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너무나 당황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무척 길어질 것 같아 몇 가지만 짚으려고 한다. 이 책에 나타난 은사를 사모하는 모습이 아름답다. 그러나 한 가지 은사에 집착하는 모습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각자에게 맞는 은사를 주시지 필요없는 은사를 주시지는 않는다. 각 은사는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 안에서 각 성도들을 사용하실 때 각자에 맞게 주시는 것이다. 각자의 쓰임이 다르기 때문이다. 결코 각자의 유익을 위함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 책은 방언이 제일인 양 방언을 계속 강조한다. 한 마디로 방언제일주의이다. 그리고 전문적으로 말씀을 연구하는 소위 전문가라 불리는 이들도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지 못하는 과오 범하는데 말씀에 대해 자세히 연구하지 않는 한 성도가 말씀을 얼마나 엉뚱하게 해석하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물론 우리는 지성이 있고, 심령에 성령님이 계시기에 그분을 통하여 말씀의 비밀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기도 가운데 심도 있는 연구를 해야 한다. 깊이 연구해 보지도 않고 자기 체험에 비추어 말씀을 오역하는 사례의 전형을 보여준다. 말씀 변개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면,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 고린도전서 14:4 이 구절을 "나는 방언의 은사가 '개인의 덕을 세우는 것'임을 강조했다." 라고 말한다. 즉 좋은 방향으로 해석한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바로 앞 구절을 보자.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 - 고린도전서 14:3 그리고 그 뒷부분을 보자.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 고린도전서 14:5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쓴 시대적 배경과 심정을 모른 채 앞뒤 구절을 살펴본다 하더라도 결코 방언을 꼭 해야 하는 것으로 권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저자는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 고린도전서 14:5 한 절의 전체 문장에서 앞부분만 뚝 떼다가 "바울은 초대교회 교인들 모두가 방언하기를 권했다." 라고 일축한다. 참으로 당황스럽지 않을 수가 없다. 이것이 성경 변개지 않고 무엇인가? 어느 한 부분에서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계속 그러기에 할 말을 잃게 만든다. 또한 부흥은 믿지 않는 이들이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고개 숙여 철저한 회개를 통해 구원 받은 성도로 거듭난 사건과 믿는 성도가 하나님을 떠나 살다 회개를 통해 다시금 주께 돌아오는 사건을 가리키는 것이지 믿는 성도가 여러 은사 중 하나에 불과한 방언을 한 자리에서 떼로 받은 것을 가리키는 것이 결코 아니다. 부흥의 중심에는 철저한 회개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저자 김우현은 많은 이들이 동시에 방언을 받았다 하여 그것을 부흥이라 칭한다. 이는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심각한 왜곡이며 호도이다. 물론 그의 체험이 정말로 성령님으로 인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말씀을 근거로 체험을 해석한 것이 아니라, 혹 말씀을 근거로 해석했다 하더라도 잘못 해석한 말씀을 바탕으로 체험을 자기 임의로 추측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그리고 기독교는 결코 신비주의 종교가 아니다. 체험주의 종교도 아니다. 오직 말씀 위에 서서 말씀을 바탕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며 느끼는 종교이다. 그 말씀을 지켜내기 위해 초대 교회는 신비주의적 이단들과 싸워왔다. 그로 말미암아 기독교의 정수가 오늘날에 전해진 것이다. 이 책의 가장 큰 문제는 수많은 이들이 저지르는 동일한 문제인, 말씀을 자기 입맛대로 떼어다가 마음대로 해석 했다는 것이다. 허튼 사건으로 어린 성도들을 미혹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일부분이 전체인 양 동일화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가장 처음 언급 했듯이 은사를 사모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각자에게 다르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무시한 채 한 가지만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결코 좋지 않다. 내 의견 또한 절대성이 없기 때문에 부디 읽는 이들이 날카로운 분별력을 가졌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