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칩에 숨겨진 사단의 전략
장죠셉 지음 / 크리스천리더 / 2012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예수님이 감람 산 위에 계실 때 제자들이 그분께 물었다.

 

 "... 주의 임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마 24:3)

 

 이에 예수께서는 종말에 각종 재난과 성도에 대한 미혹 등이 있을 거라 말씀 하셨다. 이 말씀은 1차적으로는 예루살렘 멸망을 예언하지만, 동시에 세상의 종말을 예언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의 상황을 두고 이제 마지막 때가 가까워 오지 않았나 예상한다. 종교와 민족의 분열과 반목으로 각종 테러가 일어나 무고한 사람들의 희생이 늘고 있다.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는 일이 끊이질 않는다. 가장 최근에는 중동에서 전운이 감돌고 있다. 수년 사이에 이상 기후로 인한 자연 재해가 계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쓰나미, 태풍, 엄청난 규모의 토네이도가 발생하여 사람들을 놀라고 두렵게 한다. 심각한 가뭄과 자연 재해로 전세계 곡물 생산량이 줄었다. 이로 인해 다음 달이면 국내에 애그플레이션이 발생 할 것으로 예상 할 정도이다. 다른 시대보다 화산 폭발과 지진이 자주 일어나고 있다. 세계 곳곳에서 자연이 요동치고 있다. 자칭 사도라 칭하는 자들이 거짓 계시로 성도들을 미혹하고 있다. 거짓 선지자들이 사람들을 진리에서 멀어지도록 하고 있다.

 이 시대에는 예수님의 예언이 딱 맞아 들어가는 일들이 연이어, 한꺼번에 발생하고 있는 듯 보인다. 따라서 사람들은 조심스럽게 그날을 예상하고 있다.

 

 

 

 '베리칩에 숨겨진 사단의 전략'

 

 본서는 수십 년 전부터 사람들을 미혹 했고, 여전히 억측이 난무하고 있는 '짐승의 표 666'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을 담고 있다. '짐승의 표'에 대한 다른 해석으로 최근 급부상한, '베리칩(Verichip)'이라는 '초소형 무선주파인식(RFID)칩'과 '세계정부(World Government)'에 관한 내용을 기술하고 있다.

 본서의 내용은 그리 새롭지는 않다. 관련된 많은 내용이 이미 인터넷에 광범위하게 퍼져있다. 그리고 관련 책이 시중에 몇 권 출간 되어 있다. 따라서 이 책에서 말하는 내용들은 알 만한 사람들에게는 이제 지루한 얘기들이다. 그럼에도 본서에 대해 말해야 한다면, 인터넷 자료와 관련하여 출간된 다른 책들보다 '베리칩'에 대해 좀더 자세히 기술 되어 있다는 점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요한계시록에 언급된 '짐승의 표'와의 관련성 여부와 상관없이 '베리칩' 그 자체는 음모나 망상이 아니라 '사실'이다. 그것은 이미 여러 채널을 통해 들려지는 소식과 같이 동물들에게 우선적으로 삽입 되고 있다. 잃어버린 애완견을 찾기 위한 방편으로 한정적으로 동물에 삽입 되고 있다. 그리고 후문(後聞)으로는 인체에도 삽입 되어 그 안정과 성능이 시험 중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풍문으로만 전해질 뿐 공식적인 채널을 통해서는 아직 들리는 바가 없다.

 '베리칩'의 논란이 점점 가중되고 있다. 그 논란의 중심에는 인류 통제를 목적으로 하는 '신세계질서(New World Order)' 하에서 그것이 정말 요한계시록에서 언급된 '짐승의 표'로써 실생활에서 매매에 사용 될 것인지와 그것을 통한 구원 여부이다. 이에 대한 본서의 주장을 살펴보자.

 

 본서에서는 '베리칩'이 계시록에서 언급된 그 '짐승의 표'가 분명하다고 단정 짓는다. 그 근거로 크게 '과학적', '법적', '성경적' 증거를 내세운다. 이를 간략히 정리하면 이렇다. 과학적으로 '베리칩'은 위치추적과 확인을 위한 16-코드, 그리고 사람의 세포를 검사하고 조율하는 128 DNA-코드, 송수신을 유지하는 콘덴서, GPS로 송수신을 연결시키는 안테나 코일이 담겨진 제품, 장치(device)라고 한다. 여기까지는 익히 알려져 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것의 기능이다. 16-코드는 매매 기능 및 위치추적 기능에 이용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128 DNA-코드는 세포와 관련하여 병을 고치는데 쓰일 것이라 말한다. 이러한 과학적 근거에 더하여 단지 기능적 측면만이 아니라 사회적, 법적 측면에서 '베리칩'에 대한 정당성을 보완한다.

 '베리칩'의 기능이 정말 실현이 된다면 그 자체는 매우 이로운 장치(device)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악용이 된다면 매우 해로운 장치가 될 것이다. 이 책에서 '베리칩'이 어떻게 사용 될 것인지, 그 사용을 위한 제도가 어떻게 마련되고 있는지 밝힌다. 미국에서는 의료개혁법을 통해 앞으로 병원에 입원하거나 주치의에게 갔을 때 '베리메드' 프로그램에 의해 의사 또는 간호사로부터 '베리칩'을 몸에 넣도록 법으로 규정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의료개혁법 2511조항으로 '학교단위 건강센터'를 통해 18세 미만의 학생들에게 '베리칩'을 넣게 될 것이라 한다. 또한 은행에서는 창구의 빠른 처리를 위해, 입금, 출금, 송금, 대출 등의 거래에 있어 '베리칩'이 사용 될 것이라 한다.

