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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 아워
폴라 호킨스 지음, 이은선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8월
평점 :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
"지금은 고인이 된 위대한 은둔가 예술가,
베일에 싸여 있던 버네사 채프먼의 작품에 인간의 유골이 쓰인 게 밝혀져도
언론이 관심을 보이지 않을 수 있다고?
바람둥이로 악명 높았던 남편이 거의 20년 전에 실종됐는데?
그 시신이 여태 발견되지 않았는데?" (23p)
어쩜 똑같은 상황에서 사람들은 제각기 다른 생각을 하는 걸까요.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가, 그 기준이 다르기 때문일 거예요.
자신을 법의인류학자라고 밝힌 관람객이 작품에 사용된 뼈가 사슴의 흉곽이 아니라 인간의 유골이라고 단정하는 메일을 보내면서, 전시 중이던 미술관이 발칵 뒤집어졌는데, 작품의 소유권을 가진 페어번 하우스의 누군가는 언론에서 떠들어댈 가십으로 이용할 생각을 하고 있네요. 아직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사실에 대해 너무나 지나친 반응, 위험한 억측, 섣부른 판단을 하고 있어요. 애초에 그 메일이 아니었다면... 베일에 싸여 있던 예술가의 사생활, 더군다나 이미 고인이 된 예술가의 과거를 들추는 일은 없었겠지요.
《블루 아워》는 폴라 호킨스 작가의 심리스릴러 장편소설이에요. 이 소설의 주인공은 사람이 아닌 예술 작품이 아닌가 싶어요. 저자는 첫 장에서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는 히포크라테스의 명언과 함께 영국 시인 딜런 토머스의 시를 들려주고 있어요. "그러니 죽음이 결코 지배하지 못하리라. / 죽어서 벌거숭이가 된 이들 모두 / 바람과 서쪽 달에 사는 이와 하나되리라. / 뼈가 말끔히 뜯기고 그 말끔한 뼈마저 사라지면, 팔꿈치와 발에 별들이 붙으리라. / 하여 미칠지라도 모두 온전할 것이며, / 바다에 가라앉더라도 다시 솟구치고, / 연인을 잃어도 사랑은 잃지 않으리라. / 그러니 죽음이 결코 지배하지 못하리라." (7p) 죽음이 결코 지배하지 못하는 그것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어요.
소설 속 논란이 된 버네사 채프먼의 작품 <분할 Ⅱ>은 채프먼이 사금파리와 파운드 오브젝트를 한데 결합해 만든 일곱 점의 작품 중 하나로, 도자기와 나무와 뼈를 채프먼이 직접 제작한 유리 케이스 안에 필라멘트로 동그랗게 매달려 있는데, 도자기와 뼈는 일란성쌍둥이 같아요. 가운데에 금이 가고 옻칠과 금박으로 한데 접합한, 새하얗고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방추형의 조소 작품이라고 설명되어 있어요. 처음엔 버네사 채프먼의 일기를 읽으면서 그녀에 대해 탐색했고, 남편 줄리언의 실종이 그녀와 관련된 것은 아닌가를 의심했어요. 그러다가 문득 깨달았어요. 아, 이미 처음부터 다 보여줬다는 것을 말이에요. 보고도 보지 못하는 것, 안타깝게도 바로 앞에 뭐가 있는지 보지 못할 때가 있어요. 블루 아워 Blue Hour 는 일출 직전이나 일몰 이후에 하늘이 어슴푸레한 푸른색으로 변하는 짧은 시간을 뜻한대요. 세상이 고요하게 물드는 시간, 모든 것이 잠들고 아무것도 없는 무의 세계와 같은 순간에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동시에 모든 것이 될 가능성을 품고 있어요. 해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잠시 가리워졌을 뿐이라고, 그러니 진짜 중요한 것이 뭔가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그걸 볼 수 있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