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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섬과 박혜람 - 제20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임택수 지음 / 나무옆의자 / 2024년 5월
평점 :
스치듯 지나가는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마음 속에 들어와 오래 머무는 이야기가 있어요.
얼굴이 다르듯 마음도 달라서, 똑같은 이야기라도 사람들마다 마음이 보여주는 반응은 다를 수밖에 없어요.
《김섬과 박혜람》은 어떤 이야기일까요. 제목처럼 선명하게, 김섬과 박혜람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들려주고 있어요.
첫 장면은 프랑스에서 도슨트로 일하고 있는 혜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요. 준오의 집에서 함께 살며 행복한 가정을 꿈꿨으나 조금씩 어긋나버린 관계는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지경이 되었고, 혜람은 작은 원룸을 구해 혼자 지내고 있어요. 미술관 해설뿐 아니라 개별적으로 관광객 안내일을 하고 있는 혜람에게 이경준은 파리의 공동묘지를 방문하고 싶다고 요청했고 두 사람은 유명한 오스카 와일드의 무덤을 찾아갔어요.
"당신을 평범한 사람으로 대하는 이는 사랑하지 마세요." 혜람이 말했다.
"네?" 이경준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혜람을 보았다.
"오스카 와일드의 말이에요." (14p)
사실 혜람의 입을 통해 전해진 오스카 와이들의 말이 가슴에 콕 박혔어요. 혜람은 사랑받지 못하고 있구나... 현재 혜람을 바닥으로 가라앉게 만든 정체가 무엇인지를 추측하느라 정말 중요한 걸 놓쳤더라고요. 관광 안내를 끝낼 무렵 이경준이 "아, 잠깐만요."라고 말하며 혜람의 어깨 쪽으로 손을 뻗어 벌레 하나를 떼어내 줄 때, "어디서 왔을까?" (15p)라는 말이 찻물을 우려내듯 시간이 흐르고 난 뒤에야 그 의미가 보였어요. 혜람은 홀로서기를 결심하고 한국으로 돌아왔고, 절친인 김섬의 집으로 갔어요. 김섬은 작은 타투 스튜디오를 운영하던 중 트라우마로 힘들어하는 한 남자를 사랑했지만 그의 상처를 타투로 가려주듯이 그를 품어주기 어렵다는 걸 깨닫게 되었고, 고민 끝에 자기 안에 생겨난 또 하나의 섬을 받아들이기로 했어요. 이사한 동네를 산책하다가 꽃집 문에 붙은 원데이 클래스 광고를 보고 신청한 김섬은 강사에게 꽃다발 만드는 법을 배웠는데, 강사는 이런 얘기를 해줬어요.
"식물들은 소리 없이 천천히 변해 가요. 수동적으로 사는 것 같지만, 오히려 자생적인 시간을 살죠.
나무가 자라는 속도를 눈으로 볼 수는 없어요 오늘의 나무는 어제의 그 나무가 아니랍니다." (266p)
그때 테이블 위에 어디서 왔는지 모를 작은 벌레 한 마리가 기어다녔고, 김섬은 "이게 뭘까요?"라고 말했고, 강사는 벌레 이름을 알려주면서, "어떻게 왔을까?" (269p) 라고 말했어요. 아하, 이 장면에서 깨달았어요. 당신과 나의 관계는 뭘까, 어쩌다 우리는 이렇게 되었을까... 이러한 질문들은 결국 하나의 장면으로 답을 얻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