 '베리칩'에 대한 가장 큰 논란은 아마도 이 부분일 것이다. 이것이 정말 계시록에 나온대로 '오른손'이나 '이마'에 받게하여 매매를 못하게 하는 그 '표'인가? 정말 '베리칩'을 삽입하면 구원 받지 못하는가? 이 책에서는 이 부분에 대해 단호하게 말한다. '베리칩'은 '짐승의 표 666'이다, '베리칩'을 받으면 구원 받지 못한다. 그에 대한 성경적 근거로 계시록 말씀의 어원적 분석을 시도한다. 계시록에서 사용된 '짐승(테리온)'은 동물이 아니라 '사상', '우상(에이코)'은 '굴복, 항복', '경배(프로스쿠네오)'는 '경의를 표한, 숭배, 엎드려 절하다'라는 뜻이라 해석한다. 따라서 13장에 나온 "우상에게 경배"라는 말은 "자기의 유익을 위할 목적으로 베리칩을 받는 행위는 배신자"(26p), 다시 말해서 "마지막 시대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목적으로 베리칩을 갖는 것은 예수님께서 받지 말라고 말씀하신 명령을 배반하는 행위로 우상에게 경배한다"(27p)라는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러한 일들이 정말 '마지막 때'와 관련이 있으려면 전세계적으로 동시에 벌어져야 할 것이다. 단지 어느 한 나라에서만 발생하는 것으로 그친다면 그것은 종말과 관련이 있는 사건이 될 수가 없다. 이에 대해 본서에서는 '빌더버그(Bilderberg)'라는 부유하고 힘 있는 사람들의 조직을 통해 '세계정부(World Government)'가 구성되고, 그 정부를 통해 사회가 통제되며 개인은 감시 당하며 위에 일들이 이루어질 것이라 말한다.

 

 이상에서 정리한 바와 같이 본서는 '베리칩'에 대해 나름의 설득력 있는 증거들을 제시한다. 그러나 여전히 의문점이 남는다. 먼저 '베리칩'과 관련해서, 현재 공식적 채널을 통해서는 그것에 대해 아무런 발표나 언급이 없다는 점이다. '베리칩'의 현황과 전망에 대해 기독교 일각과 음모론 진영에서는 꽤 떠들썩하다. 여기저기서 그 사용이 목격이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공식 채널에서는 이상하리만치 전혀 보도가 없다. 음모론에 따른 문제가 아니더라도 그 장치 자체는 인류사에 있어 매우 놀랍고 획기적인 기술 장치가 될 것임에 분명한데도 왜 아무런 주목이 없을까? 이는 음모론에 비추어, 그 음모를 감추려는 어떠한 세력의 압력으로 인한 것이라 해석해야 할까?

 '베리칩'에 대한 또 다른 의문은 기술적 실현 여부이다. 본서에서 제시한 과학적 근거는 일견 그럴듯하게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실현 가능성을 제시한 것에 그칠 뿐이다. 과연 그러한 장치의 실현이 가능한지 현재의 기술 수준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통신 기술과 생물/의학적 검증은 전혀 없다. 이를테면 그 칩 하나로 송수신 및 위치 추적이 가능한가? 그 칩으로 정말 금융거래 및 일상에서의 매매가 가능할까? 칩 삽입으로 인한 인체의 거부 반응은 없는가? 칩으로 과연 세포와 인체 부위를 자극하여 병을 고친다거나 정신, 최소한 행동의 통제가 가능할까? 이러한 제반 문제들에 대한, 기술적 실현 여부는 전혀 검증하지 못한 채 단지 이론적 가능성만 놓고 주장을 한다면, 하늘을 나는 자동차는 물론이고 건담이라는 애니메이션에 나온 전투로봇도 먼 미래의 일이 아닐 것이다. 물론 그와 관련하여 제시한 다른 근거인 법 제도와 관련된 내용은 꽤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제도가 마련 되어 있어도 기술의 현실성과 제반 틀 등이 구성 되어 있지 않으면 어떠한 것도 실제 생활에 접목시킬 수 없다. 본서에서는 마치 '베리칩'이 당장에라도 가능한 기술 장치로 여기는데 우리의 상식과 알려진 기술로는 봤을 때 그 칩의 실제 실현 가능성은, 언젠가는 가능하겠지만 당장에는 물음표를 달 수밖에 없다. 따라서 '베리칩'은 '짐승의 표'라고 성급한 주장을 하기보다 '짐승의 표'일 가능성도 있지만, 현재 기술력의 한계로 '짐승의 표'가 아니라 그 개발을 위한 전단계가 아닐지 예상하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좀더 유보하고, 신중함을 보이는 게 나았을 것이다. 이렇게 가정해보자. 만약 '베리칩'이 아니라 추후 개발 될 그 업그레이드 장치가 정말로 '짐승의 표'라면? 현재 개발된 '베리칩'이 '짐승의 표'라고 소리 높여놨기 때문에 진짜 '짐승의 표'가 등장하더라도 아무도 그것을 믿지 않을 것이다.

 '베리칩'과 관련한 또 다른 의문과 논란은 칩 삽입에 따른 구원 여부이다. 저자는 '한 번 받은 구원은 영원하다'는 성도의 견인 교리를 완강히 부인한다. 저자는 '베리칩'은 '짐승의 표'이기 때문에 그것을 받으면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확고히 말한다. 이와 연관하여 견인 교리를 주장하는 이들에게 저자는 묻는다. '베리칩'을 받지 않으면 은행에서 금전거래를 못하고, 물건과 집을 살 수 없고, 세금을 낼 수 없고, 교통을 이용할 수 없고, 아이들이 교육을 받을 수 없도록 법제화 되고, 상황이 그렇게 된다면 과연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묻는다. 상황이 정말 그렇게 된다면 누구라도 칩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칩을 받지 않으면 일상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니 말이다. 그러면 구원을 받지 못하는데 어떻게 할 것인가? 하지만 저자의 물음에는 성급한 오류가 있다.

