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미 (출간 15주년 기념 백일홍 에디션) - 박완서 산문집
박완서 지음 / 열림원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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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나뭇잎이나 꽃잎을 책 사이에 껴두었다가 코팅하여 책갈피로 썼던 적이 있어요. 누군가와 함께 걷던 길에 주운 나뭇잎 한 장에 추억을 담아 고이 간직하는 나름의 방법이었던 거죠.  지금은 너무 까마득한 옛날 이야기가 되어버린 것 같아 아쉬웠는데, 이 책을 만났네요.

《호미》 는 박완서 작가님의 산문집이에요.

2007년 초판 출간 이후 꾸준히 사랑받았던 책, 2022년 출간 15주년 기념 백일홍 에디션이 새롭게 나왔어요.

아치산 아래 집을 짓고 전원생활을 하던 작가님의 소박하고 아름다운 일상이 담겨 있어요. 거의가 다 일흔이 넘어 쓴 글들인데 작가님의 말을 빌리자면, "돌이켜보니 김매듯이 살아왔다. 때로는 호미자루 내던지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후비적후비적 김매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 결과 거둔 게 아무리 보잘것없다고 해도 늘 내 안팎에는 김맬 터전이 있어왔다는 걸 큰 복으로 알고 있다." (262p)라고 하네요.

호미는 주로 여자들이 김맬 때 쓰는 도구인데, 요즘은 마당을 가꾸기에 이만한 도구가 없다고 해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호미라서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원예가 발달한 외국에도 없는 우리나라 고유의 발명품이라고 해요. 호미야말로 알면 알수록 단순 소박하면서도 여성적이고 미적일뿐 아니라 기능적으로도 매우 훌륭한 도구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네요. 그래서 호미 예찬이 고스란히 작가님의 삶과 글을 대변해주는 것 같아요.

작가님은 친구 부부가 몇백만 원 빌려간 돈을 갚고 나서야 편지와 함께 깻잎 장아찌와 꽃씨를 보낸 것을 보면서, 우리 70대들은 그렇게 변변치 못하고 소심하다며 한숨 짓다가, 역대 정권의 어마무시한 비리에 나라가 망하지 않는 건 우리 70대들 덕이 아닐까라고 이야기하네요. 정직하고 정당한 노동의 대가로 자식을 키워온 70대들은 단돈 몇푼 빚지고도 못 살 만큼 간이 작지만 간 큰 이들이 아무리 말아먹어도 이 나라가 아주 망하지 않는 건 바로 간 작은 이들이 초석이 되어준 덕분이 아니냐고요. 맞는 말씀이에요. 전부 잘했다는 게 아니라 앞서 간 이들의 노력과 희생이 있었기에 뒤따르는 이들이 편히 갈 수 있었어요. 짧은 시간에 이토록 성장한 나라는 우리나라뿐이라고 하잖아요. 전쟁을 겪고 배고픔을 버텨온 세대가 밭을 갈고 터전을 마련했기에 지금의 풍요로움을 누릴 수 있는 거죠.

문득 이 책을 읽으면서 나의 70대를 상상해보았어요. 꽃과 나무에게 말을 걸며 호미로 마당을 가꾸게 될런지는 모르겠지만 꼭 한 가지는 지켜야겠다는 다짐을 했네요. 나잇값... 삶을 무사히 다해간다는 자세로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살고 싶어요.



이슬에 젖은 풋풋한 풀과 흙 냄새를 맡으며 흙을 주무르고 있으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과 평화를 맛보게 된다.

이 나이까지 살아오면서 행복했던 순간들도 남들 못지않게 많았고, 심장이 터질 듯이 격렬하게 행복했던 순간들은 지금도 가끔 곱씹으면서 지루해지려는 삶을 추스를 수 있는 활력소로 삼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크고 작은 행복감의 공통점은 꼭 아름다운 유리그릇처럼 언제 깨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섞여 있다는 것이다.

자연의 질서를 긍정하고, 거기 순응하는 행복감에는 그런 불안감이 없다. (21-2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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