억은 도처에서 강렬하게 펼쳐집니다. 그리고 저는 언제나 '어머니'에서 눈물이 납니다. 애지중지 키운 착한 막내아들이 아까워 반쯤은 넋이 나가 더운 여름에도 추위 타는 몸속에 사는 어머니("몸이 추와서 글제. 여그가 얼마나 따땃한지 아냐. 삭신이 따땃해야." - 180쪽)에서, 밥을 먹고 일상을 지내는 평범한 일이 괴롭고 미안한 어머니("목숨이 쇠심줄 같어서 너를 잃고도 밥이 먹어졌제. - 187쪽)에서, 젖먹이였던 어린 아이의 웃음을 떠올리며 어쩔 줄 모르는 어머니("어쩌끄나, 젖먹이 적에 너는 유난히 방긋 웃기를 잘했는디. - 191쪽)에서 얼마나 눈물이 났는지.

 

이 소설을 얼마나 힘들게 읽어야 했는지 모릅니다. 지하철에서 울다가 서둘러 내리기도 하고, 혼자 있는 집 안에서조차 차마 소리 내어 울 수 없어 숨죽이기도 하고 말이죠. 하지만 저의 이런 경험은 불과 몇 십 년 전 있었던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겠지요.

 

공선옥 작가가 말했습니다. '광주는 아직 얘기되지 않았다'고요. 더 늦기 전에, 완전히 늦어버리기 전에 계속 얘기되어야 할 뼈아픈 이야기를 피하지 않고, 공부하고, 더 열심히 기억하겠다고 다짐합니다.  

 

 

예전에 우린 깨지지 않은 유리를 갖고 있었지. 그게 유린지 뭔지 확인도 안해본, 단단하고 투명한 진짜였지. 그러니까 우린, 부서지면서 우리가 영혼을 갖고  있었단 걸 보여준 거지. 진짜 유리로 만들어진 인간이었단 걸 증명한 거야. - 130쪽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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