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원하숙으로 온지 며칠 되지 않아 나는 이 집의 사람들이 기이하게 불행하다는 생각을 했다. 누가 보면 강화석모도에서 혼자 전학 온 중2짜리 여자애가 그 집의 최약체였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나는 하숙집 사람들에게서 보이는 어떤 병든 습벽 같은 것은 없었다. 그렇다고 서울로 온것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나는 늘 그렇듯 미래를 낙관했다. - P47
리사가 곡선을 그리며 뒷걸음으로 다가와 말했다. 나는가방에서 스케이트를 꺼내 신고 얼음판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빙판을 지치고 나갔다. 연못가에 서 있던 리사가 움직이기 시작했고 나는 그애를 앞질러 나아갔다. 다리에힘을 주어 양발을 교차해 나아갔다. 사각거리는 불행의촉각을 느끼며 나아갔다. 여기에 남는 것과 강화로 돌아가는 것 그 둘 중에 무엇이 더 큰 불행인지 가늠해보고 싶었다. 이 연못이 한가운데까지 완전히 얼어 있는 것과 아직 어딘가는 얼어붙지 않았을 수 있다는 것. 그에 대한 긴장과 두려움을 모두 느끼며 질주했다. 구름이 달을 통과하자 달빛이 쏟아졌고 거기서 떼어낸 투명한 빛들이 내가달리는 방향으로 내려앉기 시작했다. - P40
"아부지가 낮이 없네.""낯 없는데 어떻게 말은 하네."대화하는 동안 우리는 마당 장대에 널려 건조되고 있는 가오리를 올려다보았다. 연처럼 꼬리가 긴 그 생선은밑에서 쳐다보면 눈코입이 늘 웃는 듯 보여서 문제였다.마주하고 있으면 많은 것들이 시시해졌다. 바람이 한번불고 지난 뒤의 모래사장처럼 마음의 표면이 평평하게 균형이 맞춰지는 게 느껴졌다. 고작 그 시시함으로 - P25
소목수의 방은건축사사무소라고 하면 떠오를 만한 세련되거나 모던한구석이 전혀 없었다. 그저 너무 많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갖가지 것들이 쌓여 있었다. 철제로 된 선반과진열장이 공간 대부분을 차지했고 어디서 뜯어냈는지 모를 고목재와 건축 부속품들이 한데 모여 있었다. 아까부터 느껴지던 나무 냄새는 거기서 풍기는 모양이었다. - P13
이 열매는 지난해 시월 상달, 우리 둘의조그마한 이야기가 비롯될 때 익은 것이니.작은아씨야, 가녀린 동무야, 남몰래 깃들인네 가슴에 졸음 조는 옥토끼가 한 쌍.-정지용 「자류(柘榴)」 부분 - P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