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탈 케옵스 - 마르세유 3부작 1부
장 클로드 이쪼 지음, 강주헌 옮김 / 아르테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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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느와르, 책으로 만나다.

우리 세대에게 익숙한 느와르는 주윤발, 장국영이 등장하는 영화였다. 잔뜩 폼 잡은 남자들이 의리 때문에 죽고 사는 이야기, 주먹질이나 총질도 폼 나게 하는 이야기.

그 땐 참 재미있었는데.......

그런데 마르세유는 지구 어디쯤일까?

프랑스 지중해 연안에 있는 무역항 도시라는데 다양한 이민족이 살고 있다고 한다. 그 곳이 어떤 곳인지 모르지만 <토탈 케옵스>를 읽고 나니 씁쓸하고 허무하다. 전혀 몰랐던 장소에서 벌어지는 폭력, 살인, 섹스, 마약 등 어둡고 칙칙한 모습 때문에 지중해의 아름다운 풍경이 묻혀버린다. 어쩌면 치열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에겐 아름다운 풍경은 사치일지도 모른다.

이 책에서 굉장히 인상적인 것은 목차다.

15개의 목차가 마르세유를 표현한 문장이다. 이를테면 ‘질 게 뻔해도 싸울 줄 알아야 하는 곳’,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용기 있게 나서야 희망이 있는 곳’, ‘끝까지 살아남아 명예를 지켜야 하는 곳’, ‘세상을 향한 증오가 유일한 시나리오인 곳’ 등이다.

느와르답게 희망보다는 절망적이고 절박한 느낌이 강하다. 평범한 사람들의 행복과는 거리가 먼 마르세유의 사람들은 그래도 천당 같은 세상에서 죽은 듯 사느니 지옥 같은 그 곳에서 부대끼며 사는 것을 선택한다.

작가는 첫머리에 이 모든 이야기는 허구임을 밝힌다. 몇몇 사건은 실제 사건과 동일한 내용이 나오지만 등장인물들은 분명히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이다. 당연한 말이다. 실제 마르세유가 그런 곳이라면 누가 거기서 살고 싶겠는가?

그러나 한편으론 작가가 마르세유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느낄 수 있다. 50세에 첫 소설이라는 이 책은 그의 로망이 아닐까 싶다. 남자들이 꿈꾸는 느와르적인 세상에서 주인공으로 사는 것.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인생이라면 더 자극적이고 매력적으로 느껴질 테니까.

제목 <토탈 케옵스>는 ‘대혼란’을 뜻하는 신조어라고 한다. 누가 무엇이 대혼란인가?

주인공 파비오는 형사다. 그의 어릴 적 친구가 죽었다. 복수를 하겠다고 총질을 하다가 자신도 총을 맞고 죽었다. 그를 짝사랑했던 아랍인 아가씨 레일라가 나쁜 놈들에게 살해당했다. 창녀 마리 루와 만나다가 기둥서방에게 얻어맞았다. 두 친구가 사랑했던 여인 롤을 파비오도 사랑했다. 사실 사랑이라기보다는 의리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느와르의 주인공들은 진정한 사랑에 서툴다. 자신이 원하는 삶을 착각하며 사는 것 같다. 형사인 파비오나 깡패인 마누, 우고나 별로 다를 게 없다. 서로의 입장이 다른 것이지 사는 모습은 비슷하다. 여자를 진정으로 사랑할 줄도 모르고 현재의 본능에만 충실한 단순무식한 남자들. 여기서 무식하다는 표현은 지적수준이 아니라 행복이 뭔지도 모르는 바보란 뜻이다. 느와르, 토탈 케옵스의 주인공 파비오는 딱 영화 주인공 스타일이다. 영화 속에서는 제법 매력적인 남자일지는 모르겠지만 현실에서라면 딱 질색이다.

