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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체 모형의 밤
나카지마 라모 지음, 한희선 옮김 / 북스피어 / 2009년 2월
평점 :
품절
나카지마 라모는 예전부터 찜해 두었던 작가인데 이제서야 시작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 몇 권의 소설이 번역되어 나와있지만 그중 가장 끌렸던 『인체모형의 밤』. 웬지 제목만으로도 이 작품의 분위기가 연상된다. 인체모형은 학교 과학실에서 처음으로 본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분명히 공장에서 만들어지긴 했지만, 쳐다보거나 한 공간에 있기가 꺼려지는 건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내가 예전에 봤던 인체의 신비라는 전시회는 진짜 사람을 표본으로 한 것이었지만, 워낙 사람들이 많아서 별로 무섭지 않았지만 만약 어두운 곳에서 그런 표본과 마주한다면 소름이 쫘악하고 끼쳤을지도 모르겠다. 이렇듯 인간을 닮았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극히 꺼려지는 인체모형. 이제 인체모형이 들려주는 밤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일명 목저택이라 불리는 으스스한 집. 그 집을 자신만의 비밀 공간으로 삼고 있던 한 소년이 저택 철거 소식을 듣고 마지막으로 찾아가기로 한다. 저택을 둘러보다 지하실을 발견한 소년은 그곳에 있는 기묘한 인체모형을 마주하게 된다. 인체모형이 소년에게 들려준 이야기는 총 열두가지. 모두 사람의 신체기관과 관련된 이야기였다.
<사안(邪眼)>은 스리랑카에서 살고 있는 한 일본인 부부의 이야기이다. 스리랑카 전설에서 야카라는 이름의 악마와 부인의 이름인 사야카를 결합해 기묘한 이야기가 탄생한다. 아이를 받아준 스리랑카 여인은 뭐가 그렇게 두려웠던 것일까. 어쩌면, 그 아이의 눈이 어떻게 생겼을지 이미 알고 있었던 건 아닐까. 오컬트 분위기가 퐁퐁 풍겼는데 결말에서 쓴웃음을 짓고 말았던 작품. 허허, 정말 사안(邪眼)이었군. <세르피네의 피>는 천국이라 여겨졌던 섬이 실제로는 끔찍한 비밀을 가지고 있었다는 설정의 작품이다. 남성이 여성의 반도 안되는 불균형한 성비. 그 이유는 깊은 바닷속에 있었다. <싸늘해진 코>는 조향사로 일하는 한 여성이 새로 이사한 집에서 겪는 기묘한 이야기이다. 매물로 나온 집이 주변 시세에 비해 너무 싸다면 한 번쯤 의심해 봐야 했는데. 그녀가 들었던 소리와 그녀가 맡았던 냄새의 비밀에는 충격적인 진실이 감춰져 있었다. <굶주린 귀>는 도시전설 분위기가 팍팍 나는 작품이었다. 도청의 재미에 빠져 18번이나 이사를 다니던 남자가 맞딱뜨린 무서운 현장. 근데 그후에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을까.
다리와 관련된 작품인 <건각 - 국도 43호선의 수수께끼>는 무서운 이야기는 아니다. 제목만 보자면 도로에서 죽은 지박령이라도 나올 법한 이야기지만, 결말부는 아주 따스한 느낌을 주는 작품이었다. <무릎>은 괴기만화가 이토 준지의 만화가 문득 떠올랐던 작품이다. 이토 준지의 만화 중 소용돌이란 작품을 보면 머리 중앙에 생긴 소용돌이에 몸을 먹히는 사람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런 부분에서 비슷한 점을 느꼈달까. 이 작품의 경우 무릎에 생긴 인면이 사람의 몸을 삼켰지만. 이토 준지의 만화를 떠올려서 그런지 자신의 무릎에 있는 안면에게 먹히는 사람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상상되고 말았다. 이런 건 상상이 안되어도 좋은데...(汗)
,피라미드의 배꼽>은 배꼽이란 신체기관이 제목에 들어가 있지만, 실제로는 피라미드와 관련된 이야기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피라미드의 신비랄까. 나도 예전에 티비에서 본 기억이 나는데, 그건, 정확하게 만든 미니 피라미드 모형안에서도 피라미드의 신비한 힘이 작용한다는 내용이었다. 음식의 부패를 더디게 하고 날붙이의 날을 날카롭게 벼린다던가. 하여튼 이런 피라미드의 힘을 이용하여 자신의 장인을 없애고 장인의 회사를 꿀꺽한 사위의 이야기는 뭐랄까, 쓴웃음만 나왔달까.
<EIGHT ARMS TO HOLD YOU>는 비틀즈의 미발표곡과 관련한 호러물이다. 이 곡과 관련된 사람은 모두 기묘한 죽음을 당한다는 설정인데, 이 곡을 샀던 가수 역시 기묘한 죽음을 맞는다. 여덟개의 팔에 의해서. <뼈 먹는 가락>은 결말부가 비극인데도 불구하고 웃음이 나와 버렸달까. 돈만 밝히던 묘지사업자의 최후치곤 꽤 그럴싸 했으니.
<다카코의 위주머니>는 육식이란 것에 대해 다시금 생각을 해주게 만든 작품이었다. 나 역시 육식을 아주 즐기는데, 사실 이게 다른 동물의 고통과 죽음의 댓가인 것은 분명하다. 다카코가 육식논쟁을 부모와 벌이다가 결국에는 거식증까지 발전하고, 부모를 악마로 생각하게 된다는 이야기인데, 비약된 부분은 좀 있지만 영 납득이 안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우리가 먹는 건 결국 동물이든 식물이든 원래는 살아있는 것이니 말이다.
<유방>은 강령회를 사기라고 생각한 한 남자가 실제 강령회에서 끔찍한 일을 겪었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그 뒤에 숨겨져 있는 비극적인 사실이 난 더 신경쓰였다. 양계장에서 사용하는 촉란을 위한 호르몬첨가제가 든 닭고기를 먹고 남성이지만 여성호르몬이 분비되어 여성형 유방이 생겨난 남자가 자살했다는 이야기는 우리 시대의 어두운 뒷모습이기도 하니까. <날개와 성기>는 여기에 실린 작품중 가장 환상성이 높은 작품이다. 제 3의 눈과 산양의 모습을 하고 있는 악마가 등장하니까. 그러고 보면 여기에 등장하는 각각의 신체부위는 기묘한 인체모형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었네. 끝까지 섬뜩하게 만드는군.
열두편의 이야기는 오컬트적 요소나 환상성을 많이 포함하고 있지만, 결국은 인간과 인간세상에 관한 이야기이다. 인간의 마음 속에 깃든 어두운 부분이 각각의 신체기관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이다. 기발한 상상력이 만들어낸 기묘한 이야기. 솔직히 말해서 피가 얼어붙을 정도로의 공포는 주지 않지만, 곰곰히 생각해 보면 인간이란 참 기묘한 생물이다, 라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는 작품들이다. 에둘러서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랄까. 우리나라 작가의 호러소설 중에서도 인간의 신체를 부위별로 나누어 묘사하고 있는 작품이 있는데, 그 작품은 전형적인 호러소설이었다면, 이 작품은 호러를 빙자한 인간과 인간세상에 대한 풍자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