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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온다 리쿠 지음, 박수지 옮김 / 노블마인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난 유령이나 귀신 등의 존재를 믿는다. 다만 내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며, 내가 감지하지 못하는 것 뿐이라고 생각한다. 오랜 옛날부터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태어나 살다가 죽어 갔다. 그들의 영혼의 수를 모두 합치면 지금 살아 있는 사람들의 수보다 훨씬, 아주 훨씬 더 많지 않을까. 물론 그 중에서는 환생이나 윤회를 통해 다른 육체로 태어난 영혼들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고 우리 주위를 떠도는 영혼의 수가 더 많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괴기 만화가 이토 준지의 만화 중에 사람들의 영혼이 잠들어 있는 곳에 대한 만화가 있었다. 그 영혼들은 우리가 사는 세상과 섞이지 않은 채 고요히 잠들어 있다가 때가 되면 깨어나 이곳으로 온다. 영화 <디 아더스>를 보면 그들은 자신이 유령인 줄도 모르고 살아간다. 영화 <사랑과 영혼>에서는 죽은 자가 자신의 연인을 지켜주기 위해 이승에 머무르고, <메신저 : 죽은 자들의 경고>에서는 유령들이 살아 있는 악마같은 인간에 대해 경고한다. 이렇게 유령들은 사람들의 곁에 머물면서 사람들을 도와주기도 하지만, <아미티빌 호러>처럼 인간에게 씌어 악행을 저지르게도 한다. 우리는 이처럼 다양한 영화와 드라마, 책이나 만화를 통해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들, 즉 영혼들에 대해 늘 궁금해 하고 있다.
온다 리쿠의『우리 집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역시 유령과 유령이 살고 있는 집에 관한 이야기이다. 언덕 위에 지어진 작은 집. 이곳은 수많은 사람들이 살다 죽어 간 곳이다. 그 중에는 서로를 찔러 죽인 자매도 있었고, 아이들을 납치해 병조림을 만든 여자도 있었으며, 노인과 여자들만 골라 죽인 소년이 자살했던 적도 있고, 토끼굴에 걸려 넘어지는 바람에 아이와 엄마가 죽은 후 남편마저 목을 매달기도 했던 곳이다. 한 집에서 일어났다고 하기엔 너무나도 많은 일이 이곳에서 일어났다. 이런 것은 이곳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저주일까? 이토록 사람이 많이 죽어나간 집이라면 대개는 흉가라고 해서 피하게 마련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입주자가 들어온다.
튼튼하게 지어지긴 했지만 오래 되어서 보수를 해야 할 상황에서 목수 부자는 유령들에게 동의를 구한다. 이 집이 무너지면 너희들도 갈 곳이 없으니 도와달라고. 어라라? 보통 유령들은 자신들이 있는 곳을 누가 침범하는 것을 싫어하지 않나? 하지만 이곳에 사는 유령들은 참혹한 죽음을 맞은 존재들임에도 불구하고 이 집을 사랑하고, 이곳에 머물기를 원한다. 그래서 그런지 목수들의 말에 동의하고 오히려 그들을 도와주기도 한다.
이렇게 보수가 끝나 들어오게 된 사람은 여성 소설가로 혼자 산다. 자신의 숙모가 지은 집에 들어온 이 작가는 이곳이 너무나도 마음에 든다. 하지만 때때로 혼자 있는 공간에 누군가 함께 있는 느낌을 받기도 하고, 때때로 자신이 겪어 보지도 못한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집에 있는 유령들의 영향일까? 유령들은 자신의 존재를 굳이 드러내지 않는데? 유령이 가르쳐 주지 않았다면, 누가 가르쳐 준 것일까.
집은 그곳에 살던 사람들의 에너지를 간직한다. 무서운 기억이나 참혹한 기억을 가진 집이라면 왠지 을씨년스러운 느낌이 들지만, 밝고 명랑한 기억을 가진 집은 따스한 느낌이 든다. 때로 집에 쌓여 있는 마이너스 에너지(안좋은 기억이나 추억)이 사람을 공격하는 소설이나 영화도 만날 수 있는데, 여기에 나오는 유령저택은 참혹한 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쌓여 있는 에너지는 무겁지 않다는 점이 특이하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곳은 오래된 집은 아니지만, 내가 사는 지역에는 고택이 무척이나 많다. 몇백년이나 지난 집이라면 그곳에서 태어나고 죽은 사람이 수도 없이 많을 것이고, 그들이 그 집에 아로새겨 놓은 추억이나 기억도 수없이 많을 것이다. 그러니 책에서 이야기하듯 유령은 곧 추억이란 표현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아름다운 동화처럼 시작해서 때때로 소름끼칠 정도로 무서운 기억을 토해내고 있는 집. 하지만 겉모습은 그저 평온할 뿐이다. 추억은 사람을 해치지는 못한다. 우리는 예전에 이곳에 살고 있던 사람들의 추억을 공유하며, 그들의 기억을 공유하며 더불어 살아갈 뿐이다.
온다 리쿠의『우리 집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평온한 일상과 따스한 풍경을 그리는 듯 보이지만 그 속에 감춰진 무서운 일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것은 겉으로 보여지는 것일뿐, 각각의 유령들이 간직하고 있는 기억은 모두 아름다운 기억들 뿐이다. 사실 기억과 추억이란 것은 주관적인 것이며 지극히 사적인 것이다. 다른 사람이 뭐라고 생각하든 당사자들은 모두 행복한 기억이라 여긴다. 그래서 오히려 더 섬뜩해지기도 하는데, 이 섬뜩함은 마지막 반전처럼 찾아오는 이야기에서 최고로 달리게 된다. 대놓고 무섭게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것이 아니라 은근한 오싹함을 주는 것으로 마지막을 장식한다. 온다 리쿠의 다른 소설과 비교해 보자면 오히려 가벼운 분위기가 도는 듯 하지만, 읽다 보면 역시 온다 리쿠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