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수록, 아니 나이가 무색하게란 말이 맞을지도, 점점 더 만사가 귀찮다. 아니 강도가 더해가고 있으니 진행중이다. 내가 봐도 이건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방안이 어질러져 있으니... 보다 못한 엄마가 내방을 치우신다.
이 나이에 시집은 커녕, 엄마가 방 치워주는 걸 좋아라 하고 있으니. 역시 아직도 멀었나 보다. 뭐가? 철이 덜 들었다는 거지. 방바닥은 그렇다 치고 책상 위가 더 가관이다. 거의 쓰레기장이라 해도 무방할 듯. 온갖 잡동사니들과 종이류의 집합소다. 사실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못하는 좋지 못한 습관때문에 내 책상이 고생한다. 그리고 울 엄마도.
하루가 멀다하고 입 아프게 책상 좀 치워라고 하시더니 이젠 포기하신 모양이다.
엄마 왈
"책상은 거지 같은데 어떻게 책장은 간수를 잘하는지, 용하다 용해"
연달아 우리 식구들이 입을 모아 엄마말에 찬성표를 던진다.
내가 스스로 생각해 봐도 대견해 할 정도다. 책장에 먼지 하나 없는 건 기본이다. 책장에 꽂힌 책들만은 정말 가지런히 잘 정리되어 있다. 아마 내 방에서 유일하게 정돈된 스페이스가 아닐까. 게다가 분류도 잘 되어 있으니. 나 스스로도 신기하다고 여길 정도지만 이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
사실 어렸을 적부터 이상하게 "책"에 대한 독점욕이 발달했던 나다. 물론 남한테 빌려주는 건 고사하고 식구들, 하나밖에 없는 동생한테조차 잘 빌려주지 않는다. 한마디로 나만의 것! 인 셈. 빌려줘도 사흘이 멀다하고 책 검사를 실시한다. 책을 보다 책 사이에 다른 물건을 끼워둔다거나. 예를 들며 볼펜같은 필기류 말이다. 페이지를 접는다거나.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니 용서 못한다. 이 정도면 중증인거 같다. 단순히 책을 깨끗이 보는 게 아니라 표지에 손자국이 남는 것 조차 질색하고 있으니. 근데 못 참겠다. 당연히 책을 구긴다거나 마음에 드는 문장에 밑줄을 긋는 일은 절대 없다.
암만 생각해도 집착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는 말이다.
옛 사람들은 책이란 손때가 묻어날 정도로 읽고, 또 많은 이들에게 읽혀야 그 가치가 발한다고들 했다. 오늘을 살아가는 책을 사랑하는 많은 이들도 같은 생각이지 않을까. 나도 이론적으로는 그렇게 생각한다. 머리로는.
근데 그게 안 된다.
초등학교 5학년인가 6학년때의 일이다. 지금 애장판으로 다시 나오고 있는 고전 만화 "캔디캔디"가 그무렵에 한창 해적판으로 나오고 있었다. 그 때도 1권씩 사서 모으면서 좋아라 했었다. ^^어느 날인가 학교에 가져갔다 그 중 한 권을 같은 반 친구에게 빌려줬다,기보다 억지로 빼앗기다싶이 빌려주게 됐는데... 학교에서 다 보라고 했더니 친구가 도저히 다 못 보겠다면서 하루만 빌려달라고 사정을 해서 어쩔수 없이 말이다. ......다음날 그 친구 왈 깜빡하고 책을 안 가져왔단다. 근데 그게 시작이었을 줄이야. 며칠이 지나도 그 친구의 입에선 똑같은 말만 되풀이 되고 있었다. 급기야 나는 마음이 조급하다 못해 속상해 죽을 지경~. 그런데 점점 날이가고 달이가도 그 친구는 내 책을 돌려줄 기미가 보이지 않는 거다. 오늘은 책을 가져왔냐는 내말에 성의껏 둘러대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마침내 나를 피하기 시작. 왜그리 책 한권에 목숨을 걸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결국 나는 그 친구집을 찾아갔다. 책을 돌려받기 위해서 말이다. 말 그대로 삼고초려를 했다. 그 일로 나는 총 3번에 걸쳐 그 친구집을 찾아갔는데, 두번째까지 내가 그 친구에게서 들은 말은 책을 어디 두었는지 모르겠다며 찾아보고 줄께라는 핑계였다. 결국 나는 펑펑 울면서 집으로 갔고 보다못한 우리엄마가 그 친구엄마와 통화. 우리딸이 워낙 책을 좋아해서요 호호호 라면 수완좋게 이야길 하셨던 거 같다. 나는 엄마가 통화한 다음날 다시 그 친구네를 세번째로 찾아갔고 결국 그 책을 돌려받았다. 한 석달만에 나는 "캔디캔디 7"권과 대면했다. 참고로 당시 캔디캔디는 9권까지가 완결이었다. 내 사랑스런 책은 물에 젖었다 말린 책처럼 불어있었다. 친구 왈 "집 욕조에 빠뜨려서 말렸는데 이렇게 됐어" 결국 책 돌려받은 그날도 나는 퉁퉁불어 다른 책과는 두께가 두배가 되머린 책을 붙들고 울었다.
쓰다 보니 무지 길어졌다.ㅋ 지금 생각하면 웃음만 터져 나온다. 아무래도 이 때의 휴유증이 아닐까하고 책 빌려주기 싫어하는 내 못된 성격을 스스로 위로하고 있다. 근데, 역시 이렇게까지 상세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건 문제가 있는 건가...?
좀 더 마음에 여유가 생기면 한번쯤 누군가에게 빌려주어야 겠지.....? 내 사랑하는 책들을.
근데 언제쯤이나 그런 맘이 생기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