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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기억은 진짜 기억일까? - 거짓기억과 성추행 의혹의 진실
엘리자베스 로프터스.캐서린 케첨 지음, 정준형 옮김 / 도솔 / 2008년 6월
평점 :
품절
자주는 아니지만 종종 그런 일을 겪는다. 누군가와 대화 나누는데 한 가지 과거의 사실을 놓고 의견 대립이 이루어진다. 서로의 기억이 맞다고 우기는 것이다. 결국 내가 승리를 거머쥔다. 나의 기억이 더 정확한 기억이라는데 상대가 동의한다. 그런데 헤어지고 나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내 기억이 아니라, 상대의 기억이 맞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그런 일을 겪고 나면 '과연 기억은 믿을만한 것이 아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기억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왜곡, 추가, 수정 등이 이루어지기 떄문이다. 그렇다고 기억을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것은 나의 행동의 근거가 되니까.
'메멘토'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주인공은 아내가 강간당하고 살해된 충격으로 단기기억상실증에 걸려 기억을 10분 이상 지속시키지 못한다. 때문에 범인을 찾는 과정에서 얻은 정보를 폴라로이드 사진으로 찍어 짤막하게 메모를 해두거나 심지어 몸에 문신으로 남기기도 한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기억의 변조가 조금씩 이루어진다.
물론 그것은 단기기억상실증이라는 특수한 상황으로 인한 것이지만, 우리 기억의 불완전성을 보여준다.
'우리 기억은 진짜 기억일까?' 라는 한국어판 제목을 가진 이책의 부제는 '거짓 기억과 성추행 의혹의 진실'이다. 한때 미국에서 유행 했던 성추행 기억의 회복에 대해 다루고 있다.
20세기 말, 미국은 삶의 문제로 심리치료사를 찾아간 많은 여성들이 치료 과정에서 어린 시절 부모나 가까운 사람들에게 당한 끔찍한 성추행 기억을 회복하는 일대 사건이 발생한다. 그것은 여러 사람들에게 급속도로 번져 친인척 혹은 지인들 사이에 고소가 오가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진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그 사건들의 중심 논쟁이었던 기억의 왜곡, 즉 '억압된 기억'이다.
억압된 기억이란 한 마디로 (어릴적 겪은) 충격적 사건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우리의 뇌가 그 기억을 억압하여 떠올리지 않게 한다는 것이다. 이는 수많은 의문과 논쟁을 불러 일으켰고, 결국 그것을 반박하는 과학자들의 승리로 시대의 해프닝이 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앞서도 이야기 했지만 많은 여성들이 삶의 문제로 심리치료사들을 찾아갔는데 그 문제의 원인이 어릴적 성추행으로 인한 것이라는 진단을 받는다. 참으로 기가막힐 일이다. 대부분 처음에는 그런 기억이 없지만 사례를 통해 나타난 심리치료사들은 그런 기억을 떠올릴 것을 강요한다. 치료과정이 거듭됨에 따라 급기야 그런 기억을 만들어 내게 한다. 물론 그것은 그들의 고의적 행태가 아니었다. 일부러 거짓 기억, 없는 사실을 만들어 내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해야 억압된 기억을 자유롭게 해방시킬 수 있다고 배웠기 때문이다. 그것이 치료과정의 방법이라 배웠기에 그랬던 것이다. 여기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그러한 방법으로 정말로 뭍혔던 성추행 사실을 밝혀낸 경우가 있는가 하면 없는 성추행 기억을 치료사들의 유도로 인해 만들어내었고, 그것이 문제가 되어 가정 파탄에 이르게 된 경우가 있었다. 그래서 그것이 사회적 이슈가 되었던 것이다.
이 책은 그러한 사례를 바탕으로 우리의 기억이 어떻게 왜곡과 조작이 되는지 보여준다. 우리 기억의 취약성, 불완전성을 이야기 한다.
아쉬운 점은 500페이지에 가까운 그 많은 공간의 5분의 4 가량이 사건 사례로 채워져 있다는 점이다. 기억 왜곡과 조작에 대한 학계의 이론은 거의 얘기하지 않는다. 그것이 참으로 아쉽다. 물론 이론을 100%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론이 등장하면 지루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사례를 들고 이론으로 그것을 풀어 설명 했으면 기억의 불완전성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오히려 이론은 말하지 않고 사례만 잔뜩 들어 지루하게 느껴졌다.
이론이 별로 없다는 것은 저자가 책에서 조사의 어려움을 토로 했던 바와 같이 억압된 기억에 대한 연구가 그동안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반증이니 이해 할 만도 하다.
우리의 뇌는 한 정보(거짓이든 진실이든)를 얻게 되면 자신의 경험과 그로 인한 정보, 그리고 습득한 지식에 견주어 보고 자신의 그것들과 상충되는 부분이 없으면 사실로 받아들인다. 반대로 맞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거짓이라 결정한다. 사실의 진위 여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나의 기억만이 중요 할 뿐이다. 그러나 기억을 완전히 믿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기억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변조가 이루어지니까.
우리가 지금 기억하고 있는 것들은 대부분 최초의 기억과 완벽히 일치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남에 기억을 조금씩 잃게 되고, 그 빈공간을 그동안 얻은 다른 기억과 정보로 채우는 까닭이다. 그 과정에서 왜곡이 이루어지고, 마침내 기억은 어그러진다. 그렁에도 우리는 자신의 기억이 100% 정확한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그것만 보더라도 인간은 기억만이 아니라, 그 자체도 참으로 불완전한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완벽하지 않은 존재이기에 끊임없이 완전함을 꿈꾸었고, 갈망 했다. 그리고 그것을 향하여 나아갔다. 그 덕에 원시상태에서 벗어나 지금의 우리가 되지 않았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