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오류
뤼디거 샤헤 지음, 박성원 옮김 / 열음사 / 2009년 11월
평점 :
절판



 헬라적 사고에 따르면 인간은 영혼과 육체로 구성된다. 마음(내용 이해의 편의를 위해 영혼 대신 마음이라 칭함.)은 육체를 지배한다. 이 마음은 다시 두 가지로 나뉜다. 감정과 이성이다. - 일반적으로 심적 요소를 지성(知性), 감정(感情), 의지(意志). 이렇게 세 가지로 나누지만 여기서는 내용 진행을 위해 감정과 이성으로 구분한다. - 그 두 가지가 생의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인간의 행동을 결정한다. 그런데 종종 감정과 이성의 대립으로 마음은 오류를 일으킨다. 그 오류에 지나치게 매달리면 육체, 즉 행동도 오류를 일으키게 된다. 행동에 오류가 일어나면 삶은 그만큼 복잡해진다. 그렇기에 마음의 오류를 잘 파악하고, 정체를 벗겨내야 삶에 평화가 생긴다.

 

 이 책은 인간의 마음에 생기는 오류를 살펴본다. 그 원인을 진단하고, 그것을 바로잡는 법을 제시한다. 이 책에서 말하는 마음의 오류는 무의식, 두려움, 사고, 욕구, 내적갈등, 정념, 자기기만이다. 이것들은 인간의 의식을 가리는 베일처럼 작용하는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용하여 인간의 행동을 결정하는지 알려준다.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대하고, 바로잡을 수 있는지 설명한다. 그러한 내용을 통해 자신 안에 일어나는 마음의 오류는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단지 그것을 잘못 대할 때 문제가 발생 할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이 책에서 제시하는 분석과 진단, 해결법으로 자신의 마음의 오류를 대한다면 더 이상 잘못된 결정으로 자신을 이끌지 않게 될 것이다.

 

 인간은 때때로 마음의 오류를 일으킨다. 마음의 오류가 일어날 때 그것을 죄악 시 하거나 정당화 한다. 그것에 당황스러워 하기에 그러한 일들이 발생하는 것이다. 마음의 오류 자체는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인간은 완벽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누구나 오류를 일으키니 오류 자체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다만 그것을 어떻게 대하고, 어떻게 매듭짓는지가 중요하다. 마음의 오류를 피하거나 그것이 이끄는 대로 끌려가면 원하지 않는 결과를 맞이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마음의 오류에 당황하지 말고, 그것을 자연스럽게 대할 때 우려하는 최악의 행동의 오류까지 나아가지 않을 것이다. 마음의 오류를 잘 다스리면 삶은 좀 더 원만해질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나님이냐 돈이냐 - 그리스도인의 선택 - 두 주인 자끄 엘륄 총서 3
자끄 엘륄 지음, 양명수 옮김 / 대장간 / 200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그리스도인이 신앙생활을 하며 직면하는 여러 어려움 중 가장 큰 어려움 하나는 하나님이냐 돈이냐를 놓고 저울질 하는 것이다. 물론 항상 하나님을 선택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때론 하나님보다 돈을 택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쉬운 예를 들면 십일조를 하지 않으려 한다거나  주일에 특근을 하는 등 돈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일이 닥칠 때 자의든 타의든 돈을 택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삶의 모든 순간에서 하나님을 택해야 하는 것이 맞지만 모든 상황이 그것을 허락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대안으로 하나님과 돈에 대한 명확한 신학적 지식과 신념을 갖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돈을 택할 때마다 자책감과 죄책감에 빠져서 신앙 마저 흔들리게 될 것이다.

 돈이란 무엇인가? 사전적 정의로 돈은 이렇다.

 "상품의 교환 가치를 나타내며 상품 교환을 매개하고 가치 저장의 수단이 되는 물건"

 돈은 단지 수단일 뿐이다. 그러나 돈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단을 넘어 목적이 되었다. 돈을 많이 소유하는 것이 부와 성공의 상징이 되었다. 심지어 돈은 만물의 가치척도가 되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더 많은 돈을 쌓기 위해 전력투구를 하였다. 돈의 노예가 된 것이다. 다시금 질문을 해본다. 돈이란 무엇인가? 기독교에서는 그것을 의인화하여 '맘몬'이라 부른다. - 그것의 신학적 어원과 정의, 그 단어 사용의 당위성 등은 글의 논점이 아니기에 차치하고 - 맘몬은 곧 하나님과 맞서는 적이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게 유혹하는 암적인 존재이다. 하나님에 대항하는 또 다른 절대권력의 상징이다. 그렇기에 세상 사람들은 이미 그것의 노예가 되었다. 그리고 맘몬은 아직 노예가 되지 않은 유일한 사람들인 그리스도인들을 자신의 노예로 만들기 위해 시시탐탐 기회를 노린다. 일부는 결국 그 노예가 되었고, 나머지는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 대항하고 있다.

