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장을 열면 철학이 보여 탐 그래픽노블 1
쥘리에트 일레르 지음, 세실 도르모 그림, 김희진 옮김, 김홍기 감수 / 탐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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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과 철학의 조합이 신선해요.

둘 중 어느 한 분야에만 관심을 가졌다고 해도 끌릴 만한 내용이에요.

<옷장을 열면 철학이 보여>는 탐 그래픽노블 시리즈의 첫 번째 책이에요.

저는 그래픽노블을 무척 좋아하기 때문에 첫 장부터 즐거운 마음으로 볼 수 있었어요.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저널리스트 쥘리에트 일레르와 그래픽 디자이너 세실 도르모가 함께 펴낸 이 책은, 패션의 역사 속에서 철학적 담론을 담아낸 패션 인문학 여행이에요.

수업이라고 하기엔 너무 진지하고 지루하니까, 신나는 여행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아요.


"여자가 소설을 쓸 때, 그는 끊임없이 기성의 가치들을 바꿔 나간다.

남자가 하찮게 여기는 것을 흥미롭게 포착하고,

중요하게 보는 것을 사소하게 그려내기 위하여."

    -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   (4p)


패션의 역사는 인류가 옷을 입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러나 단순히 알몸을 감추려고 천 자락을 두르는 것과는 구분해야겠죠?

유럽에서 패션이라는 것이 생긴 건 14세기 중반이 지나서였대요. 미스터리한 사실은, 패션이 날개를 펼친 때는 서구 사회가 굶주림과 경제적 퇴보, 전쟁, 도적 떼에 시달리던 시기라는 거예요. 봉건 제도의 위기 속에서 상인 계급이 떠올랐고, 귀족 계급은 그들과 구별되고 싶어 했대요.  뭐, 어떤 현상이 하나의 이유만으로 설명될 수는 없겠지만, 패션의 출현은 사회적인 관계, 즉 시대 정신이 변했다는 걸 보여 주고 있어요. 그러니 패션은 경제적 반응이라기보다 미학적 행동으로 봐야 한대요.


아참, 이 책의 등장인물부터 소개해야겠네요. 친절하고 상냥하게 패션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은 디자이너 지망생 '오데트'예요. 그 옆에서 맞장구치거나 핵심적인 질문을 던지는 햄스터는 바로 패션 인류학자인 '장폴'이에요. 뚱뚱한 고양이인줄 알았더니 햄스터였더라고요.

중간중간 <장폴과 함께>라는 코너를 통해서 장폴의 지성과 유머를 만날 수 있어요.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해 답해주는 거예요.


"텅 빈 냉장고를 채우는 대신 왜 새 원피스를 사는 걸까?"

"밥 한 끼 대신 원피스를 사는 건 어리석은 일일까?"


"그렇지 않아요. 철학자 코르넬리우스 카스토리아디스의 말에 따르면요.

식료품 저장고보다 옷장을 더 아끼는 건 현실의 쾌락을 '표상의 쾌락'으로 대체하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인간은 현실이 아닌 정신적 표상만으로도 만족을 느낄 수 있는 존재예요.

쉽게 말해, 배불리 먹는 것보다 원피스를 입은 아름다운 자신을 보여주는 것에 더 만족할 수도 있다는 거죠.

... 우리가 실제의 자기 모습보다 이미지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경우가 모두 해당돼요.

... 복근 운동은 너무 힘들어!  초콜릿은 날 이해해 준다고.  ....

(이 지방덩어리야, 무슨 소리야? 우에엥)"    (20-21p)


패션은, 어쩌다가 왜 여성의 전유물이 되었을까요?

역사적으로 보면 남성도 패션을 열광적으로 즐겼던 시대가 있었대요. 남자와 여자가 모두 사치스러움을 누리다가, 18세기 말부터 바뀐 거래요.

심리학자 존 칼 플루겔에 따르면 이때 남자들이 화려한 패션을 포기함으로써 모든 것이 바뀌었대요. 이를 '남성성의 포기'라고 불러요.

복식사의 중대한 전환점이라고 하네요. 화려한 옷을 버린 신사들은 실용적인 것만 관심을 가지게 되었대요.

플루겔을 인용하자면 남자들은 노출 충동과 표현 욕구가 억압되자 그 욕망이 보려는 욕망으로 바뀌었고, 억압된 욕구는 성적 죄책감으로 나타나면서 그 심리적 부담을 여성에게 투사하여 여성들을 비난하게 된 거래요. 억압과 전이!

이후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부르주아 가정에서 여자들은 패션의 선봉장이 되었어요. 남편의 경제적 성공을 여자들의 화려한 패션으로 드러냈던 거죠.

사회적 지위가 낮고 직업을 가질 수 없었던 여자들은 남자들보다 패션을 더 중요하게 여기게 됐고,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지 못했다는 결핍을 달래기 위해 겉모습에 치중하게 되었대요. 화려한 치장이 여자들의 속성으로 여겨지면서, 여자와 결부되었다는 이유만으로 패션을 하찮게 여겼대요. 

그러나 패션이 예술로 인정받자, 새로운 패션을 만든 남성은 칭송을 듣는 동시에 남성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대요. 


왜 화장을 할까요?

철학자 프랑스 보렐에 따르면, 인간은 내면의 동물성과 싸우기 위해서 화장을 한대요.

크읍, 세상에나 정말 철학자처럼 생각하면서 화장하는 사람은 없겠죠?  단순하게 화장은 아름다움을 향한 노력인 거죠.


19세기에 바지를 입은 여자는 손가락질을 받았대요. 생물학적으로 여성인 사람이 남장을 했다며 비웃음과 반발을 샀던 거예요. 

바지를 남성의 전유물로 여기면서 여자를 열등한 존재 취급하다니 너무 황당하네요.

페미니스트들에게 바지는 남성의 지배에 맞서는 무기를 상징했대요. 시간은 걸렸지만, 19세기 말에는 이름을 널리 알린 여성들 상당수가 바지를 입었대요. 조르주 상드는 남자 같은 필명과 복장이 투쟁의 일환이었대요. 사회의 편견에 맞서 여성 해방을 주장한 거죠. 오늘날 대중화된 바지는 양성이 평등해졌다는 상징이에요.

복장의 자유는 여성의 신분과 지위를 보여주는 잣대 중 하나라는 것. 물론 남성의 경우도 마찬가지!

어때요, 신기하죠?

옷장 앞에서 고민하는 순간, 우리는 독자적인 인간으로 거듭난다고, 이 책은 이야기하네요.

꾸며야 할 것은 육체가 아니라 영혼이라지만, 역시 외모와 패션은 미적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겐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주제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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