 '베리칩'은 실재한다. 정말로 시행 될지 알 수 없지만 (저자가 든 법적 근거에 따르면) 2013년 상반기부터 '베리칩'을 받도록 미국은 여러 부분에서 법 제도가 개편 되었다. '베리칩'과 관련이 있어 보이는 듯한 사회 시스템들이 조금씩 준비 되고 있다.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는 양보하여 사실이라는데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의 물음은 '베리칩' = '짐승의 표' 라는 수식을 만들어 놓고 봤을 때의 이야기이다. '베리칩'이 정말 '짐승의 표'일 경우에 해당되는 문제이다. 반대로 언급된 사회 시스템이 마련 되었지만, '베리칩'이 '짐승의 표'가 아니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괜한 호들갑으로 부질없는 자발적 불편을 겪는다는 비웃음을 사게 될 것이다. 헛된 고민과 불안에 떤 어리석음을 부끄럽게 여겨야 할 것이다.
 만약 '베리칩'이 저자의 물음대로 정말 '짐승의 표'라면? 그렇다면 구원 여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을 해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본인은 '한 번 받은 구원은 영원하다'고 고백하는 바, 설령 '베리칩'이 정말 '짐승의 표'라고 드러날지라도 우리 구원에 대해 고민 할 필요가 전혀 없다고 본다. - 저자는 '한 번 받은 구원은 영원하다'는 '성도의 견인' 교리를 '추측이나 가정이나 체계화시킨 학문'이라며 부인하는데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견인'은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밝히신 진리이기 때문이다. '견인'은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분명한 사실이다. - 하나님께서 성도를 끝까지 지켜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된 상황들을 피할 방도를 내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베리칩'과 관련하여 공식적으로 드러난 바가 전혀 없고, 따라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음에도 그에 대해 지레 겁먹거나 걱정하는 것은 신자로서 온당치 못한 행동이다. 자신의 믿음의 미천함을 드러낼 뿐이다. 아직 가시화 되지도 않은 일을 놓고 걱정하는 것은 우리 삶을 이끄시는 하나님을 불신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우리 앞에 놓은 현실을 항상 주시하고, 시시각각 닥치는 위험에 우리 선에서 할 수 있는 한 미리 대비하여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대처하는 것이 더 온당 할 것이다.

 '베리칩'이 '짐승의 표'라면 그것에 대해 좀더 분명하게 알 수 있도록 언젠가 가시화 될 것이다. 그때 가서 어떠한 행동을 취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때 가서도 늦지 않으려면, 지금 미리 "베리칩은 짐승의 표다. 또는 아니다."라고 성급한 결론을 내리기보다 그것에 대한 진실이 명확히 드러나는 시점까지 차분히 기다리며 지금 이 시점에서부터 그것을 똑똑히 지켜보고 있어야 할 것이다.

 앞서 잠깐 언급 했듯이 '베리칩'에 대해 최소한 국내에서는 (본인의 짧은 정보력에 의하면) 공식적으로 보도된 바가 없다. 참 이상하지 않은가? 일각에서 무척 떠들썩한 것과는 상당히 대조적이다. 상황이 그렇다면 수면 위에 전혀 드러나지 않는 그것에 대해, 그것이 정말 모든 국민, 모든 사람에게 언젠가 삽입 될 장치가 될 것인지, 그것을 통해 인류 통제가 이루어질지에 대해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베리칩'에 대해 전망한다면, 그것은 우려대로 정말 '인류 통제 목적에 전면적으로 사용'되거나 '애완견 혹은 의료 및 금융거래 등에 제한적으로 사용'되거나 아니면 밝혀진 바와는 달리 '망상에 따른 해프닝'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아무 걱정 할 필요가 없다. 그것에 지나치게 집착 할 필요가 전혀 없다. 그것과 관련된 일이 사실이든 망상이든 그저 묵묵히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

 