거칠고 난폭한 것이 남자들의 세계라고 뻐기는 철부지들. 인생이 뭔지도 모르고 폼만 잡다가 끝날 찌질한 인생들이다. 어릴 때 재미있다고 봤던 홍콩 느와르 영화와 이 책은 꽤 흡사하다. 영화처럼 머리를 비우고 즐기기에 제격이다. 진지하게 바라보면 모든 이야기가 너무 심각해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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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리새 - 하 - 이승과 저승을 잇는 새 Nobless Club 9
김근우 지음 / 로크미디어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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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권은 본격적으로 피리새의 비밀이 하나씩 벗겨진다. 일곱번째 공주가 되어 서역으로 떠나는 피리새를 보필하는 가람은 입장이 뒤바뀐다. 하루아침에 하녀였던 피리새가 공주가 된 것이다. 원래부터 피리새를 보호하던 관계였으니 실질적인 변화는 없는 셈이다. 피리새의 존재가 중요한 이유는 그녀만이 이 나라를 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판타지라서 무조건 가볍고 재미 위주인 것은 아니다. 바리데기 공주 이야기 속에 담긴 교훈처럼 그녀가 겪는 시련은 더 큰 존재가 되기 위한 과정이다. 이승과 저승을 잇는 존재로서 현실에서 고통받는 백성들의 마음을 읽어내고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다. 피리새는 더 이상 가녀린 소녀가 아니다. 자신의 본분을 깨닫고 인정한 뒤로는 점점 강한 모습을 보여준다.

문득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피리새는 어떤 존재일지 궁금해진다.

딱히 정해진 누구라기 보다는 힘들고 지친 이들에게 필요한 희망이 아닐까 싶다.

요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올바르게 살 수 있는 힘과 잘 살 수 있다는 믿음인 것 같다. 힘없고 약한 사람들이 짓밟히고 고통 당하는 것은 판타지 세상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들을 구원할 사람이 연약한 소녀라는 사실이 극한 현실을 더욱 강조한다. 물론 피리새를 보호해주는 강인한 가람이 곁에 있지만 그의 존재는 보조적이다. 실제로 굳은 의지를 갖고 혼자 나서야 될 사람은 피리새 자신이다. 이야기 내내 피리새가 강인하게 변모해가는 과정은 바리데기의 핵심을 그대로 전해준다.

왜 하필 바리데기 공주 이야기였을까?

처음에 바리데기 설화를 들었을 때는 억지스러웠다. 일곱번째 공주로서 버려진 것도 억울한데 자신을 버린 부모를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걸고 모험을 떠난다니 현실에선 말도 안 될 일이다. 바리데기가 평범한 사람이라면 버려진 사실에 대해 원망하고 분노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바리데기는 특별하다. 오로지 죽어가는 부모를 살리려는 일념으로 시련을 견뎌낸다.

바리데기는 불합리한 세상을 향해 원망하기 보다는 그 세상을 살리기 위해 앞장선다. 병들어 죽어가는 세상의 구원자, 바리데기 피리새는 엄청난 상징을 지닌 존재다.

작가의 의도는 모르겠지만 흥미로운 판타지 소설 속에서 뭔가 깊은 뜻을 헤아려본다.

아무래도 황석영 작가님의 <바리데기> 영향이 크다.

오랜만에 판타지 소설을 읽으며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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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리새 - 상 - 나무를 죽이는 화랑 Nobless Club 8
김근우 지음 / 로크미디어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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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 작가님의 <바리데기>를 읽은 지 얼마 뒤에 만난 책이다. 이 책 역시 바리데기 설화를 모티브로 했지만 전혀 다른 매력으로 독자를 사로잡는다. 바로 판타지가 그것이다. 읽는 내내 두툼한 책이 술술 넘겨져서 오히려 아쉬울 정도였다.

제목 <피리새>는 한 소녀의 이름이다. 바리데기 공주로 밝혀질 소녀. 그러나 이 이야기는 판타지답게 뻔한 바리데기 설화와는 다른 비밀이 감춰져 있다. 상권에서는 피리새보다는 화랑 가람의 이야기에 비중을 두었다. 안하무인, 요즘 속된 말로는 돌+아이 같은 면을 가진 이 남자는 피리새에게만은 상냥하다. '둘 사이에 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라는 궁금증을 갖고 지켜봤지만 워낙 나이 차가 나는 두 사람인지라 특별한 로맨스는 없다. 

<피리새>는 나무귀신, 이무기, 무당 등이 등장하여 기묘한 사건들이 벌어진다.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파견된 두 명의 관리가 있다. 마휼과 서다함. 상관인 마휼은 다혈질에 과격한 스타일인데 부하인 서다함은 늘 차분하게 예리한 판단을 한다. 이들이 가람을 만나러 온 이유는 무엇일까?

