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원주민
최규석 지음 / 창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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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최규석 작가와의 나이 차이는 단 한 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려내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나도 낯설었다. 도대체 나와 동시대를 산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오히려 내 부모님 세대를 넘어 할머니 할아버지 세대가 이렇게 살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럼 왜 난 이렇게 느끼게 되는 것일까.

일단 내 이야길 조금 해 볼까? 난 깡촌에서 태어났다. 출산 예정일보다 2주 정도 일찍 태어난 나는 첫째아이였다. 엄마의 갑작스런 진통에 병원 갈 엄두도 못내고 아버지는 송아지를 받던 기억대로 날 받으셨다고 한다. 그후에도 몇 년 더 시골에서 살다 초등학교 2학년에 지방의 중소도시로 이사를 갔고 그렇게 고등학교까지 다녔다. 대학교는 조금 더 큰 지방도시에서 다녔고, 일은 서울과 경기 쪽에서 했다. 어찌보면 최규석 작가의 어린 시절과 비슷하려나,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조금 다른 것은 내 부모님은 두 분 다 교사였고, 난 여동생 하나만 있을 뿐이란 것. 깡촌에 살던 것은 부모님은 두 분 다 신규 발령받은 교사였기에 그랬던 것. 그래서 그런지 나에게 있어서 시골 생활이란 그저 산으로 들로 뛰어 놀던 기억이 조금이 남아 있고, 그후엔 아파서 병원에 입원하느라 또래들과 노는 것도 모르고 자랐다.

시골에서 태어나 자라났지만 그다지 부족함은 몰랐던 것 같다. 책도 맘껏 읽을 수 있었고, 마론 인형도 가지고 있었고, 동네 아이들 중에서 유일하게 자전거도 가지고 있었다. 초등학교 다닐 때는 매달 어린이 잡지를 구독했고, 피아노 학원이나 웅변학원, 주산학원도 다녔고, 중학교 때부터는 아이템풀을 했다. 그래서 그런지 금세 시골에서 살던 기억은 깡그리 잊어 버렸다. 물론 시골 할머니댁에 놀러가서 그곳에서 사는 아이들과 뛰어 놀곤 했지만, 그건 자주 있는 일이 아니었기에 난 나름대로 도시 생활 - 중소도시일지라도 - 에 적응했던 것 같다.

시골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라났음에도 불구하고 왜 난 이렇게 작가가 그려내는 이야기가 낯설기만 할까. 어쩌면 작가와 나의 생활 터전이 달랐다는 것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너무 어린 시절이라 그다지 기억이 많이 남아 있지 않아서 일지도 모르겠다. 지방 중소도시에서 살며 만난 내 친구들은 대부분 아파트나 주택에 살았고, 부모님께서 농사를 지으시는 집도 거의 없었다. 내가 사는 이곳에 생각외로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이 많다는 걸 깨달은 것은 스무살도 넘어서였다. 그때 만난 친구네 집이 농사를 지었기 때문이다. 사남매의 막내였던 친구의 이야기 역시 내게 낯설었다. 자신의 아버지가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둘째 누나를 서울에 있는 갈비집에 일하러 보내려 했다는 일이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 누나는 박박 우겨서 전문대에 진학했지만, 나로서는 왜 그렇게 해야 했었는데? 라는 의문만이 가득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나처럼 삼십대 중반의 사람이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면 요즘 아이는 낯설어 할 것이다. 그때는 컴퓨터도 없고, 인터넷도 없는 시절이었고, 자가용을 가진 집도 거의 없었고, 아파트보다는 일반 주택에 사는 사람들이 더 많았던 시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를 쓰고 취학전 연령부터 영어공부니 뭐니 하면서 학원에 다니는 아이도 거의 없었고, 조기유학은 꿈도 못꾸던 시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작품 속에 나오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 갭이 더 크다. 작가와 비슷한 나이의 나도 작가가 그려낸 작가 자신의 이야기가 너무나도 낯선데, 나보다 어린 사람들은 오죽할까 싶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동시대를 살던 사람의 이야기에 이렇게 놀라게 될 수 밖에 없을까.

그건 우리의 시야란 것에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보통 자신이 영위하고 있는 삶의 틀 밖을 바라 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평범한 지방의 중소도시에서 자란 내가 서울 사람들이나 부자들의 삶을 모르듯, 시골 사람들의 생활이나 가난하게 살던 사람의 생활을 모르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어찌 보면 낯설고 어찌 보면 불편한 마음이 들어서 더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은연중에 우리는 선을 그어버리고 내가 살고 있는 바깥쪽 세상을 보려고 하지 않는게 아닐까. 보이지만 보려 하지 않는 것, 그래서 알 수 없는 것이다. 어쩌면 지금도 깡촌이라 불리는 지역에서는 여전히 이런 삶의 흔적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이제는 시골에서 벗어나 도시의 한구석에서 여전히 이런 삶은 반복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 전통사회의 바닥에 깔려 있다가 느닷없이 닥쳐온 파도에 밀려 끝없이 떠돌아야만 했던 사람들이 있다. 갑자기, 그리고 너무도 늦게 세상의 흐름에 휩쓸려 마치 물 마른 강바닥에서 소용도 없는 아가미를 꿈벅대는 물고기처럼 미처 제 삶의 방식을 손볼 겨를도 없이 허우적대야 했던 사람들. 그들을 키웠던 곳은 흔적을 찾을 수 없이 자취를 감추었고 그들의 일상이었던 것들은 이제 박물관에나 가야 볼 수 있게 되어 버린 사람들. 나는 그들을 '대한민국 원주민'이라고 이름 붙였다. (6p)

이 작품을 읽으면서 이제껏 최규석 작가가 그린 작품들이 어떻게 나오게 되었는지 조금 이해가 갔다. 내가 읽었던 작가의 작품에서 작가 자신이 난 가난하게 살았다, 그래서 가난하고 소외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라고 이야기해도 그저 가난하게 살았다, 라는 말만으로는 그 이상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작가는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라고 이 작품을 그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런 이야기도 있었다,라는 호기심용으로도 이 작품을 그린 건 아니라 생각한다. 난 이 작품을 우리의 시야의 사각에 묻혀 쓸쓸하게 잊혀져가는 사람들을 기억해 달란 정도로 이해하고 싶다. 우리가 아무리 역지사지란 말을 가슴 속에 새겨도 머리로만 이해할 수 있을 뿐, 감정적으로는 완벽하게 동화할 수 없다는 것을 작가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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