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도와 7년 전쟁 - 신용권의 역사기행
신용권 지음 / 지식과감성#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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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관련 서적에서 대마도를 주제로 한 책은 처음인 것 같습니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 위치한 대마도는 거리로만 따져보면 일본보다 부산에 훨씬 더 가깝다고 합니다.

이토록 지리적으로 가까운 대마도에 대해, 우리의 관심은 그리 크지 않은 걸 보면 '가깝고도 먼 나라'라는 표현이 딱 맞는 것 같습니다.


<대마도와 7년 전쟁>은 한·일 역사의 현장으로서 대마도를 새롭게 조명한 책입니다.

저자는 한국과 일본을 가르는 경계(境界)의 땅인 대마도를 통해 역사를 되돌아보고, 역사적 교훈을 깨달아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1419년(세종 1년) 7월 11일 세종에게 양위하고 태상왕으로 물러나 있던 태종의 명에 의해, 대마도 정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태종이 사망하자 세종은 일본에 대한 선린정책으로 대마도주의 합법적 지위를 인정했습니다. 대마도 정벌은 조선이 벌인 첫 해외원정이었지만 전략적 가치를 간과한 전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고 합니다. 만약 조선이 직접 관리를 보내 지배 체제로 만들었다면, 대마도를 영구히 조선 영토로 만들 수 있었고, 이후 참혹했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7년 전쟁을 막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세종실록>에는 "대마도라는 섬은 본시 계림(鷄林, 신라의 별칭 지금의 경상도)에 속한 우리나라 땅이다. 다만 땅이 몹시 좁은 데다 바다 한가운데 있어 내왕이 불편한 관계로 백성들이 들어가 살지 않았을 뿐이다. 그런데 자기네 나라에서 쫓겨나 오갈 데 없는 일본 사람들이 몰려들어 그들의 소굴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26p)


1510년(중종 5년) 4월 4일에 발생했던 『삼포왜란』은 조선거류 왜인의 급격한 증가가 그 원인이었습니다. 

... <삼포왜란 1510년 4월 4일~ 4월 19일>이 끝난 후에도 <을묘왜변 1555년 5월> 등을 거쳐, 1592년(선조 25년) 4월 13일 《임진왜란》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27p)


조선은 7년간 참담한 두 번의 전쟁을 겪고도 안민을 실천하지도 못했고, 양병을 육성하지도 못했으며 당쟁은 여전히 뿌리 뽑지 못했습니다. 결국 정유재란이 끝난 뒤 38년만인 1636(인조 14년) 12월 1일, 다시 청의 침략을 받아 『병자호란』을 맞이했습니다. 조선은 두 번의 왜란과 두 번의 호란으로 엄청난 수의 백성을 잃었고, 경작지는 황폐화되어 백성의 삶은 궁핍해졌습니다. 이것은 앞서 잘못된 정책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태종 때는 바다에 나가 무역하는 것을 규제했는데, 세종 때는 아예 바다에 나가는 것을 금지하였습니다. 신라와 고려의 사신과 상인은 주로 해로(海路)를 통해 중국을 건넜으나, 조선의 사행은 반드시 육로(陸路)로만 통했습니다. 조선이 왜구침구로 입은 가장 큰 폐해는 문화적 자폐주의에 빠져, 해양을 통한 문화 유입의 다양성을 스스로 저버린 것입니다. 조선과 명이 취한 해금정책은 스스로의 목을 조이고, 바다를 독점한 일본에게는 엄청난 이익을 안겨 주었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300년 만에 일어난 국권피탈은 히데요시가 실패한 조선 정벌의 유지를, 명치유신의 주역들이 이어받아 성공시켰다는 점에서 메이지 유신은 제2의 임진왜란으로 볼 수 있습니다. 임진왜란에서 정한론을 주장했던 이들이 태평양전쟁의 전범을 배출했고, 현재의 아베 신조 총리로 이어지게 됩니다.


대마도는 일본 영토로 편입되기 전인 1869년(고종 6년)까지 일본과 조선에 양속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조선의 땅이었던 대마도를 지켜내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 될 줄이야.

그러나 후회로 끝나는 건 무의미합니다. 역사적 교훈을 지혜로 삼아 더 나은 역사를 써내려가야 할 때입니다. 저자의 말처럼 거시적 안목으로 동북아시아의 미래를 그려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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