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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 읽는 남자
안토니오 가리도 지음, 송병선 옮김 / 레드스톤 / 2016년 11월
평점 :
<CSI 과학수사대>와 같은 드라마나 영화를 즐겨보는 사람들에게 추천할 만한 소설입니다.
500페이지가 넘는 장편인데도 순식간에 페이지가 넘어가는 흡입력이 있습니다.
다만 한 가지 불편했던 점은 등장인물들의 이름입니다.
주인공의 이름이 '자', 판관의 이름은 '펭', 점쟁이 사기꾼의 이름은 '슈', 도망 중에 만난 배의 선장 이름은 '왕', 학원의 교수 이름은 '밍' ...
한 글자로 된 이름이라서 뭔가 헷갈리고 이야기의 흐름을 끊는 요소랄까.
예를 들면 "자는 그간 일어난 모든 일들로 지치고 괴로웠다. 그는 눈을 감았다...." 라든가 "선주 왕은 닻을 거두고 선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처럼 문장에서 '자'라는 이름과 "왕"이라는 이름을 신경쓰지 않으면 이야기와 무관하게 다른 의미나 이미지가 떠오르는 것입니다. 어찌보면 굉장히 사소한 부분일 수 있는데 제 경우에는 소설 속 인물들의 이름은 중요하게 보는 편이라서 더 신경이 쓰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가 느낀 소소한 불편함의 원인을 책의 말미에 가서야 알게 됐습니다. 바로 작가의 말.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이 작품의 내용을 대략 구상한 후 처했던 첫번째 어려움은 등장인물들의 이름이었습니다. 중국어는 매우 복잡한 언어입니다. 대부분의 단어는 단음절이며, 하나의 음절은 다섯 개의 서로 다른 성조로 발음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 송, 당, 밍, 펭, 팡, 강, 동, 쿵, 퐁, 콩과 같은 성을 지닌 등장인물들이 모두 소설에 나온다고 생각해봅니다. 아마 세 페이지도 못가서 독자들은 심한 두통을 느끼면서 책을 덮게 될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피하기 위해, 나는 주요 역사적 인물들의 이름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이미 사용한 이름과 유사하거나 혼란을 야기할 수 있는 이름은 다른 것으로 대체했습니다...." (571-572p)
이럴수가, 전 소설의 결말보다 마지막으로 읽은 작가의 말을 읽으면서 반전의 묘미를 느꼈습니다. 작가가 느꼈던 어려움을 독자 입장에서 똑같이 느꼈다니...
작가 안토니오 가리도는 스페인에서 태어났고 산업공학을 공부했으며 현재 발렌시아 공과대학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독일을 배경으로 한 첫 소설 <번역가>로 큰 호평을 받았고 지금 제가 읽은 <시체 읽는 남자>가 두번째 소설로 2012년 사라고사 국제 역사소설상을 수상했다고 합니다. 그는 뉴델리에서 개최된 인도 법의학과 독물학 학술총회에 초대를 받았고 그곳에서 법의학 초기의 역사를 다룬 글을 발견합니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법의학자로 알려진 중국 남송시대의 학자 송자 (宋慈 , 1186~1249)를 심층적으로 다룬 글을 읽은 후 이 소설을 구상하게 됩니다. 송자의 일생은 수십 권의 책에서 발췌한 서른 개의 문단에 불과했기 때문에 송자가 쓴 법의학 전서인 <세원집록>을 바탕으로 법의학 사건을 중심으로 한 소설이 완성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스페인 공과대학 교수님이 중국 송나라 시대 법의학자를 소설로 재탄생시킨 것입니다. 우리가 이 소설을 통해 만나는 송자는 역사적 사실에 기반을 두고 있으나 엄밀히 말하면 가공의 인물일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책을 읽으면서 시대적 배경이 송나라 시대라는 걸 거의 의식하지 못했습니다. 대신에 송자라는 젊은이가 아픈 여동생을 데리고 험한 세상에 맞서 싸우는 모습에 더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파란만장한 인생 드라마를 본 것 같습니다.
스페인에서는 역사소설로 인정받은 이 소설이 다른 나라의 어떤 사람에게는 그냥 멋진 소설로 기억됐다는 것입니다. 소설은 그냥 소설인데 굳이 장르를 분류하는 게 별로였는데 이부분에 대해 작가가 언급해줘서 깜짝 놀랐습니다. 구태여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마지막으로 호세 마누엘 라라가 남긴 말로 자신의 생각을 밝힙니다.
"실제로는 단지 두 종류의 소설만 존재한다. 좋은 소설과 나쁜 소설."
다음은 <시체를 읽는 남자>에서 인상적인 부분을 옮겨 적었습니다. 다 읽고나서 뭔가 마음에 간직할 것이 있다면 그건 좋은 소설일까요, 나쁜 소설일까요.
"우리가 눈에 보이는 것을 원할 때는 팔을 펼쳐 그것을 잡으면 됩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꿈이라면, 우리의 마음을 펼쳐야 합니다."
"분명한가? 종종 꿈은 우리를 실패로 이끌기도 하지."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조상들이 보다 나은 세상을 꿈꾸지 않았더라면, 아직도 우리는 넝마를 걸치고 있을 겁니다. 제 아버지는 언젠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공중에 궁궐을 지으려고 안간힘을 써도, 그것은 시간을 허비하는 게 아니라고요. 저는 그 궁궐을 지탱한 초석을 짓기 위해 모든 힘을 다할 것입니다." (275-276p)
자는 다정한 눈빛으로 늙은 교수를 쳐다보았다.
"언젠가 후디에가 제게 말하길, 펭은 사람이 죽는 방법을 수없이 많이 알고 있다고 했습니다. 아마도 그건 사실일지 모릅니다. 아마도 죽는 방법이 수없이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확신하는 건, 사는 방법은 단 하나만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567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