 '베리칩'이 '짐승의 표'인지 아닌지는 신학적 입장에 따라 의견이 갈릴 수밖에 없다. 그런데 여기서 신학적 해석의 결과 그것이 '짐승의 표'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주장하는 것은 바르지 않다는 저자의 지적은 옳다. '짐승의 표'를 해석하려면 그 자체만 놓고 학문적으로 해석 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종말에 대한 예언과 현재의 상황을 견주어 보고, 관련된 말씀 및 그 앞뒤 문맥을 총체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 물론 신학적 입장에 따라 계시록 내용을 상징이라 보아 '짐승의 표'도 단지 상징이라 해석한다면 이러한 총체적 고려는 필요 없을 것이다. - 그렇게 본다면 현재 세계의 정세는 '베리칩'은 '짐승의 표'가 아닌지, 그리고 지금이 정말 마지막 때가 아닌지 심각히 고려해 볼 만한 상황에 놓여 있다. 단, 이러한 추측은 잘못된 '세대주의', '시한부 종말론적' 해석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현실은 면밀히 살펴보고, 엄격히 평가하되 성경에 억지로 끼워 맞춰서는 안 될 것이다. 반대로 성경을 과잉 해석하고, 본문이 말하는 그 이상으로 넘어가서 상황에 말씀을 끼워 넣어서는 안 될 것이다.
 어쨌든 '베리칩'은 '짐승의 표'다 혹은 아니다라는 결론은 둘 다 성급하다. 우리는 어느 쪽으로도 단정할 수 없다. 자기 입장에 따라 그저 이럴 것이라 추측 할 수 있을 따름이다. 반대로 '짐승의 표'가 무엇인지, 그것이 어떠한 형태를 보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베리칩'과 같이 어떠한 물건이나 장치일지, 문신이나 어떠한 마크일지 또는 비가시적인 어떠한 것이거나 가시적이지도 비가시적이지도 않은, 그저 상징일지 알 수 없다. 엄밀히 말해서 각자의 해석은 모두 추측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는 이렇게 가정해보자. '짐승의 표'는 장치가 되었든 문신이 되었든 아니면 비가시적인 무엇이 되었든 그것은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가정 하에, 만약 '베리칩'이 '짐승의 표'가 아니라면, 빠르게는 우리 시대에 종말이 도래하였을 때 다른 진짜 '짐승의 표'가 등장하더라도 그동안의 혼란과 미혹에 지쳐서 아무 의심 없이 받게 될 것이다. '베리칩'이 '짐승의 표'가 아니라면, 그리고 종말은 계속적으로 소망해야 하지만 여전히 우리 시대의 일은 아닐 경우, 우리가 가져야 할 종말에 대한 소망은 자칫 약해지고, 불신자들로 하여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도매금으로 광신도 취급을 받고 신자와 기독교는 사람들의 더 큰 거부의 대상이 될 것이다.

 이번엔 반대로 가정해보자. '베리칩'이 '짐승의 표'가 맞고 세상의 종말이 우리가 겪을 일이라면, 그럼에도 우리가 그것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면 우리 중 누구는 거리낌 없이 '짐승의 표'를 받게 될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그는 구원 받은 자가 아니라 판단할 수 있다. 이때 구원 받은 자는 '베리칩'에 대해 걱정 할 필요가 전혀 없다. 왜냐하면 저들과 같이 계시록을 굳이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년 동안 왕 노릇하니"(계 20:4)에 따라 구원 받은 자는 그 '표'를 받지 않을 것이고, 그에 따른 어려움은 하나님께서 이길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반론으로 그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지 밝혀보라고 한다면, "그때가 되면 알 것이니 미리 알려고 할 필요가 없다. 그것이 믿음이다."라고 말하고 싶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본서는, 누군가 내게 "이 책 읽어야 할까요?" 라고 묻는다면 굳이 권하고 싶은 책은 아니다. '베리칩'과 '세계정부'에 대한 아무런 관련 지식 없이, 그리고 신앙에 확고함 없이 본서를 읽는다면 괜한 걱정과 두려움 및 혼란을 갖게 되고 괜한 미혹만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본서를 읽고자 한다면, '베리칩 = 짐승의 표?'라는 등식을 해결하기 위한 목적으로 읽기보다 실제적으로 우리 생활에 언젠가 적용 될 '베리칩'이라는 기술과 그 장치에 대한 정보를 조금 얻을 목적으로 읽는게 나을 것이다. '베리칩'은 양면의 가능성을 가진 장치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이 책의 내용에 동의하든 혹은 반대하든 우리는 '베리칩', '세계정부'... '허황된 음모론', '망상'이라는 성급한 판단보다는 이렇게 생각하고 대처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고 실제적인 처사일 것이다.

 '베리칩'과 '짐승의 표', '세계정부'와 '종말' 사이의 무리한 가정과 논의는 거두고, 대신 '베리칩' 그 자체에 집중해보자. '베리칩'은 실재한다. 그리고 그 기술과 발전 추이를 보건대 그것은 분명 미래의 어느 날 우리의 실제 생활에 적용 되고, 사용이 될 것이다. 문제는 그것이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양면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베리칩'은 선용된다면 인류의 편의를 크게 높여 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악용된다면 국민 통제와 감시를 위한 도구라는 음모론 진영의 우려와 같이 정말로 그렇게 사용 될 것이다. 따라서 신자 혹은 불신자를 막론하고 모두는 개인의 자유와 국민 모두의 안녕을 위해 그 발전과 사용을 차분히 지켜보는 가운데 악용 될 기미가 감지된다면 적극적으로 막아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언제 오실지는 아무도 모른다. 우리는 그날을 알려고 할 필요가 없다. 기꺼이 그날을 알려고 하는 것은 허망한 노력이다. 그 대신 우리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더욱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수 있는지 알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그 소명에 감사하며 각자에게 주신 사명을 충실히 감당하므로 아버지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올려 드리는 일에 집중하는 게 구원과 그 삶을 대하는 바른 자세이다. 더불어 우리는 종말의 날을 알려고 하기보다 종말 그 자체를 소망해야 한다. 이미 이 땅에 임한 종말을 직시하고, 다가올 종말을 기다려야 한다. 세상의 종말이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우리 각자의 종말보다 크게 뒤쳐질지 아니면 마지막 종말을 통해 우리 각자의 종말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신랑이 언제 오실지 모르지만, 그분의 오심을 기다리며 기대해야 할 의무가 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대하며 하나님께 영원히 함께 할 그날을 소망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종말에 대한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다. 도리어 종말을 기대해야 해야 한다. 물론 종말의 때에 신자들에게 육체적, 정신적 고통과 고난이 찾아올 것이기에 인간적으로는 그날이 썩 내키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바른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의 연약함으로 인한 두려움보다는 신랑을 맞이 할 기대와 설레임이 더 클 것이다.
 종말의 날을 알 수 없지만, 택함 받은 그리스도인은 구원을 보장 받았기 때문에 걱정하고 두려워 할 것이 전혀 없다. 우리 앞에 어떠한 일들이 닥칠지라도 우리는 그 일들 후에 구원 받게 될 것이다. 따라서 본 글의 초두에 언급한, 예수님께서 예언하신 그 일들에 침잠되어 두려움과 혼란에 빠지는 것은 신자에게 마땅한 행동이 아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예언은 그날에 일어날 일들을, 겪기 전에 두려워 떨고 겪으며 고통에 신음하라고 주신 말씀이 아니다. 그 말씀을 하신 이유는 그날에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가쳐 주시기 위함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비록 그 시기를 알 수 없지만, 그때가 언제이든, 그날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믿음을 굳게 지키며, 말씀 전파에 힘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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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과 선교 - 모든 성도를 위한 부르심
손창남 지음 / 죠이선교회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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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이유는, 단지 좋은 것을 맛 보았기 때문이 아니다. 물론 복음의 은혜와 그 감격이 복음을 전하는 힘을 제공하기는 한다. 하지만 그것이 원동력은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전도를 하는 이유는,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지상 대위임명령이기 때문이다.

