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그날의 시바스리갈은 가난과 슬픔과 좌절로 점철된 나의 지난 시간과의 작별이었다. 짜릿하고 달콤했던건 위스키의 맛이 아니라 고통스러웠던 지난날과의 작별의 맛이었을지 모른다. 그날로부터 나의 변절과 타락이 시작되었다. 참으로 감사한 날이지 아니한가! - P35
나는 특히 김명숙 화가의 표지그림에 매료되었는데, 그가 폐교된 시골 초등학교로 출퇴근하며 그리는 그림은 이렇게 묘사된다. "두려움에 시달리며 제 몸과 정신을 갉아대며 그린 그런 그림이라 그 정신과 노동과 결사적인 몸부림을 받아내야만 하는 종이는 자신의 속살을 드러내 보이며 작가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 있었다." 나는 그 구절을 여러 번 읽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낡아가고 또 언젠가는 소멸될 수도 있는 종이 한 장. 그 위에 자신의 전 세계를 옮겨놓는다는 것. 어떤 위태롭고 아름다운 경지를 본 느낌이었다. - P91
다들 앉은걸음으로 문을 향했다. 찬 공기에 몸서리를 치며 목만 길게 빼고 내다본 바깥은 온통 새하얀 눈밭이었다. 발자국 하나 나지 않은 백색의 순수였다. 누가 먼저랄것도 없이 우르르 마당으로 달려 나갔다. 매화나무에도 감나무에도 눈이 한 뼘씩 쌓여 있었다. 뒤란의 대나무는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땅 끝까지 휘늘어진 채였다. 자연의 장관 앞에서 다들 입을 다물었다. 누군가 전등을 하늘로 비췄다. 빛기둥 안에서 주먹만 한 눈송이들이 수직으로낙하하고 있었다. 순수에 압도당한 최초이자 마지막 경험이었다. 그날 나는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이토록 순수하게, 이토록 압도적으로 살고 싶다고. - P28
다음 날, 우리는 모르는 사람으로 만났듯 모르는 사람으로 헤어졌다. 흐린 램프 아래 보았던 그들의 얼굴은 지금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그들의 코펠 잔에 위스키를 따르던순간의 안타까움, 나의 정체를 발각당한 순간의 당혹감,모두가 같은 편, 모두가 위스키에 취했다는 기이한 연대의식만이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를 뿐이다. 인생 최초의 위스키 패스포트는 내게 지리산의 겨울밤이다. 낯선 이들과 따스히 함께했던. - P20
친구야, 알고 있니. 내가 너의 눈을 지켜냈어. 물건을 빌려주지 않음으로써, 그러기 위해서 남의 눈을 멀게 하는 악의적인 착한 상상, 그리고 무언가를 하지 않기 위한 적극적인 무위의 노력이 필요했단다. - P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