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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경사 바틀비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295
허먼 멜빌 지음, 윤희기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8월
평점 :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
작가의 이름보다 더 유명한 소설 《모비 딕》을 읽고서야 허먼 멜빌의 생애를 알게 됐어요.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가난한 예술가의 고군분투기였네요. 포경선을 탔던 경험을 바탕으로 해양소설을 발표했으나 대중들은 외면했고, 작품 활동만으로는 생계가 어려워 세관 감독관으로 20여 년을 일했기 때문에 멜빌의 부고 기사에는 '문단 활동을 했던 시민'이라고만 적혀 있었다고 하네요. 솔직히 어릴 때 읽었던 《모비 딕》은 크게 와닿는 내용이 없었는데, 한참 시간이 흘러 다시 읽을 때는 뭔가 달랐어요. 관찰자의 입장에서 주인공의 시선으로 바뀌었다고 해야 할까요. 세상에서 가장 위험하고 긴 항해는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이제는 알 만한 나이가 되었나봐요. 그래서 명작 소설을 읽을 때는 작가의 생애를 함께 봐야 그 안에 담긴 의미들을 발견할 수 있는 것 같아요.
《필경사 바틀비》는 허먼 멜빌의 중단편집으로, 각 작품 속에서 외롭고 고단한 사투를 벌이는 주인공들을 만날 수 있어요.
이 책에는 말년에 쓰기 시작해 미완성으로 남긴 <빌리 버드>를 제외하면 모두 <모비 딕> 실패 이후 생활고에 시달리던 멜빌이 생계를 위해 여러 잡지사에 투고했던 작품들이라고 하네요. 어쩐지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바틀비의 행동이 조금 납득되는 측면이 있네요. 변호사인 '나'는 바틀비에게 필사본 대조를 하자고 요청했으나 바틀비는 매우 공손한 태도로 "하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29p)라고 답했고, "대체 왜, 왜 하고 싶지 않다는 거지?"라고 물으니 "하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라면서 똑같은 답변을 앵무새처럼 말하고 있어요. 이 작품에서는 끝끝내 바틀비가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본인의 입으로는 들을 수 없었네요. 그저 소문을 통해 그랬다더라, 거기까지 짐작할 뿐이에요. 바틀비는 자신의 상황을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아요. 애초에 도움을 바란 거라면 '그럴 마음이 없다'고 표현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마치 삶의 의지를 놓아버린 듯, 아무것도 할 마음이 없어진 바틀비를 보면서, 작품의 마지막 문장을 읊조리게 되네요. "아, 바틀비! 아, 인간이여!" (87p)
<총각들의 천국, 처녀들의 지옥>, <빈자의 푸딩, 부자의 빵 부스러기>, <행복한 실패>, <빌리 버드>까지 암울한 이야기를 담담하게 들려주는 허먼 멜빌은, 생전에는 가난한 무명 작가였으나 자신의 작품들 속에서는 주인공이었고, 후대에는 위대한 작가로 남았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