 전도는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이다. 마태복음 28장 19 ~ 20절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대로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전도를 해야 한다. 그것은 잃은 양을 다시 하나님의 집에 들이기 위함이다. 전도는 택한 자를 구원 얻게 하려는 하나님의 계획하심이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회복을 위한 위대한 사명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라면 복음의 은혜를 나누려는 선한 의도를 넘어, 사명 완수를 위해 전도에 힘써야 한다.

 그러한 전도는 각자의 주변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게 가장 일반적이다. 이 방법은 물론 노력과 인내가 필요하지만 가장 쉽고 편하게 할 수 있다. 내가 아는 사람, 나와 일상적으로 마주치는 사람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일정한 부담과 어려움이 따르긴 하지만) 큰 장애가 없다. 하지만 선교, 해외로 나가서 하는 복음 전파는 큰 어려움이 따른다. 아무나 쉽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다.


 '직업과 선교'


 본서는 선교의 방법 중 전문인 선교의 방법을 다루고 있다. 정확하게는 직업을 통한 선교에 대해 다루고 있다. 총 3부, 11장으로 구성된 본문에서 직업 선교의 필요성과 유형 및 그 준비 방법을 알려주고 있다. 단지 성경 분석이나 머리에서 나온 이론이 아니라 저자 자신의 직접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한 실제적인 가르침을 전해주고 있다. 여기서는 눈에 띄는 몇 장만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1부에서는 직업 선교의 필요성을 알린다. 직업 선교가 왜 필요한지, 초대 교회에서부터 지금까지의 선교의 역사를 1장에서 간략히 살펴본다. 그것을 통해 선교의 대상이 이제는 어느 한정된 지역이 아니라 전세계로 확장 되었음을 전한다. 그 말은 선교지에 복음을 들고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쉽지 않음을 뜻한다. 다양한 문화와 언어로 인한 어려움은 물론이고, 특히 공식적으로 선교사를 받아들이지 않는 나라에서의 선교의 어려움을 알린다. 그에 대한 보완책으로 직업을 통한 선교가 필요함을 역설한다.

 2장에서는 사도행전을 통해 선교의 두 가지 모델을 제시한다. 하나는 '바울과 바나바 팀의 선교'이고, 다른 하나는 저자가 '풀뿌리 선교'라 칭하는 선교이다. 전자는 사도들이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하지만 한정된 지역에 국한 되어 있음을 분석한다. 반면 후자는 사도가 아닌 모든 성도들이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모든 지역에 걸려 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풀뿌리 선교'는 디아스포라의 배경을 가지고 있는 흩어진 사람들이 타지역, 타문화에 살며 자연스럽게 했던 선교이다. 이 모델에서 저자는 직업을 통한 선교의 방법을 발견한다.

 2부에서는 저자가 구분한, 직업과 관련된 선교의 유형을 살펴본다. 저자는 선교와 관련하여 다섯 가지 유형을 제시한다. 그것은 '선교사(1타입)', '직업을 가진 선교사(2타입)', '선교사가 된 직업인(3타입)', '해외에 있는 직업인(4타입)', '국내에 있는 직업인(5타입)'이다. 여기서 1에서 3타입은 선교사, 그리고 4와 5 타입은 직업인으로 구분한다. 이러한 다섯 가지 유형 중 1타입인 선교사를 제외한 네 가지 타입을 각각 살펴본다.

 마지막 3부에서는 직업 선교를 준비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여기서 저자는 일(work)과 증거(witness)의 네 가지 타입을 제시한다. WW1은 "일이 사역이다", WW2은 " 일은 사역을 위한 공간", WW3은 "일은 사역을 위한 토대", WW4은 일을 통해 선교사로 감"이라는, 직업과 사역의 네 가지 관계를 통해 직업 선교의 준비 방법을 알려준다. 각각의 유형의 특징을 제시하여 직업 선교에 대한 방법을 가르친다.

 본서는 직업 선교의 현실적인 방법을 제공한다. 직업을 통한 선교를 준비하는 이들에게 실제적인 도움을 준다. 막연한 이론으로 막막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분석과 대안을 제시함으로 준비에 큰 힘을 안겨 준다. 물론 그렇다고 모든 부분에서 도움을 주지는 않는다. 자신의 기능과 직업을 어떻게 선교지에 가져가서 사용할지와 어느 선교단체나 교회의 도움을 받을지 등은 각자의 과제로 남는다. 이 부분은 경우의 수가 다양하여 저자가 해결해 줄 수 없는 부분이기에 각자 해결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대신 9장, 10장에서 보여주는 직업 선교사로서의 저자의 여정을 통해 그 부분에 대한 접근 방법의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선교에 전적으로 매진하는 전문 선교사가 아니라 직업을 통한 선교, 전문인 선교를 꿈꾸는 이들에게 이 책은 귀한 보물이 될 것이다.


