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기도
산티아고 감보아 지음, 송병선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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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고 있는 나를 뒤에서 잡는 느낌.

'뭐지?'라며 뒤를 돌아보았을 때 마주한...

멈춰 선 나는, 나를 멈춘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밤 기도>를 읽으면서 꼭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방콕에 도착한 '나'는 샹그릴라 빌딩의 오리엔탈 호텔 4층 방에 있습니다. 창문 밖으로 비가 억수처럼 퍼붓고 있습니다.

샹그릴라 Shangri - La 라는 이름은 '천국'을 의미한다는데, 소설 속 '나'는 전혀 다른 기분입니다.

지금 여기 '나'는 기억하기 위해서 방콕에 온 것이고, 몇 년 전에 이 도시에서 경험했던 모든 것을 글로 쓰려고 합니다.

처음에 '나'를 방콕으로 오게 했던 사건,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내 목표입니다.

소설은 이렇듯 '나'라는 인물의 설명으로 시작됩니다.

그래서 당연히 다음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이 '나'라고 착각했습니다.


"가장 나빴던 것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영사님.

무엇보다 최악은 내 어린 시절이었어요.

지금 이 순간,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무엇이 최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18p)


말하는 사람이 누군지도 모른 채 그의 인생 이야기를 듣는다는 건 꽤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자꾸만 그의 말을 끊고, 질문을 하고 싶은 욕구를 참아내야 하니까.

어쩌면 이런 설정은 작가의 치밀한 계획이 아니었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방콕에 다시 온 '나'는 이야기 속에 등장하지만 철저하게 청자의 입장입니다.

그러니까 <밤 기도>는 마누엘 만리케의 인생 이야기이며, 그 이야기는 '나'의 글을 통해 재탄생하는 것입니다.

살짝 털어놓자면, '나'는 콜롬비아인이며, 인도에 주재하는 대사관의 영사가 되어 파견됩니다.

인도 델리에 도착하고 얼마 안 되어, 갑자기 콜롬비아 외교부의 영사과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습니다. 곧장 방콕으로 가라는 것.

긴급 용무는 방콕의 어느 호텔에서 아편 알약이 든 조그만 꾸러미를 소지한 콜롬비아인이 체포되었으므로 도움을 주라는 것.

태국의 법은 상당히 엄중해서, 이런 종류의 중범죄는 30년 형이 일반적이며 경우에 따라 검사가 사형을 구형할 수도 있어서 외교적으로 힘들고 미묘한 문제라는 것.

태국에는 콜롬비아 대사관이 없고, 일반적으로 말레이시아 대사관에서 담당하는데, 마침 그곳 영사가 공석이라는 것.

'나'는 마누엘 만리케라는 스물일곱 살 청년의 처절한 밤 기도를 들어야만 하는 인물로 정해진 것입니다.

누가 정했는지 모를 운명의 힘으로.


"정말입니다, 영사님. 영혼의 악은 육체에 달라붙어 육체를 변형시키며, 사마귀와 굳은살이나 혹을 만들거든요.

악은 눈에 보이고 냄새도 풍기지요. 나는 어린 시절과 사춘기 시절에 매일매일 그것들을 경험했고,

바로 그런 이유로 대부분의 학급 친구들은 그 체제, 그러니까 증오와 원한 속에서 사는 방법에 편입되었습니다.

하기야 매일 보았던 것이 바로 그건데, 어떻게 다르게 살 수 있었겠습니까?

... 단지 공상하면서 내 마음이 그 끔찍한 감방에서 도망치게 하면 되었습니다.

영사님, 이곳보다 훨씬 더 열악한 곳이었지요.

... 그 시기에 나는 텔레비전에서 <환상특급>이라는 미니시리즈 2회분을 보았습니다.

처음 본 것은 투명인간 이야기였습니다.

두 번째는 시간을 멈출 수 있는 마법 시계를 찾는 어느 젊은이의 이야기였는데,

타인의 시간은 멈출 수 있지만 자기 시간을 멈출 수는 없었고,

따라서 움직일 수 없는 사람들 사이로 마음껏 다닐 수 있었습니다.

투명인간은 내가 원하는 사람이었고, 실제로 오래전부터 그렇게 살고 있어짐나,

타인들의 시간을 동결하는 시계라는 발상은 내게 한 번의 클릭으로 현실을 멈출 수 있다는 꿈을 꾸게 했습니다."  (31-32p)


타인의 인생 이야기를 듣는다는 건 처음엔 어렵지만 어느 순간 푹 빠져드는 지점이 생깁니다.

마누엘 만리케는 자신의 어린 시절이 지금의 끔찍한 감방만큼, 아니 그보다 더 열악했다고 말합니다.

그건 물리적인 열악함이 아니라 '영혼의 악'으로 설명합니다. 소년은 자신의 내면에서 오염시키고 싶지 않은 순수한 뭔가를 지키고자 공상을 합니다.

그때 도움을 준  TV 프로그램이 <환상특급>이었다는 것이 저한테는 스위치 역할을 한 것 같습니다.

낯선 콜롬비아 소년이 옆집 살던 아이처럼 느껴지는 순간이랄까. 아마 이 지점이 없었다면 콜롬비아에 관한 내용들이 물 위 기름처럼 둥둥 떠다녔을 듯.


"... 사르트르가 썼던 것처럼, 우리는 그렇게 삶을 간주했어요.

나중에 나는 『닫힌 방』을 읽었고, 그 책이 제안하는 바를 완벽하게 이해했어요.

마치 그토록 갈망했으면서 빠져 있던 한 조각이 내 세포와 정확하게 맞춰지는 것 같았지요.

그것은 사상의 강도 높은 이해, 즉 무언가가 사실이라는 확실성이었어요.

그래서 사르트르의 문구 중의 하나인 "지옥은 타인들이다"가 수년 동안 내 머릿속에 울려 퍼졌지요.

영사님, 그 시기에 내가 느꼈던 것을 느끼고 경험하지 못했다면,

결코 그토록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110-111p)


마누엘 만리케의 인생은 타인들이라는 지옥이었지만 그 지옥에서 버틸 수 있었던 건 오직 한 사람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하나 뿐인 누나 후아나.

그러니 후아나의 실종은 엄청난 충격과 비극일 수밖에. 사랑하는 후아나를 찾는 것이 마누엘의 인생 최대의 과제가 된 것입니다.

여기서 문득 궁금해집니다. 도대체 마누엘과 후아나에게 조국 콜롬비아는 왜 지옥이었을까.

한 사람의 인생 이야기를 묵묵히 경청하다보면 예기치 않았던 교훈을 얻게 됩니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지금, 낯설고 머나먼 남아메리카 대륙의 북서쪽 콜롬비아라는 나라에서 '민주 안보정책'이라는 이름으로 벌어진 일들이 우리나라 민주주의 역사의 피비린내 나는 장면과 겹쳐진다는 사실에 소름이 돋았습니다. 직접적으로 묘사되지 않았는데도 한 사람의 고백, 즉 밤 기도와 같은 인생을 보면서 확실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밤 기도>는 도저히 뿌리칠 수 없는 외침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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