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형의 삶 (양장) - 김민철 파리 산문집
김민철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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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안전은 우연이다. 우연히 내가 저기에 없었고, 우연히 누군가가 거기에 있었다. 우연히 내가 안전하고, 우연히 누군가가 위험에 처했다. 일상이라 단단히 믿고 있던 지반이, 안전하다고 믿고 있는 이 모든 순간이 얼마나 깨지기 쉬운 것인지. 나의 안전은 얼마나 수많은 우연이 결합해서 기적적으로 찾아온것인지. 이 안전에 필연은 없다. 도서관에서 읽던 책에 세월호이야기가 나와서 결국 울었던 며칠 전이 생각났다. 수많은 생이 가라앉는 순간을 모두 같이 목도한 기억이 우리에겐 있다.
이태원이라는 이야기만 들어도 가슴이 몇 겹으로 짓눌린 날들도 있다. 오래 아팠고, 오래 슬펐고, 오래도록 죄스러운 날들이있었다. 나의 안전은 당연하지 않다. 이 모든 것을 일상이라 부르며 이것을 당연한 듯 누리고 있지만 이것은 특별한 것. 투명하도록 얇고 우연한 안전이 손에 만져졌다. 나의 안전이 누군가의 위험을 담보로 한 것은 아니겠지만, 내가 누리는 모든 말짱한 생활이 말짱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누구를 향한 건지도알 수 없는 미안함이 밀려왔다. 더는 음악 속에 있을 수 없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갔다. 창문을 열고,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의 안전을 빌었다. 그렇게 창가에 밤늦도록 앉아 있던 밤이 있었다. - P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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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철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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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만 내 맘대로 시간을 쓰고 싶다는 내 말에, 후배는 그럼 뭘 하고 싶냐고 물었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지겹도록 책만 읽고 싶어"라고 말했다. 후배는 그런 대답을 하는나를 지겹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지만, 다른 대답은 잘 생각나지 않았다. 책만 읽어도 괜찮은 시간을 살고 싶다는 그 소원이 이런 공간 속에서 이뤄지기를 바란 적은 없다. 너무 과한 걸인생에 요구할 생각은 없다. 그런데 무슨 일인가. 어쩌다 나는이곳에서 지겹도록 책만 읽어도 좋을 시간을 보내고 있는가.
좋아하는 것 앞에 ‘지겹다‘라는 형용사를 붙일 수 있는 호사가어찌하여 내 것이 됐단 말인가. 나는 하늘색 구름 같은 질감의꿈속에서 마음껏 뒹굴었다. 마음껏 점프했다. 한참이 지나 다시 유리 천장으로 빛이 들어올 때, 나는 책을 덮고 도서관을 나섰다. 비 온 뒤 말간 세상을 말간 마음으로 걸었다. 그 어떤 것도 부럽지 않았다. 부러움 한 톨 깃들 여지없는 말간 마음이었다. 물론 이건 친구가 한국으로 돌아가고 난 후의 이야기지만.
시간은 봄처럼 야속하게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슬퍼할 시간은 없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여전히 수많은 처음이 우리를기다리고 있을 테니. - P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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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철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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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지하철 안에서 친구와 떨어져서 앉게 되었다. 나는우리가 지나는 역이 비르하켐역이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친구에게 바로 문자를 보낸다.
‘지금이야. 창밖을 봐.‘
친구가 문자를 확인하고 고개를 드는 바로 그 순간 지하철은 세느강을 건너기 시작한다. 건물들 사이에 가려졌던 에펠탑이 갑자기 탁 트인 세느강을 배경으로 튀어나온다. 빠르게달려나가던 모든 시간이 갑자기 느리게 흐른다. 매 순간이 분절되어 찬란하게 새겨진다. 이 장면을 볼 때마다 나는 몸서리를 친다. 그 장면에 이젠 친구의 표정까지 더해졌다. 친구의 저표정은, 진짜다. 이 아름다움은, 진짜다.
우리가 이 아름다움 속에, 같이, 있었다.
이 문장은 오래도록 믿기지 않을 것만 같다. - P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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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철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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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상한 일이었다. 아니,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차,
치즈, 와인, 루콜라, 낯선 식재료, 공연, 미술관, 오래도록 원하던 걸 하나씩 이루는데 이상하게 기쁨이 지나간 자리엔 허무함이 자꾸 맴돌았다. 예상치 못한 방문객을 마주하고 앉았다.
무슨 일이신가요. / 저는 허무입니다. / 무슨 일이시냐고요.
/제가 왜 왔는지 모르시나요. / 난감하네요. 그쪽을 기대하지않았거든요. 하지만 제가 와버렸고, 그건 제 잘못이 아닙니다. / 허무가 찾아오다니, 무슨 의미일까요. / 저는 텅 비었고,
그래서 허무입니다. / 왜 텅 비어 있나요. / 저는 텅 비어 있으므로 어떤 답도 없습니다. / ・・・・・・ 결국 스스로 답을 찾으란 이야기네요. -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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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철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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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알았다. 똑같은 그림을 나에게 넣고 섞었는데, 슬픔이나왔던 시절이 있었고, 용기가 나오는 시절이 있다는 걸. 내가바뀐 것이다. 내게 필요한 것이 바뀐 것이다. 지금 내게 필요한건 나의 색깔대로 살아버려도 된다는 용기였다. 좋은 롤모델이 없더라도, 좀 이상해 보이더라도, 내 마음의 방향대로 살아버리는 것. 스스로가 나의 롤모델이 되어버리는 것. 내가 긋고싶은 선을 긋고, 내 마음이 가는 대로 색을 칠하는 거다. 불안과 싸우며, 의심을 떨쳐내며, 계속 나아가는 거다. 마침내 그토록 바라던 나만의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 시작된 거니까. - P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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