 성경적으로 돈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그것은 자크 엘룰의 '하나님이냐 돈이냐'에서 잘 다루고 있다. 구약성경에서 바라보는 부에서부터 시작하여 하나님과 돈 사이에서의 선택의 문제, 돈에 대한 교육 등 그리스도인으로서 돈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성경적으로 잘 답해준다.  자크 엘룰이 제시하는 돈에 대한 정의가 어떻게 보면 지나치게 보수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혹 그런 느낌이 든다면 그건 바로 자신이 돈에 대해 경계를 느슨하게 하고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그런 느낌이 든다면 자신의 재물관에 대해 다시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 물론 4, 5장에 대해서는 좀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만 2, 3장에 대해서는 의심에 여지가 거의 없다. 그러니 자크 엘룰의 책을 통해 자신의 돈에 대한 관점을 점검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나님과 돈에 대한 관점을 바로 세우지 않고 하던 대로 신앙생활을 한다면 언젠가 하나님과 돈을 저울질 하게 될 때 단번에 하나님을 선택하지 못하고, 어느 쪽을 선택 해야 할지 망설이게 될 것이다.

 이제 오늘만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이제 돈은 매개 수단을 넘어 성공의 척도가 되었다. 그 자체가 가치이고, 심지어 한 사람의 도덕성의 기준이 되기도 한다. 아무리 악행을 저지른 인물이라 하더라도 돈으로 많은 것을 베풀면 악행을 어느 정도 눈감아 준다. 이제 돈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생각 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참으로 통탄 할 노릇이다. 돈으로 인해 인간성을 상실한 것이 아니라 돈이 인간성을 집어 삼켰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이 돈을 대함에 있어 각별한 주의가 요구된다. 하나님과 돈은 상극이기에, 돈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기에 그것에 대한 신념 있는 자세와 발언은 곧 어떠한 의미에서 죄인으로 낙인 찍힐 수 있는 원인이 된다. 그럼에도 그리스도인은 돈에 대한 신념과 일관성 있는 자세를 더욱 견지해야 한다. 하나님과 돈을 선택해야 할 때 당연히 하나님을 선택해야 한다. 돈에 대해서는 융통성이 없어야 한다. 돈에 대한 미적지근한 태도는 곧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 상실을 가져온다. 그러기 위해서는 돈에 대한 성경적인 바른 관점이 요구된다. 돈이란 무엇인지, 그것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하나님께서 그것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고 계신지 바로 알고, 그분이 원하시는 대로 돈을 대하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의 참 위로되신 하나님
한나 W. 스미스 지음, 이영배 옮김 / 하늘산책 / 2009년 10월
평점 :
절판



 하나님은 인간의 참 위로자이시다. 그러나 인간은 다른 곳에서 위로를 얻으려 한다. 다른 사람, 다른 물건, 다른 장소. 하나님이 아닌 것으로부터 위로를 얻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다른 것이 주는 위로는 참 위로가 아니다. 혹 그것들이 위로를 주더로다 그것은 가짜인 까닭에 위로를 받는 것처럼 느낀다. 그것도 잠시 잠깐 말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참 위로를 주시고, 참 평안을 주신다.

 

 한나 휘톨 스미스는 19세기의 잔느 귀용으로 불린다. 우리나라에 잔느 귀용은 꽤 알려져 있지만 한나 휘톨 스미스는 별로 알지지 않은 인물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한나는 평생 두 권의 책밖에 쓰지 않았다. 그것은 '나의 참 위로되신 하나님'과 '그리스도인의 행복한 삶의 비밀'이다. 그렇기에 상대적으로 덜 알려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론 책의 수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훌륭한 사람은 그 업적만으로도 유명해지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선한 영향력을 끼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사람이 알려지는데 책과 같이 눈에 띄는 성과물만큼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도 없기에 그녀의 우리나라에서의 인지도에 이해가 간다. 어쨌든 그녀는 비록 두 권의 책밖에 남기지 않았지만 그 책들을 통해서 상당히 깊은 여운을 준다. - 그 내용의 신학적 당위성은 차치하고 봤을 때

 

 한나는 '나의 참 위로되신 하나님'이라는 책을 통해 신자의 마음 상태를 지적한다.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마음의 자세를 질타한다. 하나님이 계신데 왜 다른 것으로부터 위로를 찾는지, 하나님이 계심에도 왜 불안해하고, 불만스러워 하는지 지적한다. 신자의 잘못된 행동과 상태를 거침없이 질타하고, 바른 자세를 갖도록 독려한다. 그녀가 주는 질책, 도전과 위안은 신자의 눈과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리기에 충분하다.

