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전설이다 밀리언셀러 클럽 18
리처드 매드슨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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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영화 <나는 전설이다>를 봤을 때만 해도 원작소설이 따로 있는 줄도 몰랐다. 이 책을 알게 된 계기는 얼마전 읽었던 스티븐 킹의 책을 통해서이다. 스티븐 킹이 말하는 호러 문화에 대한 이야기에서 공포 소설 파트에 등장한 리처드 매드슨, 그리고 그의 책인『나는 전설이다』와『줄어드는 남자』는 내 흥미를 유발하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두 권의 책 중에 무엇을 먼저 읽을까 생각하다가 영화로 먼저 접했던『나는 전설이다』를 선택했다. 보통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의 경우 지나치게 원작에 충실하다거나 아니면 영화에 맞게 스토리를 변형시킨다. 『나는 전설이다』는 어땠을까. 일단, 원작 소설을 읽고난 소감을 말하자면, 난 원작 소설 쪽에 손을 번쩍 들어줄 수 밖에 없다. 그렇다고 영화가 나빴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주인공이 백인에서 흑인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라는 그런 말도 안되는 이유는 아니다. 윌 스미스의 연기도 좋았고, 스토리도 좋았지만 난 영화보다는 원작의 결말 부분이 훨씬 더 마음에 들기 때문이다. 또한 개를 등장시키는 부분도 소설쪽이 더 인상적이었다. 

핵전쟁 이후 변종 바이러스가 인간들을 공격한다. 그 병은 살아있는 인간을 살아있는 시체, 즉 흡혈귀로 만드는 바이러스였다. 로버트 네빌은 감염되었지만 무슨 연유에서인지 기적적으로 회복, 가족 중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그의 가족이었던 아내와 딸은 바이러스의 희생자가 되었다. 그러나 정부는 이에 대한 대책도 세우지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바이러스는 퍼져나갔다. 과학이 전설을 따라잡지 못했기 때문에 전설이 과학을 통째로 삼켜 버리고 만 것이다. (30p)

네빌은 매일 밤 찾아오는 흡혈귀들의 공격에 대비하고 밤에는 이 바이러스에 대해 연구한다. 고독한 생활이지만, 그는 어딘가에 자신처럼 살아남아 있을 사람들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낮에는 밤에 공격당한 집을 보수하거나 음식을 조달하고, 흡혈귀들을 없애러 다닌다. 예전에는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오직 식욕이라는 본능만이 남은 어둠의 존재들. 그들 속에서 혼자 남은 네빌은 고독하다. 작품 전반에서 네빌의 고독이 느껴진다. 그래서 네빌은 때로는 그들과 같은 흡혈귀가 되어 버릴까 하는 생각도 하지만, 자신은 인간이라는 것을 결코 잊지 않는다. 그들이 비록 예전에는 인간이었어도 지금은 인간을 공격하는 무리일 뿐인 것이다.

거의 3년의 시간을 혼자 살아가는 인간에게 남은 것은 무엇일까. 매일밤 자신을 노리는 무리들에 둘러싸여 그들이 지르는 소리를 듣는 기분은 어떤 것일까. 그런 그에게 절뚝거리며 나타난 개 한마리는 한가닥 희망이었을 것이다. 잔뜩 겁먹은 채 밤에는 몸을 숨겼다가 낮에만 잠시 나타나는 개를 봤을 때 네빌은 춤이라도 추고 싶지 않았을까. 이미 다른 동물들 역시 흡혈귀의 존재로 변했기에 멀쩡하게 낮에 돌아다니는 개를 봤을 때 그는 인간이 아닌 동물이었을지라도 동지감을 느꼈을 것이라 생각한다. 얼마 간의 공을 들여 그 개를 집으로 데려왔을 때, 그리고 그 개와 함께 보낸 짧지만 의미있는 일주일은 네빌에게 새로운 희망을 선사했고, 슬픔 역시 동반하고 있었지만 네빌의 정신을 근본적으로 훼손시키지는 못했다. 나같으면 아마도 개의 죽음이 주는 충격과 슬픔에 휩싸여 무너져 내렸을지도 모르는데, 그는 무척이나 강했다.

