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밤 11시의 산책
구로 시로 지음, 오세웅 옮김 / 북애비뉴 / 2008년 8월
평점 :
절판
책 표지를 보면 하단부에 제 1회 일본 幽 괴담 문학상 장편부분 대상 수상작이란 말이 눈에 들어온다. 일본은 참으로 다양한 문학상이 존재하는구나 싶다. 우리나라의 경우 순문학쪽은 다양한 문학상이 존재하지만 이런 장르소설 쪽은 거의 전멸이나 마찬가지다 보니 이런 일본이 꽤 부럽기도 하다. 다양한 공모전이 열리기 때문에 아마추어 작가들이 많이 발굴되고 그러다 보면 장르소설의 수준도 높아지는 것이겠지. 일본쪽 사이트를 살펴 보니 이 작품을 심사한 심사위원 중에 눈에 띄는 이름이 하나 있다. 바로 교고쿠 나츠히코다. 와우, 역시 이런 쪽 심사에는 빠지지 않는 분인 듯 싶다. 이쪽 장르에서 워낙 좋은 작품을 쓰는 작가가 선택한 작품이니 마음 놓고 믿고 읽어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소설가 요네다 타쿠로는 1년전 아내 미사코가 죽은 후 딸 치아키와 둘이서 살고 있다. 치아키는 아직 어려서 엄마의 죽음이란 것에 잘 이해하지 못하는 듯 보이지만 그외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 치아키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더니 이상하게도 그림 그리는 것에 대해 집착하게 된다. 치아키가 그리는 그림은 사람이 아닌 이형의 존재. 타쿠로는 치아키의 엄마 미사코도 좋은 그림을 많이 그리는 화가였으니 치아키도 그 피를 물려 받은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하고 만다. 게다가 아이들은 어른들의 상상하지 못하는 것을 곧잘 그리기도 하니까 그런 것은 단순히 치아키의 재능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처음엔 다양한 그림을 그렸던 치아키는 어느 날을 기점으로 새파란 얼굴을 가진 여자를 그리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그 얼굴을 엄마라고 부르며, 다른 그림은 그리지도 않고 그 여자 얼굴만 계속 그린다. 이 그림을 그리지 말라고 해도 치아키는 그림에 대한 강한 집착을 보인다. 이런 치아키가 또하나 집착하는 것은 밤 11시의 산책이다. 잠을 자다가도 꼭 11시만 되면 산책을 나가자고 하고, 검은 물이 흐르는 강 근처에서 그림을 그린다. 이 이상 아무런 일도 없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치아키의 이상행동은 점점 날이 갈수록 더 심해지기만 한다.
유치원에서 아이들을 겁주고, 그림을 그리지 말라는 유치원 선생에게 상처를 입히는 등 치아키의 행동은 폭력적으로 변해간다. 또한 타쿠로의 담당자가 남자에서 여자인 미키로 바뀐 후에는 미키에게까지 위협적인 행동을 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타쿠로는 단순히 엄마가 아닌 여자를 받아들이기 싫어서 그런게 아닌가 하고 생각하지만, 일이 점점 더 커지고 두려운 일들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치아키의 유치원 선생이 치아키와 함께 나갔다가 교통사고로 사망한 것을 시작으로 치아키의 집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괴상한 죽음이 찾아오는 것이다.
도대체 치아키는 왜 그런 것일까. 아이들은 어른들이 보지 못하는 세계를 들여다 보기도 한다. 혹시 그곳을 통해 무언가 나쁜 것을 본 게 아닐까. 아니면 처남의 말대로 치아키의 엄마인 미사코가 성불하지 못해서 그런 것일까. 타쿠로는 미사키의 방에 있는 흔적들을 기반으로 치아키를 그렇게 만든 존재를 추적하기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그가 맞닥뜨린 진실은...
난 공포영화나 호러 소설을 좋아하지만 아이들이 괴물처럼 나오는 건 정말 싫어한다. 그 아이들 중에는 원래부터 사악한 아이도 있지만 누군가의 영향을 받아 사악하게 변하는 아이들도 나오는데 그런 아이들의 사악함은 어른들의 사악함을 훌쩍 뛰어넘기 때문이다. 순수한 사악함이랄까, 그런 것이 더욱 소름끼치게 만든다. 치아키 역시 마찬가지이다. 어쩌면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행동들이 잘못되었다는 걸 모르기 때문에 더 두려워지는 것이다. 누가 믿겠는가. 5살짜리 꼬마가 그런 짓을 벌였다는 걸. 하지만 모든 괴이쩍은 일 뒤에는 치아키의 그림자가 있었다. 아니 치아키로 가장한 누군가의 그림자가 있었다. 그 그림자는 너무나도 탁하고 검고 어둡다. 타쿠로는 치아키를 어둠에서 구하고, 재혼한 미키를 보호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그 그림자의 집착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 역시 호러소설의 전형적인 결말이로군, 이란 생각은 들었지만 전체적인 구성으로 볼 때 서서히 압박해오고 조여오는 느낌이 좋았다. 원래 갑자기 뭔가 팍 튀어 나오는 것 보다는 그림자만 보여주는 게 더욱더 공포를 고조시키는 법이지 않은가. 모든 일이 시작된 그곳, 그리고 여전히 그 그림자가 숨어 있는 그곳. 그곳의 주박은 여전히 풀리지 않은채 그들의 주위를 감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