판타지 소설에서 궁금한 내용을 미리 안다면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그래서 줄거리는 생략한다.

여하튼 작가의 상상력에 박수를 보낸다. 똑같은 바리데기 공주 이야기를 가지고 전혀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내다니 놀랍기만 하다. 음식에 비유하자면 황석영 작가님의 <바리데기>는 정통 코스 요리같다. 현실에 바탕을 둔 이야기라서 바리데기가 겪는 시련을 보면서 눈물 날 정도로 마음이 아프다. 반면 김근우 작가님의 <피리새>는 최첨단 퓨젼 요리같다. 난생 처음 맛보는 소스를 곁들여서 원래 재료가 무엇인지 모를 정도다. 판타지는 재미있고 흥미로운 대신 현실과 동떨어진 느낌이 강하다. 피리새는 신비로운 소녀로서 미스터리한 사건을 이끄는 구심점 역할이다.

일상이 지루하거나 재미없는 날에 읽으면 좋을 책이다. 재미로 읽다보면 어느 순간 현실과 맞닿는 부분이 생긴다. 가람이 운명을 대하는 태도는 매우 저돌적이다. 순응한다기 보다는 찾아나서는 느낌이다. 원래 자신의 운명대로 가는 것이겠지만 조금의 망설임이나 주저함이 없다. 돈키호테같은 존재, 그렇게 살고 싶다. 또한 가람과 피리새의 관계는 인연의 소중함을 느끼게 한다. 여기서는 거의 운명적인 관계로 묘사되지만 현실 속의 우리도 간과해서는 안 될 부분이다.

귀신이 등장하고 무당이 사람들을 현혹하는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 가람이 나선 것이다. 투철한 소명의식을 지닌 가람의 모습이 점점 매력적이다. 역시 주인공답다.

만약 이 소설이 드라마나 영화로 나온다면 가람 역은 누가 맡을지 내 마음대로 캐스팅해본다.

판타지 소설을 읽으며 상상 놀이를 즐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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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운명의 숲을 지나다 - 조선의 운명담과 운명론 조선의 작은 이야기 3
류정월 지음 / 이숲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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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운명을 믿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잠시 주저하게 된다. 여기서 믿는다는 의미에 따라 전혀 다른 답변이 나오기 때문이다.

타고난 운명이 있다고는 생각하지만 고정불변이 아니라고 믿기 때문에 운명에 연연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운명은 믿음의 문제가 아닌 깨달음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

세상은 요지경, 잘난 사람은 잘난대로 살고 못난 사람은 못난대로  산다~~~

유행가 가사처럼 잘나고 못난 것이 운명이라면 세상은 참 불공평하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하는 일마다 잘 풀리는데 누구는 속된 말로 재수가 없는가보다. 요즘처럼 살기 팍팍한 때에 모르긴 몰라도 점집은 호황일 것이다.

'언제쯤 취직할 수 있을까? 사회적인 성공 여부 혹은 결혼 가능성은 어떠할까? 어려운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할까?' ......

경제가 어렵고 미래가 불확실하니 무엇인가에 의지하고 매달리는 심리일 것이다. 사주팔자, 관상, 손금, 풍수 등에 관심은 많지만 실제로 무당에게 점을 본다거나 사주를 본 적은 없다. 나의 관심은 순전히 호기심에서 비롯된 것이지 무속신앙에 대한 관심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로 그와 관련된 책에 관심이 많다.

이 책은 운명을 주제로 역사 속 이야기를 들려준다.

운명의 존재, 운명의 인식, 운명의 가치라는 세 가지 틀을 놓고 동양과 서양의 이야기가 교차된다. 다양한 이야기들은 운명적인 삶을 보여준다. 과연 이 이야기만으로 운명의 비밀을 알아낼 수 있을까? 지나친 기대는 금물이다. 이 책은 토정비결이 아니다. 사실 토정비결도 우리의 운명을 정확히 알려주지는 못한다. 그저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를 바란다.

자신의 미래, 운명이 궁금하다면 점집보다는 이 책이 훨씬 도움이 될 것이다. 속시원하게 자신의 미래를 알려주지는 않지만 적어도 엉뚱한 미래를 알려줄 위험은 없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미래가 아니라 지금 이순간이다. 거대한 운명 앞에 미약한 인간이지만 운명을 탓하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하며 살기에 희망은 있는 것이다. 저자의 말처럼 시지프스 신화는 신에게 벌을 받는 인간의 모습이 아니라 포기하지 않는 인간의 강한 의지를 이야기한다. 