하지만, 그는 몰랐다. 이미 이 세상에는 더이상 인간이란 존재는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살아있는 시체들 사이에서도 새로운 세력이 형성된다는 것을. 바이러스는 쉽게 변종을 일으킨다는 것을. 밤에만 활동하는 좀비같은 흡혈귀의 존재가 있었다면, 변종을 일으킨 바이러스로 생겨난 흡혈귀들은 지능을 가지고 있으며, 스스로 세력권을 구축하고 신인류로 거듭나고 있었다. 결국, 현재 세상에서의 네빌은 구인류의 잔재에 불과한 것이었다.

문득 자신이야말로 비정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상이란 다수의 개념이자 다수를 위한 개념이다. 단 하나의 존재를 위한 개념이 될 수 없다. (221p)

그렇다. 예전에 인간들이 다수를 점하고 있던 세상에서는 흡혈귀같은 것이 전설의 존재였고, 비정상적인 존재였지만, 지금 인간들이 멸종하고 흡혈귀가 신인류로 등장한 시대에는 인간이 전설의 존재이자, 비정상적인 존재인 것이다. '이제 나는 전설이야' 라는 마지막 문장은 네빌이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자신에게 닥친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을 보여준다. 결국, 네빌은 전설의 존재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만 할 존재였던 것이다. 이 문장에서 난 진한 슬픔을 느낀다. 그리고 깊은 고독을 느낀다.

뒤에 수록된 10편의 단편들도 무척 인상적이다. 기묘한 장례식이나 영혼이 담긴 인형, 어둠의 주술이 건 저주, 머릿속으로 걸려 오는 전화 등 다양한 소재로 다양한 공포를 유발하는 작품들이 장편 소설과는 또다른 재미를 준다. 이 단편들 중에서 특히나 인상에 남았던 작품은 역시 <매드 하우스>이다. 가장 편안하고 안전해야 할 집이 어떤 식으로 인간을 공격하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하지만 이 작품의 포인트는 집이 인간을 공격한다는 것 뿐만은 아니다. 인간이 집안에서 하는 어떤 행동이 집의 기운에 커다란 영향을 주는지가 제일 큰 포인트로 보여진다. 매일 화를 내고 짜증을 내고 물건을 함부로 다루는 행위를 통해 집안 구석구석에 나쁜 기운이 쌓여간다. 어쩌면 영적인 에너지 반응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는 사람이 사용하는 물건에는 작든 크든 그 소유자의 기운이 깃들 수 밖에 없다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왠지 동양적인 모티브같기도 한데, 사실 이 작품이 두려웠던 것은 난 이런 것을 믿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물건에는 사람의 기운이 깃든다는 것을 믿고 있기 떄문이다. 그리고 다른 곳도 아니고 내 집 자체가 사악한 기운을 품고 사람에게 적대적이 된다는 것은 가장 안전한 곳이 가장 위험한 곳이 된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더욱 두려워지는 것이다.

장편소설인 <나는 전설이다>는 혼자 남은 인간의 고독과 깊은 슬픔을 보여준 소설이었다면 뒤에 실린 단편들은 짧은 분량에서 큰 임팩트를 주는 소설들이다. 마지막 한 문장으로 반전의 재미를 살린 작품도 있고, 푸흡하고 짧은 웃음이 터지게 만드는 작품도 있었다. 장편이든 단편이든 모두 그 나름의 완결성을 가지고 독자에게 큰 인상을 남기는 작품을 쓴다는 것은 정말로 대단한 재능이라 생각한다. 전설적인 소설, 전설적인 작가란 호칭은 전혀 과장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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