 선교는 결코 쉽지가 않다. 내가 나고 자란 문화 및 환경과는 너무나 다른 타문화와 환경에 적응하는 것부터 어렵다. 말도 잘 통하지 않는 곳에서 자리를 잡을 때까지는 외톨이로 지내는 것은 견디기 힘든 일이다. 게다가 전적으로 선교에 매진하는 경우 언어 뿐만 아니라 가정과 사역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재정적인 문제는 큰 압박으로 작용한다. 물론 이 경우 대개 후원을 받지만 그에 대한 불안은 지속된다. 설령 의사소통이 가능하고, 문화에 적응하였다 하더라도 또 다른 장애물이 기다린다. 그것은 고국과 음식에 대한 결코 적응 할 수도, 제거 할 수도 없는 본능적인 향수이다. 이것은 누구도 견디기 힘든 어려움이다. 이것들만으로도 버거운데, 여기에 더해지는 어려움이 있다. 자녀 양육 문제이다. 타국에서의 생활로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 자녀, 그리고 선교사 부모가 사역에 집중함으로 상대적으로 소외 되는 자녀드를 잘 양육한다는 것은 선교사에게 있어 아마 가장 해결하기 힘든 어려움이 아닐까 싶다. 이러한 여러 어려움들을 이겨내야 하는 것이 선교이다.

 국내에서 하는 전도도 쉽지는 않다. 하지만 국외에서 하는 선교는 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사명을 위해 열길 마다 않고 선교를 하러 나가는 모든 이들은 참으로 위대한 제자들이다. 그 위대한 사명자들, 전적으로 선교에 매진하는 이들이든 아니면 직업을 통해 선교를 하는 이들이든 그 사명자들의 위대한 헌신과 수고에 하나님 나라의 동역자로서 실제적 보탬이 되지는 못하지만 힘찬 응원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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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연구 - 갈라디아서에 대한 성경신학적 해석 이신칭의 신학의 교회론적 이해
이재복 지음 / 칼빈아카데미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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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 구원을 얻는다는 '이신칭의'는 기존 유대교의 관점에서는 무척이나 급진적이고 상당히 도발적인 주장이었다. 구원에 있어 율법의 준수, 인간의 행위를 중요시 했던 유대교의 관점에서 믿음과 복음을 강조하는 기독교의 주장은 급진적이다 못해 폐기해야 할 거짓 주장이었다. 따라서 (열렬한 유대교 신자였,던 바울의 회심 전 관점에서 봤을 때) 그러한 주장을 하는 기독교인들은 질타의 대상을 넘어 몰아내야 할 악한 존재들로 여겨졌다. 유대교와 로마 카톨릭은 구원에 있어 인간의 행위를 강조한다. 하지만 구원에는 인간의 행위가 자리 할 곳이 전혀 없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얻는 것이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와 구원을 뜻하는 '이신칭의'. 여기서 의롭게 된다는 말은 상태 자체가 의로워짐을 뜻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법정적 용어로써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선언 하시는 것이다. 그 선언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얻을 수 있다. 값없이 거저 구원을 얻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은혜가 얼마나 큰가! 이때 그 믿음 조차도 우리의 의지나 노력이 아니라 오직 성령님의 감화를 통해 얻는 것이니 우리는 그 큰 은혜에 감사치 아니 할 수가 없다!

 

 '갈라디아서 연구'

 

 본서는 개신교의 핵심 교리인 '이신칭의'에 관한 연구를 담고 있다. 갈라디아서를 통해 '이신칭의'를 꽤 심도 있게 논의한다. '이신칭의'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먼저 갈라디아서에 나타난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설명한다. 그 설명을 통해 율법과 복음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이어 갈라디아서 본문 분석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와 '이신칭의'의 관련성 등을 설명한다. 그리고 교회의 기반이 되는 '이신칭의', '이신칭의'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교회의 관련성을 논의 함으로 '신자의 삶의 원리를 밝힌다.

 본서에 특기 할 만한 점이 있다면, 먼저 갈라디아서의 저작 연대에 대한 저자의 확증을 들 수 있다. 갈라디아서의 저작 연대는 세 가지가 제시 되어 있다.

 

 ① 바울이 1차 전도 여행이 끝난 후 예루살렘 공의회가 있기 전에 기록

 ② 2차 전도 여행 중에 기록

 ③ 3차 전도 여행 중에 마게도냐에서 기록

 

되었다는 견해가 제시 되어 있는데 저자는 가장 처음, 예루살렘 공의회가 있기 전에 기록 되었다고 본다. 그 이유는 공의회 후에 기록 되었다면 '이신칭의' 사상은 바울 고유의 사상이 아니라, 사도들에게 전수 받았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 다음으로 눈여겨 볼부분은 '이신칭의' 사상을 바라보는 관점이다. 통상 '이신칭의'는 구원론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개인 구원의 서정의 단계로 이해된다. 이러한 이해는 교회의 존립보다는 개인 구원에 초점을 맞추게 한다. 하지만 바울은 '이신칭의'를 교회의 존립과 밀접하게 연관 시킨다. 본서가 기반으로 하고 있는 갈라디아서를 예로 들면, 당시 갈라디아 지역 교회에는 율법을 통한 구원을 주장하는 유대인 교사들의 잘못된 주장이 퍼져 있었다. 이에 바울은 교회를 보호하고 바로 세우기 위하여 '이신칭의' 사상을 주장하며 교회를 보호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신칭의'에 대한 오늘날의 구원론적 이해와 적용은 물론 바른 것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러한 일방의 이해와 적용은 바울이 원래 의도하였던, 바른 신앙고백 위에 교회를 세워나가려는 그 원칙과 적용을 약화시킬 수도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신칭의'를 단지 개인의 구원과만 연결시키는 좁은 이해와 적용을 넘어 바른 신앙고백을 바탕으로 교회를 세워 나가는 좀더 넓은 이해와 적용으로 가져 갈 필요가 있다.

