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르본 철학 수업 - 세상을 바꾸기엔 벅차지만 자신을 바꾸기엔 충분한 나에게
전진 지음 / 나무의철학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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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절을 꼽는다면, 단연 고3 시절이에요.

오죽하면 끔찍한 악몽 중 하나가 고3 이 되어 매우 가파른 오르막길로 등교하는 것일까. (군대 다시 가는 꿈과 동급)

건물마저도 감옥 같았던, 그 교실에서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갇혀 있었으니. 

졸업 사진을 보면 퀭 하니 피부도 푸석푸석, 완전 시들시들.

오로지 대입을 위해 달려야 하는 경주마 신세였던 그 시절을, 그 누구도 좋다고 추억하지는 않을 거예요.

왜 그때는 길이 하나뿐이라고 생각했을까...


<소르본 철학 수업>은 스무 살이 되던 2015년, 철학 공부를 위해 프랑스로 간 어느 청춘의 이야기예요.

저자의 이름은 전진. 본명인데 그 이름에 나름 사연이 있더라고요.

고등학교를 졸업할 즈음 부지런히 사고를 쳤다는 저자는 이미 프랑스에서 철학 공부를 하겠다는 계획을 품고 있었대요.

대학 진학을 거부하고 주말 밤마다 불나방처럼 쾌락을 즐겼다네요. 그냥 신나게 놀러 다녔다고 하면 될 것을, 굳이 적나라하게 표현한 것을 보면 본능에 충실한 불나방이 맞는 듯. ㅋㅋㅋ

암튼 그때 막차 시간에 지하철 플랫폼에서 친구의 전화를 받았는데, "너 인생 그따구로 살면 안 된다." 라고 말했대요. 평범한 여고생과는 사뭇 다른 저자의 행보가 친구 눈에는 '그따구'로 보였던 것 같아요. 저자는 그때나 지금이나 열정적으로 쾌락을 추구하고 있는데, 주변 사람들의 평가는 달라졌다고 말해요.


"술 마시듯 불어를 배웠고 춤 추듯 공부했을 뿐인데

예전의 나는 '그따구'였고 오늘의 나는 '걔 좀 봐라'는 평가를 듣다니.

그저 열정의 대상이 바뀌었기 때문일까?

내 생각엔 망나니적 삶과 학구열이 불타는 삶 사이에 태도의 차이가 있는 것 같지 않다.

매번 나를 가장 기쁘게 만드는 일만을 선택했으니.

그러한 대상의 우열은 누가 정하는 걸까?

부모님의 선호나 사회적 기준이 따로 있기 때문에 다들 어마어마한 경쟁을 감수하는 듯 하다.

좋은 게 좋은 거니까. 

하지만 나의 치명적 결점은 바로 남들 말을 지지리도 안 들었다는 사실이다.

하기 싫은 건 피했고 철저히 즐거워 보이는 일만 골랐다.

어른들 말 중엔 들어서 나쁜 것 없는 진리도 있는데 말이다.

... 공부를 통한 자아실현과 거리가 멀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성격.

하지만 놀랍게도 학문의 길을 진득하게 밟는 중이다."

      (68-69p)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고3 시절, 유일한 일탈이 야자를 째는 것이었던 나.

지금 생각해보니 한 번도 반항해본 적 없었던 것 같아요. 왜 이렇게 살아야 하냐고, 내멋대로 살겠다고 소리내지 못했던 것 같아요. 

왜 그랬을까... 이 책을 읽으면서 깨달았어요.


프랑스 철학과 교수가 알려준 철학과 학생이 배워야 할 첫 번째 태도가 있어요.

주제에 알맞은 대답이 아니라 질문에 숨은 모순을 끌어내는 시도를 하라.

철학은 되묻기의 학문이라고.


"좋은 삶이란 걸 공부로 배울 수 있나요?"

"좋은 삶은, 공부로써만 배울 수 있어요."

    (74p)


선문답 같은 교수님과의 대화 덕분에 좋은 삶은 공부로써만 실현할 수 있다는 의미를 이해했다고 해요. 

타인을 돕는 태도, 편견 없는 시선 등 선한 행동이란 그것이 '좋음'이라는 앎으로부터 시작된다고.

철학자가 대중을 끌어안을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재산에 대한 집착이나 육체적 욕구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이 아니라고.

철학자 또한 쾌락을 향한 열정을 알고 있으나 그럼에도 앎을 최고의 쾌락, 흔들리지 않는 가치로 여긴다는 점이 그를 구분짓게 한다고.

저자는 좋은 삶을 북극성처럼 바라보는 공부를 통해서 깨달았다고 이야기해요. '그따구'로 살았기 때문에, '그 이상'을 꿈꿀 수 있다고 말이죠.


늘 문제에 대한 정답만을 찾으라고 배웠던 한국인에게 프랑스 철학은 문제 속에 숨은 모순을 찾는 법을 알려주고 있어요.

정해진 기준에서 벗어난 모든 건 '그따구'로 치부해버리는 우리의 편견과 모순을, 철학이 깨뜨려 준 것 같아요. 쾅쾅쾅!


마지막으로 책을 통해 알게 된 프랑스 68혁명은, 우리 대한민국의 교육을 바꿀 수 있는 본보기인 것 같아서 인상 깊었어요.

1968년 5월, 프랑스 대학생들은 모두에게 열린 교육의 기회를 주장했어요. 대학의 위계질서를 없애고 수평적 구도로 만드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었대요.

프랑스 학생들은 고등학교 졸업 시험인 바칼로레아를 통과하기만 하면 어느 국립 대학이든 지원할 수 있어요. 엘리트 양성기관과 같은 그랑제꼴을 제외하고는 입학생을 선별하는 과정조차 추첨으로 이뤄진대요. 어학 점수를 제출해야 합격할 수 있는 외국인 학생의 경우를 제외하면 프랑스의 국립 대학은 기회의 평등에 기반한 시스템이에요. 저자가 5년 전 유학을 결심한 것도 '모두에게 열린 교육'이 가능한 프랑스에 반했기 때문이래요.

근래 의사협회의 집단행동을 보면서, 과연 수능점수로 의사의 자질을 판단할 수 있는 건지 의문이 들었어요.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잊은 이들에게 <소르본 철학 수업>을 추천하고 싶어요. 혹시 좋은 삶이 무엇인지 알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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