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이 깊은 바다
파비오 제노베시 지음, 최정윤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1월
평점 :
절판


처음 수영장에서 수영을 배우던 날이 생각나네요.

잔뜩 겁을 먹고 몸에 힘을 줬더니 자꾸만 가라앉아서 도저히 몸을 쭈욱 펼칠 수가 없었어요.

몸에 힘을 빼야 물 위에 뜬다는 걸 아무리 얘기해줘도 시도조차 못했는데...

우연히 물에 빠져 버둥대다가 알게 됐어요. 


『물이 깊은 바다』는 파비오 제노베시가 2017년에 발표한 자전적 소설이라고 해요.

"...별난 가정에서 자라는 것은 저주인 동시에 놀라운 일입니다.

숨막힐 정도로 애정이 넘치고 우스꽝스러운 여행이라고 할 수 있죠.

어깨 너머에 산이 있고 지중해가 인접한 자그마한 마을을 방문하는 동안

여러분도 숨이 턱 막히고 심장이 두근거리는 놀라움을 경험하시길 바랍니다.

또한 나의 집, 내 가족의 집은 바로 여러분의 집이라는 것도 깨닫게 되길 바랍니다."

     - 2019년 12월 파비오 제노베시 [한국어판 저자 서문 중에서]


바닷속이 얼마나 깊은지는 들어가봐야 알지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점점 그 깊숙히 빠져드는 느낌을 받았어요.

여섯 살 파비오는 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자신과 가족들이 괴짜라는 걸 전혀 몰랐어요.

참으로 우습죠?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사람들이 더 이상한 건데, 우리는 그들에게 깜박 속아서 정상인 척 흉내내고 있으니까요.

파비오에겐 부모님과 열 명의 할아버지들이 있어요. 

외할아버의 노총각 형제들인데, 이 대가족에서 태어난 아이가 오직 파비오뿐이라서, 이들 모두의 손자가 된 거예요. 

파비오가 가족의 저주 이야기를 들은 건 우연이었어요. 엄마와 테레사 아줌마의 대화에서 분명 "이게 다 그 저주 때문이야"라는 말을 들었거든요.

엄마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못박았지만 파비오가 계속 졸라대자 말해주셨어요.

"정말 아무 일도 아니란다, 파비오, 우리 집안 남자들에 대한 터무니없는 이야기야.

마흔 살이 될 때까지 결혼하지 않으면 미치광이가 된다고들 하더라. 이게 다야."  (28p)


파비오는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아빠 조르조는 마흔 전에 리타와 결혼했으니까.

괴짜 할아버지들, 아니 정확하게는 삼촌들이 이상하게 행동하는 건 파비오도 이해할 수 없지만 그들을 사랑해요. 삼촌들도 파비오를 엄청 사랑해서 한시도 가만두질 않아요.

낚시며 사냥이며 어디든 데리고 다니려고 하죠. 학교에 가기 전까지는 또래 친구와 놀아본 적이 없을 정도였죠. 

하지만 학교를 다니게 된 파비오는 삼촌들 극성에 지쳤고, 그걸 알아차린 아빠가 구해줬어요. 매일 오후 파비오를 바다에 데려가 페달보트에 태워 고요한 바다로 도망쳤어요.

어느날 아빠가 난데없이 "이제 다이빙하자"라고 말했고, 파비오는 숨이 멎는 듯 했어요. 그래서 물이 차가워서 싫다고 했어요. 조금 무섭다는 말을 덧붙였어요.


"뭐가 무섭니?"

"저기 아래에 있는 거요. 상어, 범고래, 문어, 고래, 왕오징어 말이에요......"

내가 해양 동물들을 줄줄이 말하는 동안 아빠는 그 아래 그렇게 많은 것들이 돌아다니는데

어째서 우리 낚싯바늘에는 아무것도 걸리지 않는 건지 물었다.

난 왜인지 몰랐다.

... 그때, 내 낚싯대의 찌가 움직였다.  (71-72p)


여덟 살 파비오는 낚싯대를 올리다가 그만 바다에 빠졌어요. 발이 닿지 않는 깊은 곳에서는 수영을 해본 적 없는 파비오는 발버둥쳤고 아래로 가라앉았어요.

아빠가 뭔가 말했는데 물을 먹느라 듣지 못했어요. 토할 것 같았고 죽을 것 같았지만 아직 숨을 쉬고 있었고 머리가 물 밖으로 나와 있었어요. 아빠가 한쪽 팔을 뻗어서 나를 잡아 끌어 올렸어요.


"이제 수영할 줄 알지, 행복하니?"  (74p)


저는 이 장면이 인상적이에요. 바다에 빠져 잔뜩 물을 먹었지만 발도 닿지 않는 깊은 바다에서 빠져 죽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 파비오.

수영은커녕 살아 있는지조차 확신이 없는 여덟 살 소년에게 행복을 묻는 아빠.

아빠가 늘 하시던 얘기가 있어요. 네 물고기는 말이야, 파비오, 아무도 잡아가지 않아.

평소 거의 말이 없는 아빠지만 파비오에게 놀라운 인생 교훈을 알려주셨던 거예요. 아마 이 책을 다 읽고나면 그 뜻을 비로소 깨닫게 될 거예요.


아무도 당신의 물고기를 잡아가지 않는다.

이상하게 헤엄치고 마구잡이로 헤엄쳐도 

결국은 당신에게로 온다.   (75p)


돈 대신에 아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선택했던 현명한 아빠는 훗날 또 다른 모습으로 감동을 주네요.

파티에서 초대받지 않은 아빠와 삼촌들이 등장했을 때, 와우, 정말이지 소름돋는 명장면이었어요. 언뜻 영화 <기생충>이 떠올랐는데, 이 영화의 결말과는 달리 통쾌하고 후련해서 좋았어요. 역시 그 아빠의 그 아들답게, 파비오는 행복이 뭔지 아는 사람이었어요. 바로 나만의 물고기!

만치니 집안의 저주, 남들은 저주라고 여기겠지만 그건 뭘 모르는 사람들 얘기였어요.


지금 우리처럼 이상한 것이 저주라면, 잘됐다, 저주 걸린 사람들 만세.  (42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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