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란 - 박연준 산문집
박연준 지음 / 난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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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박연준님의 시를 읽기도 전에 산문집을 먼저 읽었어요. <모월모일>로 처음 만났고, 산뜻한 모과향 풍기는 일상의 면면을 보았어요.

<소란>은 두 번째 만나는 산문집이에요. 저자에게는 첫 산문집이래요.

오호, 첫 산문!

'첫-'이라는 말이 붙는 순간 뭔가 더 특별해지는 것 같아요.

역시나 시인에게도 <소란>은 남다른 의미가 있었네요. 

제가 읽은 <소란>은 개정판이라서 초판 서문이 함께 실려 있어요.

2014년 가을 서울에서, 시인은 하루살이와의 에피소드를 '오늘 겪은 가장 큰일'이었다고 소개하고 있어요. 

"모든 소란은 고요를 기를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모든 소란은 결국 뭐라도 얻을 수 있게 해줍니다. 하루살이의 미소 같은 것.

괜찮아요. 우리가 겪은 모든 소란 騷亂 은 우리의 소란 巣卵 이 될 테니까요."  (13-14p)

2020년 3월 파주에서, 시인은 화가 조앤 미첼의 말을 빌려, "자신의 취약점을 드러내지 않고는 아무도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뭔가를 느낄 수 없어요.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려면 아주 강해져야 하죠. (메이슨 커리, 『예술하는 습관』, 걷는나무, 2020)"라면서, "맞아요. 소란을 쓸 때, 저는 강했던 것 같아요. 어떤 글도, 『소란』처럼은 쓸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라고 말했어요. (9p)


네, 딱 그 느낌이었어요.

<소란>은 정말이지, 강렬한 첫인상을 남겼어요. 

앗, 이것이야말로 시인의 본질이었구나.

<모월모일>에서 느낀 평온한 일상과는 너무나 대비되는 모습이라, 순간 동일인물이 맞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살면서 사랑은 숱하게 할 수 있지만 첫사랑은 오직 한 번뿐이듯, 시인에게 <소란>은 다시는 쓸 수 없는, 단 한 번의 고백 같은 글인듯.

왠지 은밀하면서 너무도 과감한 고백.

그래서 섣불리 말할 수 없는 시인만의 비밀들.


*

쓰는 것과 시를 쓰는 것은 다르다.

*

쓴다는 것은 '영원한 귓속말'이다. 없는 귀에 대고 귀가 뭉그러질 때까지 손목의 리듬으로 속삭이는 일이다. 

완성은 없다. 가장 마음에 드는 높이까지 시와 함께 오르다, 아래로 떨어뜨리는 일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다.

박살은 갱생을 불러온다.  

...

*

끊어질 듯 이어지는 흐느낌, 입술을 비집고 겨우 나오는 말, 갓 태어난 망아지처럼 온몸에 끈끈한 막을 두르고 일어서려 안간힘을 쓰는 말.

이런 것이 시에 가깝다. 숨쉬지 않는 부동의 망아지들이 원망스러운 적 많았으나 혀로 핥으면 살아나기도 했다.

절박함이란 목이 가느다란 것들이 타는 그네다.

*

따끈따끈한 두부 두 모에서 김이 피어오르는 순간!

김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전속력으로 시를 쓰다, 식은 두부를 먹으며 천천히 시를 고치고 싶다.

그러나 진짜 중요한 사건은 두부를 만들기로 마음먹기 전에 일어난다.

그'전'에 뭔가 중요한 일들이 벌어졌다.

*

끝내 시 속에서, 인생을 탕진하고야 말겠다.    (137-139p)


아무것도 몰랐던 것 같아요. 시가 무엇인지, 시를 쓴다는 게 어떤 심정인지.

어쩌면 절박하고 치열한 시의 세계를 꺼려했던 건지도 몰라요. 

아름답고 예쁜 시만 보려 했으니.

시인의 시집 대신 산문집을 읽으면서 시는 잘 몰라도 시인에 대해 알게 되었어요. 

소란한 세상에서 나만의 소란을 찾는 길.

문득 한용운 시인의 <님의 침묵>이 떠올랐어요.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처럼 <소란>이 제게는 긴 여운을 남겼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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