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산 넘고 물 건너 힘겹게 닿은 몬토크의 바닷가해는 이미 중천에 떠 있었고 눈은 한 톨도 내리지 않았다.그저 메마른 목초지에 해변이 펼쳐져 있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아연실색할 만큼 파란 바다 앞에서, 세상의 온갖 빛이다 비추고 있는 것 같은 선명한 빛깔 앞에서 스무 해를살며 앓아온 모든 시름이 다 씻겨 내려가는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이내 바다에서 불어오는 강풍에 귀가 떨어져 나갈 것같은 추위를 느꼈다.) 윤주성 역시 나와 마찬가지였는지 이전에 본 적 없던 환희에 찬 표정으로 ‘좋다‘는 말만 계속 반복했다. - P88
다니던 대학을 그만두고 홀연히 미국으로 향하겠다는윤주의 선언을 듣고서야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나와 한몸처럼 비슷한 것을 바라보고 느끼고 있다고 믿었던 윤주성이 실은 부모님의 차를 물려받고, 수업에 늦으면 택시를탈 수 있는 부류의 친구였다는 사실을. 윤주성의 미련 없음과 용기가 부러웠다. 그 용기를 가능하게 해주는 환경이‘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말해주는 부모님의 조력이부러웠다.내게는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게 도와주는 사람 같은 건 없었다. 하고 싶은 것을 가로막는 것들만이 가득했을뿐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세상 모든 것이 내 앞을 가로막아한 줄기의 빛도 새어 들지 않는 것만 같았다. - P78
어쩌면, 내게 있어 여행은 ‘휴식‘의 동의어나 유의어가아니라, 일상의 시름을 잊게 해주는 또 다른 자극이나 더큰 고통에 가까운 행위가 아닐까? 환부를 꿰뚫어 통증을잊게 하는 침구술처럼 일상 한중간을 꿰뚫어, 지리멸렬한일상도 실은 살 만한 것이라는 걸 체감하게 하는 과정일수도. 써놓고 보니 피학의 민족 한국인답게 몹시) 변태적인 발상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이 또한 나에게 가까운 진실인 것만 같다. - P15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나는 인문학이 준 이 질문에오랫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생물학을 들여다보고서야 뻔한답이 있는데도 모르고 살았음을 알았다. ‘우리의 삶에 주어진 의미는 없다.‘ 주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찾지 못한다. 남한테 찾아 달라고 할 수도 없다. 삶의 의미는 각자 만들어야한다. ‘내 인생에 나는 어떤 의미를 부여할까?‘ ‘어떤 의미로 내 삶을 채울까?‘ 이것이 과학적으로 옳은 질문이다. 그러나 과학은 그런 것을 연구하지 않는다. 질문은 과학적으로하되 답을 찾으려면 인문학을 소환해야 한다. 그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 인문학의 존재 이유이자 목적이다. - P127
나무는 한 자리에 서서 계절을 여행한다. 모든 유기체가그렇듯 나무도 물을 품고 있다. 물이 얼어 팽창하면 세포가 터진다. 죽지 않으려면 겨울 여행을 잘 해야 한다. 동물은 세포에서 당을 태워 열을 내지만 식물은 다른 방법으로 추위를 견딘다. 겨울이 다가오면 잎에 보내던 수분과 영양분을 끊는다. 그래서 단풍이 들고 낙엽이 진다.우리에게 가을의 정취를 선사하려고 그러는 게 아니다.본격적인 추위가 닥치기 전에 나무는 둥치와 가지의포에서 물을 내보내고 당과 단백질 같은 영양분만 남겨세포 내부를 시럽 상태로 만든다. 세포 사이 공간에는 물이 있지만 혼자 돌아다니는 원자가 하나도 없을 정도로순수해서 섭씨 영하 40도까지 얼음 결정이 생기지 않는다. 그렇게 해서 서리와 진눈깨비와 눈보라와 혹한을 견디고 나서 봄의 징후를 포착하면 나무는 물을 세포 안으로 끌어들여 새잎을 틔우고 광합성을 재개한다. - P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