 

 앞에서 인간의 잘못된 행태를 지적하였다. 왜 그러한 문제가 발생할까?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으로부터 위안을 찾는 것은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이다. 하나님을 없다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도 문제 해결이 가능하다는 교만이다. 우리의 풍요는 오직 하나님만으로 가능하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쉼터이다. 오직 하나남만이 우리의 불만과 불안을 잠재우실 수 있다. 하나님께 기대는 것은 결코 수치가 아니다. 결코 무기력의 표현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마음의 적극적인 표현이다. 오히려 자랑이고, 참된 행동이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지음 받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본원이 하나님께 있기에 우리는 그분으로부터만 모든 것을 충분히 공급 받을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공병호의 내공 - 뿌리 깊은 나무처럼
공병호 지음 / 21세기북스 / 200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공은 무협소설이나 무협영화에 주로 등장했다. 즉 그것은 특수한 상황에만 통용되던 단어였다. 그러나 이제 내공이라는 말은 비교적 일반적인 말이 되었다.우리는 한 연기자의 연기를 보고 '연기 내공이 부족하다'고 말한다. 물론 무협지에서 등장하는 내공과 예를 든 내공의 정의가 100%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제 내공이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사용한다. 그렇다면 내공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사전에 등재된 말은 아니다. 아직 학계에서는 그 존재가 인정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따라서 무협지에서 사용되는 대로 간략히 정리하면 '몸 속에 흐르는 기' 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정확히 말한다면 좀 더 길어지고, 복잡 해질 것이다. 어쨌든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내공은 어떠한 것을 충분히 혹은 남들보다 뛰어나게 발휘하게 하는 원천, 그것을 돕는 경험이나 지식, 정보 등을 총칭하는 말이다. 이제 내공은 도인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두가 갖을 수 있는 무엇이 되었다. 따라서 내공을 쌓으면 자신의 분야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는 내공인으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공병호의 내공'

 

 이 책에서 저자는 전문가와 내공인을 다르게 분류한다. 전자가 한 분야를 상, 중, 하로 나누었을 때 상급을 차지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그 상급 위를 차지하는 이를테면 특상급에 해당하는 것이다. 전문가는 소수가 되는 것이라면 내공인은 그 소수 중에서도 또 소수가 되는 것이다. 저자는 그러한 내공인의 특성과 그것이 되는 방법 등을 설명하고 있다. 왜 전문가가 아니라 내공인이 되어야 하는지 조리 있게 설득하고, 그것을 향해 나아갈 것을 독려한다.

 

 전문가가 되는 것은 무척 어렵다. 그 위에 있는 내공인이 되는 것은 더 어렵다. 많은 이들이 전문가의 문턱에도 못 미치고, 자신의 직무를 내려놓는데 그보다 더 되기 힘든 내공인으로 까지 나아갈 필요가 있을까? 전문가만 되도 충분한 보상과 명예가 따르는데 굳이 내공인이 되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사람은 목표를 높게 잡으라고 했다. 목표를 낮게 잡으면 그것을 잡지 못했을 경우 목표보다 더 낮은 곳에 머무른다. 하지만 목표를 높게 잡고, 그것을 잡지 못하면 낮은 목표보다 훨씬 더 높은 곳에 머문다. 즉 목표의 높이에 따라 달성 결과가 달라진다. 따라서 자신의 목표를 내공인에 두었을 경우 설령 그것에 이르지 못했다 하더라도 얻는 것이 많다.

 