 본서를 통해 독자는 '이신칭의'에 대한 분명하고 바른 이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이신칭의'를 개인 구원과만 연결시키는 좁은 적용이 아니라 교회의 근간이 되는 그 사상의 배경을 선명히 알게 됨으로 그 사상을 통해 교회를 세워나가는 좀더 넓은 적용에로 나아가는 계기를 얻게 될 것이다.

 

 구원이 만약 인간의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희생은 전연 쓸모가 없는 헛된 희생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구원이 만약 인간의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은 인간의 비웃음을 샀을 것이다.

 구원은 결코 인간의 노력으로 얻을 수 없는 것이기에, 그리스도의 희생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귀한 희생인 것이다. 원은 결코 인간의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기에,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그 은혜는 한량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상을 단 한 마디로 표현하는 '이신칭의'라는 그 사상. 신자와 교회의 구원과 존립의 기초가 되는 그 사상을 우리는 고이 간직하고 전하며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감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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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의 첫째 아담에서 종말의 둘째 아담 그리스도까지 - 창세기 1~3장으로 보는 성경의 맥 구속사적 성경의 맥잡기 시리즈 3
존 페스코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흥과개혁사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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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세기 1~3장은 많은 의문과 논란을 일으키는 부분이다. 신학적으로, 그리고 과학적으로 많은 논쟁과 의문의 대상이 되고 있다. 신학적으로는 창조의 날과 관련하여,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6일을 오늘날 통용되고 있는 24시간 씩 여섯 날을 말하는 것인지 하니면 다른 의미를 나타내는 것인지 의견이 분분하다. 그리고 인간의 창조 기사가 두 번에 나뉘어 소개된 것을 두고 오류가 있다고 지적하는 이들이 있다. 과학의 렌즈는 진화론을 주장하며 하나님의 창조를 거부한다.

 창세기, 특히 창세기 1~3장은 성경 66권을 여는 부분으로써 그 부분은 기독교의 기초를 이룬다. 창세기 1~3장은 창조와 타락을 보여줌으로 이후에 이어지는 구원과 새 창조를 암시하며 그 당위성을 제시한다. 창세기 1~3장은 구속사의 맥을 이룬다. 그렇기 때문에 그 부분을 잘못 이해하면 기독교에 대한 이해와 믿음이 부실해지고, 나아가 그러한 믿음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 부분을 올바른 관점으로 바라보고 명확하게 이해 할 필요하다.


 '태초의 첫째 아담에서 종말의 둘째 아담 그리스도까지'


 본서는 창세기 1~3장을 렌즈의 배율을 높아 들여다 본다. 총 7장의 본문을 통해 창세기 1~3장을 세밀하게 살펴본다. 구속사의 시작을 이루고, 끝을 암시하는 그 부분을 기독론과 종말론적 관점에서 보고, 설명한다.

 기독론과 종말론이라는 해석 방법론을 제시하며 시작되는 본서는, 1장에서 하나님의 형상과 그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 그리고 하나님의 형사을 드러내는 그리스도에 대한 설명과 이해를 제시한다. 2장에서는 에덴 동산의 목적과 특징 그리고 그 안에서의 인간의 책임을 설명한다. 저자는 에덴 동산의 일체적 목적이 농업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성전의 지위를 가졌다고 주장한다. 그곳에서의 아담의 원형은 농부가 아니라 제사장이라 말한다. 3장에서는 행위 언약에 대해 살펴본다. 아담의 언약적 의무와 그 실패를 보여준다. 4장에서는 노아, 아브라함, 모세의 언약을 통해 그 언약들은 아담으로 인해 깨어진 행위 언약의 회복이 아니라 "약속된 복음이 완성되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 언약들의 궁극적 목적은 "둘째 아담에 대한 그림자와 모형으로 작용"하는 것이라 주장한다. 5장에서는 첫째 아담과 둘쨰 아담 사이의 공통점을 들여다 본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생명과 죽음과 부활 안에 있는 창조론적 요소", "창조론과 교회론 사이의 관계", "통치 명령과 둘째 아담이 완수한 사역과의 연결성으로 표현되는 창조론과 종말론 사이의 관계"이다. 6장에서는 안식일의 성격, 즉 안식일이 어떻게 언약의 종말론적 표지의 역할을 하는지와 미래에 성취될 새 창조의 완성으 가리키는지 그 원리를 설명한다.

 본서는 인간과 세상의 기원에 대한 기존의 접근과는 다른 방향에서 창세기 1~3장에 접근한다. 창세기 1~3장이라는 제한된 부분을 창조론, 구원론, 기독론, 교회론, 종말론이라는 조직신학의 주제들과 연관을 시키며 세밀하게 관찰한다. 이러한 접근과 관찰은 구속사 저체를 가로지르는 창세기 1~3장에 대한 명확하고 바른 이해를 돕는다. 따라서 구속사의 기초를 마련하여 주는 본서는 목회자, 신학생 뿐만 아니라 성도들도 읽어보면 좋을 책이다.


