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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문기담 - 추리편 ㅣ 김내성 걸작 시리즈
김내성 지음 / 페이퍼하우스 / 2010년 6월
평점 :
품절
난 장르문학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그래서 보통 일본 장르문학을 가장 많이 읽었고 그다음으로 영미 장르문학을 읽었다. 우리나라도 장르문학 붐이 일어 요즘은 꽤 많은 장르문학 작품을 만날 수 있지만, 여전히 일본이나 영미쪽에 밀린다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올 여름 난 김내성의 백사도란 작품을 만났다. 처음에는 이름도 생소하여 반신반의 했지만, 책을 읽으면서 난 짜릿한 흥분감을 맛보았다. 아, 과연 이 작품이 우리나라 작가가 쓴 게 맞는가, 그리고 이 작품이 1930년대에 씌어진 게 맞는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기괴한 환상, 기묘한 이야기, 매혹적인 주인공들을 만나면서 난 또다른 김내성의 작품에 눈을 돌렸고, 그게 바로 이 연문기담이다. 백사도가 기담 · 번안편이라면 연문기담은 추리편이다. 에도가와 란포의 제자로 그의 영향을 받았다는 김내성의 추리 소설! 연문기담은 총 5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그중 가상범인은 중편 정도의 분량이고 나머지 네 편은 단편 분량이다.
러브 레터의 비밀 - 연문기담
연문기담은 아주 짧지만 무척이나 유쾌하다. 미스터리라고 하면 보통은 살인사건같은 강력범죄사건을 떠올리기 쉽지만, 이 연문기담은 그런 것과는 좀 다른 미스터리라고 할까. 시인 백장주와 바이올리니스트 윤세훈의 편지 공방전과 그 편지에 담긴 숨겨진 사실이 무척이나 유쾌했다. 백장주는 그당시에는 보기 힘든 당찬 신여성으로 꽤나 매력적인 캐릭터였다. 누구라도 마지막에는 통쾌한 웃음을 터뜨리게 될 단편.
살인사건의 해답을 현상모집 합니다 - 타원형의 거울
실제 일어난 사건이나 미결로 남은 사건. 그 사건의 해답을 <괴인>이란 잡지에서 현상공모하게 된다. 당시 용의자였던 유시영은 자신의 억울함을 풀고,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의 한을 풀기 위해 그 해답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당시 사건의 진실은 과연 무엇일까? 사건의 용의자였던 남자가 사건을 해결한다는 것이 제일 흥미로웠던 작품. 그리고 마지막 반전도!
로맨티스트 탐정 유불란 - 가상범인
김내성이 탄생시킨 명탐정 유불란이 등장하는 작품이다. 유불란은 모리스 르블랑의 오마주로 보면 된다. 유불란이 사랑하는 여인이 남편을 살해한 범인으로 몰려 감옥에 갇힌다. 그녀를 구하기 위해 유불란은 당시 상황을 연극으로 만들어 공연하게 된다. 출연자는 당시 범행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 그 중에 범인이 있다고 확신하는 유불란은 공연을 통해 범인을 검거하려 하는데...
범인을 검거하기 위해 사건 당일의 정황을 연극으로 만들어 공연한다는 발상에 정말 감탄했던 작품이다. 또한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를 구하기 위해 갖은 애를 쓰는, 가히 사랑에 목숨을 건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의 유불란의 로맨티스트적인 모습을 볼 수 있는 것도 매우 즐거운 점 중의 하나였다. 중편 정도의 길이가 되는 만큼 사건은 쉽게 끝나지 않고, 그 사건 뒤에 감춰진 거대한 비밀이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정말 멍하게 그냥 읽다가는 뒷통수 맞고 더 멍해질 작품. 수록된 작품중 결말에서 가장 놀랐던 작품이다. 그리고 한 인간이 얼마나 사악한 존재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작품이기도 하다.
목격자는 듣고 있었다 - 벌처기
평범했던 아내가 갑자기 유명 화가가 되었다. 평범한 교사인 남편은 아내를 죽이고자 범행을 계획하는데... 알리바이까지 만들었건만, 남편은 곧 범인으로 붙잡히고 만다. 그의 계획이 실패한 이유는?
짧지만 그 반전이 무척 재미있었던 작품. 알리바이 조작이 말짱 도루묵이 되었어!!!
비밀리에 아내를 살해하려 했던 이유를 알게 되고 나서 무척이나 안타까웠던 생각이 들었다. 물론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용서받지 못할 범죄이지만 말이다.
신출귀몰한 도둑, 그림자 - 비밀의 문
이 작품은 당시 시대 상황을 반영하고 있어 더욱 흥미로웠다. 3차 세계대전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던 당시 세계 각국은 신병기 개발에 앞다투어 나서고 있었다. 강세훈 박사는 살인광선 연구자로서 유명한 박사였는데, 박사의 '가장 소중한' 것을 훔치겠다고 괴도 그림자가 예고장을 보내온 것이었다. 박사는 자신의 딸에게 구혼중인 세 명의 남자와 함께 살인광선 설계도를 지키기로 한다. 그러나 정작 사라진 것은 딸이었다!?
더이상 내용을 쓰면 스포일러가 되기 때문에 내용은 말하지 못하지만, 결론부터 내자면 아주 깜찍한(?) 미스터리였다고나 할까. 물론 결말이 어느 정도 예상이 되긴 하지만 무척 유쾌했던 작품이기도 했다.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과학자라는 사람은 자신의 가족보다 자신의 연구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이 있다고. 강박사는 이 사건으로 가족의 소중함을 조금이라도 깨달았으려나?
다섯편의 작품 중 두 편은 유쾌하고 통쾌했으며, 세 편은 좀 묵직한 느낌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연문기담이나 비밀의 문은 결말부를 웃으면서 읽을 수 있었지만 나머지 세 편인 타원형의 거울, 가상범인, 벌처기는 사건 자체가 살인 사건일 뿐만 아니라 결말부 역시 마음을 무겁게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특한 상황 전개나 서술 방식, 절묘한 트릭과 허를 찌르는 반전은 역시 김내성이구나, 싶은 생각을 했다. 특히 살인사건의 해답을 현상 공모한다는 것이나 살인 사건을 연극으로 만들어 범인을 검거한다는 전개는 정말 독특해서 절로 박수를 보내고 싶어진다.
비록 요즘 등장하는 장르 소설처럼 과학의 힘을 빌린 트릭같이 복잡하고 정교한 트릭은 없지만, 사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속임수를 보여준다는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재미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무턱대고 요즘 장르소설과 비교하는 우는 범하지 말란 소리다. 이 작품들이 발표되었을 당시를 생각하면, 이 소설을 읽은 사람들의 반응은 아마도 펄쩍 뛸 만큼 놀라지 않았을까? 김내성의 다른 작품인 마인은 또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기대하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