 내공인이 되기 위해서는 기초 체력이 튼튼해야 한다. 그것은 단기간에 쌓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충분한 시간과 지속적인 노력을 들여야 한다. 그것이 쌓이고 쌓이면 내공인이 되기 위한 기초가 마련된다. 단지 기초만 튼튼하다고 내공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튼튼한 기초를 바탕으로 남들보다 더 많은 경험과 지식, 예리한 감각이 필요하다. 그리고 목표에 대한 끊임없는 도전과 의욕을 유지해야 한다. 적절한 긴장감을 갖고 있어야 그것들이 유지된다. 이러한 요소들과 그 외의 여러 요소들이 조화를 이룰 때 내공인이 될 수 있다. 내공인은 분명 스스로 되는 것이다. 물론 적절한 행운도 따라야 하지만 행운도 보는 눈과 잡을 수 있는 손이 없다면 잡을 수 없다. 그렇기에 내공인은 자신의 습관과 노력으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나의 목표는 내공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지금 있는 곳보다 조금 더 높은 곳에 머무는 것이 나의 목표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내공인이 되고 싶다는 욕심이 있다. 부와 명예를 거두고 싶은 마음에서가 아니라 이왕 세상에 난 김에 세상에 나의 족적을 깊게 남겨 나의 존재성을 알리고, 그것으로부터 찾고 싶다는 인간의 근원적 욕망 때문이다. 단순한 동물로서 먹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먹고 싶기 때문이다. 나의 존재 목적, 삶의 이유를 찾고 싶기 때문이다. 그것을 좀 더 높은 곳에서 찾으려는 것이다. 내공인이 된다면 그것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 때문이다. 물론 저자는 내공인이 되어야 할 이유를 다르게 주장하지만 각자의 이유는 다르니까 나름의 이유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

 

 자,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시작점에서 남들보다 조금 더 지나쳤지만 결승점에 이르기까지는 아직 충분한 시간이 있다. 지금부터 차근차근 준비하여 내공을 쌓아간다면 나도 내공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승자가 웃는 것이 아니라, 웃는 자가 승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윈은 세상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 1859년의 과학과 기술
피터 매시니스 지음, 석기용 옮김 / 부키 / 2009년 11월
평점 :
절판


 1859년. 세상을 뒤흔들 한 권의 책이 출간된다. 역사를 바꾼 그 책은 바로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On The Origin of Species)’이다. 이 책으로 인해 종교의 시대는 저물고, 과학의 시대가 도래하게 된다. - 물론 종의 기원이 그 시작은 아니지만 촉매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하다. - 종교의 시녀에 불과하던 과학은 이제 종교와 비등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지금은 과학이 조금 더 높은 보좌에 앉아있는지도 모른다.

 세상의 변화는 단 한 가지 일로 일어나지 않는다. 수많은 작은 일들이 한데 뭉쳐 복합작용을 일으킨다. 그 결과가 세상의 변화로 나타나는 것이다. 종의 기원이 세상의 변화에 큰 촉매 역할을 하였지만 그것이 탄생한 해에 작지만 큰 변화를 일으킬 작은 일들이 무수히 일어났다. 그동안 종교적으로 지구의 나이는 6000년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1859년, 이제 지구의 나이는 46억년으로 급격히 나이를 먹게 된다. 그 해에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세계 최대의 운하인 수에즈 운하가 착공 되었다. 브래지어가 특허로 등록되는가 하면 대륙을 잇는 해저 케이블 개설이 시도된다.

 ’다윈은 세상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이 책은 다윈의 종의 기원이 탄생한 1859년 한 해에 일어난 많은 일들을 담고 있다. 서구의 과학과 기술의 변화에서부터 사회와 생활의 크고 작은 변화를 그리고 있다. 이 책은 마치 아침 신문을 읽는 기분을 준다. 신문에는 유심히 읽어 볼 기사와 쉽게 지나칠 기사가 담겨 있다. 이 책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어떠한 내용은 지루한 감이 있고, 내용이 너무나 잡다하여 신문에서 관심 없는 기사는 넘어가 버리듯 그냥 지나칠 사건들도 많다. 하지만 당시의 작은 도전과 변화로 인해 오늘 우리가 어떠한 삶을 누리고 있는지 생각하며 읽는다면 참으로 재미있는 책이 될 것이다.

 대개는 큰 사건이 세상에 크고, 중대한 변화를 가져온다. 그러나 세상의 진정한 변화는 보이지 않는 작은 일들이 주도한다. 작은 일들이 곳곳에서 작은 변화를 가져온다. 그것이 세상 전체의 변화를 일으킨다.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우리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일상은 그러한 별로 중요하지 않은 과거의 일의 결과이다. 그 당시에는 놀라운 변화였고, 도전이었지만 오늘 우리에게는 하찮은 일이다. 일상화되었기 때문이다. 자신도 모르게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제의 변화가 오늘의 일상을 만드는 초석이 된다.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중요하지 않은 당시의 일들이 역사에서는 중요한 일들로 기념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오늘 나의 작은 일이 내일에는 예상치 못할 큰 변화를 가져 올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심한 비약이긴 하지만, 어쨌든 오늘의 일은 과거의 결과이고, 미래의 일은 오늘이 원인이기에 오늘을 사는 우리의 몇몇 작은 행동에도 정성을 다해야 하지 않을까? 비록 지금 당장에는 하찮게 보이는 일일지라도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