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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는 가끔 착각을 한다. 자신이 겪은 일에 대해 잘 안다고. 자신이 느낀 것에 대해 잘 안다고.
또한 직접 겪어 보지 않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만을 듣고서도 그 일에 대해 잘 아는 것처럼 착각한다.
그러나 그게 진짜일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내가 겪은 일이나 경험한 일도 나중에는 기억에 희미해지고 퇴색되어 각색되어 간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은 분명한데, 그게 사실인지 나중에 덧붙여진 기억인지 헷갈려 하고, 그때 느낀 감정과 새삼 느끼는 감정 사이의 괴리에서도 몹시 불편해하는 게 우리네 인간이다.
진정한 사랑을 꿈꾸지만 늘 실패하는 여성과 자신을 로봇이라 생각하며 누군가 자신에게 진심으로 다가오면 로봇 3원칙을 내세우며 슬그머니 꽁무니를 빼는 남자의 이야기를 담은 로봇은 제목만 보면 SF소설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겠지만, 속사정을 알고 보면 진실한 사랑앞에 한없이 작아지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사랑이란 모티브를 가진 다른 소설로는 여행과 밀회, 마코토, 퀴즈쇼등이 있다. 이렇게 구분해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나는 이렇게 나눠 봤다. 여행은 이별한 옛연인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고, 밀회는 제목에서 느껴지듯 불륜의 사랑을 이야기한다. 여행에서 특히 흥미로웠던 점은 이별의 수순을 담담히 밟고 있던 연인들이 한 사람의 결혼이란 것에 의해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것은 남자뿐이었을뿐, 여자에게는 더이상 그 사람과의 사랑을 재고할 가치도 없다는 것이 보인다. '잘 모르는 사람'이란 말에 그 속내가 완전히 드러나는 듯 하다. 그는 납치범이 될 각오도 했는데 말이다. 그가 그러한 행동을 하게 된 것은 그 여성에 대한 다 거두지 못한 마음때문이었을까, 아니면 혼자 남겨져 끈떨어진 연처럼 되어버린 자신에 대한 연민때문이었을까.
밀회의 경우, 그 무대가 되는 건 독일의 하이델베르크이다. 그곳에서 7년간의 세월동안 사랑과 이별을 반복한 커플이 있다. 아름다운 거리의 모습,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 뒤에 조금씩 위화감이 느껴진다. 마지막에 이 남자의 현재 상황이 극명하게 드러나면서 반전의 묘미를 맛보게 된다고 할까.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에서 일반적 대상으로 바뀌는 그 순간이 씁쓸하기만 하다.
마코토는 이 소설집에서 가장 유쾌했다고 기억한다. 짝사랑 상대인 일본인 유학생과 그를 좋아하는 다른 여학생들과의 경쟁과 갈등을 보여주는 이 단편은 화자가 여성이다. 남성작가가 여성을 화자로 한다는 건 어쩌면 리스크를 감수해야 할테지만, 읽는내내 위화감이라곤 전혀 없었다. 오히려 여성의 심리를 너무나도 잘 포착해 내는 포인트에 웃음이 터지기도 했다. 그런데, 동경에서 재회한 마코토와 지영에게는 그후 어떤 일이 있었을까? 글쎄, 그건 아무도 모른다.
퀴즈쇼는 우연히 재회한 남녀 동창의 이야기이다. 처음에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겠거니 하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과거에 엄청난 사건이 있었다랄까. 재회의 기쁨이 사랑으로 이어진다라는 것보다는 그속에 감춰져있던 아무도 몰라줬던, 외면했던 그녀의 비밀이 가슴아팠다.
악어의 경우 환상적인 판타지느낌이 느껴졌다. 아마도 목욕탕에서 있었던 일이나 수영장에서 있었던 일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목소리란 것으로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고, 자신의 정체성을 걸었던 남자가 자신의 목소리를 잃었을 때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초단편인 바다 이야기를 읽으면서 뒷통수를 얻어맞는 느낌이었다. 일상을 탈출해 일탈의 기분을 느끼고자 여행을 떠난 바다. 그곳에서 일상이 부서진다. 이것 참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오늘의 커피역시 웃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했던 작품인데, 우리는 작가의 시점으로 이들을 보고 있기에 이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가늠이라도 하지, 실제로 그들 곁에 있던 사람들은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나 있을까?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여 주는 이 책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우리들과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때로 그들은 우리들의 상식을 벗어나는듯 행동하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그들을 통해 '어떠한' 쾌감을 느끼기도 한다. 몰래 엿보고 있다는 느낌이랄까. 당사자가 아니라면 경험하지 못한 일들을 엿보고 간접경험하는 느낌이랄까. 그러면서 어느새 그들의 삶에 나의 삶을 비춰본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아무도는 내가 두번째로 읽은 김영하의 소설이다. 겨우 두 권을 읽은 것 가지고 이 작가에 대해 판단하고 그 느낌을 글로 쓰기가 대단히 송구스럽다. 하지만, 확실히 하나 말하고 싶은 것은 하얀 속살을 기대하며 깎은 사과의 속이 빨개서 깜짝 놀라는 느낌을 주게 하는 작가가 김영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배신감이란 형태가 아니다. 기대 이상의 것을 주는 것이라고나 할까? 이 책에 담긴 13편의 단편들은 나와 같은 하늘 아래에서 숨쉬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그들의 심장이 팔딱팔딱 뛰며 자신들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듯 내 심장도 팔딱팔딱 뛰며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간다. 비록 서로 상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를지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