 성경의 첫 단추인 창세기, 특히 그 1~3장을 잘못 이해하면 기독교에 대한 모든 이해가 삐뚫어지게 된다. 창세기 1~3장은 성경의 전체의 시작인 동시에 그 모든 내용의 이유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창세기 1~3장은 단지 인간과 세상의 기원만을 설명하는 부분이 아니다. 그 부분은 구속사 전체를 가로지른다. 창조와 타락을 증거함으로 구원과 새 창조의 당위성을 제공한다. 창조를 말하는 동시에 종말을 암시한다. 따라서 창세기 1~3장을 기존의 이해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좀더 세밀하게 관찰하면 성경 전체에 대한 이해가 더 넓어지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의 그 큰 은혜를 온전히 누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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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djo 2013-02-25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더확실하게,,,이해가 됩니다,,,좋은글 감사합니다
 
죄와 은혜의 지배 존 오웬 전집 4
존 오웬 지음, 이한상 옮김 / 부흥과개혁사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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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인간은 타락한 존재이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께 대하여 참으로 악한 죄인이다. 단 한 사람도 없이 말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첫 사람인 아담과 하와의 범죄함으로 이 이후의 모든 인간들은 그 죄를 이어 받게 되었다. 물론 이것을 부정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다.

 첫 사람의 타락으로 인간은 죄의 유혹과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다. 죄를 짓지는 않을까 알게 모르게 날마다 긴장하며 살아간다. 때로는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죄를 지는다. 또 때로는 고의적으로 죄를 짓는다.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의 의지와 노력으로는 결코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죄에서 자유케 되었다. 하나님의 은혜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달리시뫄 부활로 우리는 죄로부터 승리를 얻게 되었다. 날마다 우리와 동행하시는 성령님의 은혜로 우리는 죄와의 지독한 악연을 끊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고 우리가 죽기 전까지 죄를 완전히 짓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죄와 은혜의 지배'

 

 본서는 청교도의 황태자라 불리는 존 오웬의 죄에 관한 강론이다. 본서를 통해 오웬이 보여주는 죄에 관한 탁월한 고찰은 우리가 죄를 억제하는데 귀한 가르침을 준다. 우리가 은혜의 지배로 나아가는데 큰 도움을 제공한다.

 오웬은 죄의 목표와 본질을 알려줌으로 그 무서움과 사독함을 보여준다. 죄는 우리를 지배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음을 알려준다. 죄는 신자를 지배하여 그 영혼과 마음에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한다. "죄는 그 지배력을 발휘하기 위해 인간의 순종을 요구한다(56p)." "죄는 지배력을 발휘하기 위해 신자가 은혜의 지배를 받지 못하게 한다(57p)." 그리하여 신자가 하나님을 거역하고, 악을 행사하도록 만든다. 즉 죄의 지배는 인간의 파멸을 목적으로 한다. 따라서 죄의 지배는 '사악'한 것이다.

 오웬은 이처럼 악한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한 분별력을 알려준다. 어느 것이 죄의 지배에 대한 증거가 아니고, 또 어느 것이 죄의 지배를 나타내는 것인지 가르친다. 각각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죄 죽임을 실천한다면 정서 내에 존재하는 죄가 반드시 죄의 지배에 대한 증거는 아니다(88p)." 라고 말한다. 그리고 "죄 죽임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죄의 지배를 나타내는 위험한 징후(89p)"라고 말한다. 이것을 뒷받침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묵상'하고, '끊임없이 기도'하며, '끊임없이 자신을 낮추'어 죄 죽임을 실천할 것을 촉구한다.

 이제 오웬은 죄의 지배에 대한 명백한 증거를 제시한다. "죄가 그의 의지를 장악하고 있다면, ... 자기의 죄를 떳떳이 선언하며 결코 감추지 않을 때, 그리고 그것을 많은 사람 앞에서 자랑할 때, 술 취함이나 부정함이나 욕설 등과 같이 명백히 알려진 자범죄를 저지른 것에 대해 인정은 하지만 결코 새로이 회해하지 않을 때 (등등) 우리는 죄가 어떤 사람을 지배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증거라고 말한다.

 본 강론의 마지막은, 죄가 신자들을 지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가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지 알려준다. 이 확신의 근거는 신자들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다(128p)."는 사실에 있는데, 그 정당성을 보이기 위해 크게 네 가지 예를 든다. '은혜는 죄를 이길 힘을 준다.', '은혜의 복음은 자유를 준다,', '은혜는 신자를 효과적으로 인도하며 위로한다.', '은혜의 복음 안에는 죄를 멸하시는 그리스도가 있다,' 이상의 네 가지 근거를 제시하며 우리는 은혜의 지배에 대한 확신을 가질 것을 종용한다.

 본서를 통해 독자는 자신을 지배하려는 죄를 분명히 인식하게 될 것이다. 그 죄의 지배의 악함을 알아 그것을 경계하게 될 것이다. 죄를 죽이기 위한 부단한 노력을 시작하고, 은혜의 지배를 확신하며 그것에로 나아가기 위한 걸음을 띄게 될 것이다. 혹 죄를 인식하지 못하거나, 죄 경계하지 않으며, 죄 죽임을 하지 않으면 자신에 대한 죄의 지배가 시작되지 않았나 의심해야 할 것이다.

 

 삼위 하나님의 은혜를 신자를 죄로부터 승리를 얻게 되었다. 그렇다고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한 것은 아니다. 죄는 신자를 지배하여 악행을 저지도록 하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본다. 따라서 신자는 그 안에 내재하는 죄를 인식하고 경계해야 한다. 날마다 죄를 죽이기 위한 노력을 하여, 죄가 아니라 은혜의 지배를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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