운명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그것은 각자의 몫이다. 운명에 대한 해답은 이 책이 아닌 바로 자기 자신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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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낭소리
인디스토리 엮음 / 링거스그룹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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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들수록 주책이다. 눈물이 많아진다. 그래서 눈물나는 이야기나 영화는 되도록이면 피하고 싶다.

남들보다 특별히 착하거나 감성이 풍부하지 않은데 눈물샘이 고장난 것인지 약간의 자극에도 눈물이 난다. 그게 참 마음에 안 든다. 감동이란 마음이 움직여서 실질적으로 변화가 있어야 되는데 그냥 마음만 움직이고 그뿐이다. 그래서 부끄럽다. 

영화 <워낭소리>가 개봉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의 호평을 들으면서도 안 본 이유는 그 때문이다. 헛된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서다. 그런데 <워낭소리>가 책으로 출간되었다하니 이번에는 피하지 않기로 했다.

이 책은 영화 <워낭소리>가 만들어지기까지 우여곡절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영화가 완성되기까지 10년이 걸렸는데 의외로 책은 얇기만 하다. 슬픔과 고통도 극한 상태에서는 침묵하듯이 <워낭소리>는 응축된 글로 전해진다. 이충렬 감독이 제작 당시 얼마나 절박했는지, 보여지는 영상 뒤에 어떤 진실이 숨겨져 있었는지 이야기한다.

다큐멘터리는 있는 그대로를 영상에 담는다. 하지만 수많은 영상들 중에 편집이라는 과정은 진실과 다른 메시지를 전달할 수도 있다. 그는 고백한다. 할아버지와 늙은 소를 촬영하는 일이 너무 힘들어서 소가 어서 빨리 죽었으면 했다고. 기나긴 제작 과정 속에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감독이란 직업이 화려해보이지만 그건 성공한 감독의 경우고, 이제 겨우 독립 영화를 찍은 햇병아리 감독에게는 인고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왜 그는 늙은 소와 할아버지라는 주제를 선택한 것일까?

또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은 것일까?

농사꾼 할아버지와 늙은 소는 현대인들에게는 잊혀진 존재다. 엄연히 지금 공존하지만 관심에서 멀어진 지 오래다.

문득 <전원일기>라는 드라마가 생각난다. 워낙 오랫동안 방영되어 아역으로 나온 배우가 성인이 될 때까지 실제 이야기처럼 느껴졌던 인기 드라마였다. 그런데 시대를 반영하듯 더 이상 시청자들의 호응이 없어지면서 종영되었다. 그 뒤로 비슷한 농촌 드라마들이 하나 둘 자취를 감췄던 것 같다. 고향을 떠올리며 가슴 훈훈한 이야기로 웃음과 감동을 주었던 농촌 드라마가 사라지면서 우리네 정서도 변한 것 같다. 아니, 세상이 변했기 때문에 사라진 것이다.

이충렬 감독의 선택은 운명적인 것 같다. 숱한 실패로 절망하던 그에게 <워낭소리>는 마지막 남은 희망이었다.

따뜻하고 넉넉한 우리네 인심은 농사 짓는 고향 마을과 함께였는데 지금은 깍쟁이들이 판 치는 세상이 됐다. 눈 뜨고 코 베가는 살벌한 도시 풍경의 드라마나 영화가 판을 쳤다. 한 때는 깡패 영화가 인기였으니까.

2009년 1월 드디어 <워낭소리>가 개봉되었다. 과연 이 영화가 성공할 수 있을까라는 우려 속에 기적같은 일이 벌어졌다. 대한민국 300만이 이 영화를 보며 눈물 흘렸다. 주인공은 할아버지와 할머니, 늙은 소가 전부인데다 특별한 대사도 없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성공한 것이다.

농사꾼 노부부와 늙은 소는 메마른 감성을 자극하며 삶의 소중한 가치를 돌아보게 한다. 바쁜 현대인들에게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다가와 진한 감동을 전해줬다. 이제는 영화를 볼 준비가 됐다. 감동의 실체를 알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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