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진가
모데라타 폰테 지음, 양은미 옮김 / 문학세계사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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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데라타 폰테의 1592년 대화록 『여성의 진가』는 그야말로 엄청난 작품입니다.

어째서 이토록 훌륭한 작품이 역사 속에 묻혀 있었는가는 시대적 물음이 될 것 같습니다.

이 책은 16세기 베네치아의 여성들의 대화라고는 믿기지 않는 내용들이 등장합니다.

모두 일곱 명의 여성이 등장합니다. 가장 연장자이자 과부인 아드리아나, 혼기가 꽉 찬 그녀의 딸 버지니아, 젊은 미망인 레오노라, 그리고 루크레티아라고 하는 나이 든 유부녀와 젊은 유부녀 코넬리아, 젊은 디메사(dimmessa, 겸손한 자 : 미혼의 평신도) 코린나, 그리고 어린 신부 헬레나.

재미있는 점은 책의 형식이 여성들이 나누는 자유로운 대화체인데, 실제 내용은 남성을 옹호하거나 반대하는 의견을 나누는 토론이라는 점입니다. 당시 베네치아의 여자들은 엘리트 여성조차도 구속된 삶을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폰테의 책은 놀라울 정도로 혁신적인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녀가 바로 죽기 바로 전날에, 이 책을 완성했다는 점입니다. 딸아이를 낳다가 생을 달리한 모데라타 폰테.

어쩌면 그녀는 평생 자유롭지 못한 자신의 삶을 한탄하는 대신 책을 통해 울부짖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여성들은 침묵했기 때문에 세상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여성들이 이제서야 용기를 내어 "미투!"를 외치고 있습니다. 억압으로부터의 자유는 저절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세상을 향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여성의 진가』는 여성에게 진정한 자유란 무엇인지를 다시금 되새기게 해줍니다. 페미니즘은 남성을 적대시 하는 게 아니라 여성의 권리를 찾는 것입니다. 억압은 남성이 만든 체제일 수도 있지만 여성 스스로 만든 족쇄일 수도 있습니다. 인간이라면 응당 누려야 할 권리가 여성과 남성으로 구별되어서는 안 됩니다. 여성의 진가를 안다는 건, 단순히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라 세상의 모든 약자를 대변하는 문제입니다.

폰테 자신은 생전에 누리지 못했던 자유지만, 그녀의 작품 『여성의 진가』를 통해 진정한 자유를 누리고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헬레나가 말했다.

".... 우리가 남자들에 대해 나쁘게 말한다면, 그건 우리가 그들을 부러워하는 처지에 몰리게 되는 거예요.

다시 말해 우리가 그들보다 열등하다는 걸 넌지시 암시하는 거죠."

레오노라가 반격했다.

"우리는 부러움 때문에 그들을 비판하는 게 아니에요. 단지 진실을 따라 말하는 것뿐이에요.

어떤 사람이 무언가를 훔친다면, 그는 도둑으로 불려야 마땅하잖아요.

남자들이 우리 권리를 빼앗고, 우리를 부당하게 취급하는데도 우리는 아무런 불평조차 못하고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존재 가치 면에서가 아닌 사회적 지위에서 그들보다 열등한 상태에 있다면, 이건 일종의 학대죠.

세상 속으로 서서히 스며들고, 시간이 흐르면서 남자들이 점차 법과 관습 속으로 편입시킨 학대.

그래서 학대 시스템은 사회 속에 단단히 자리를 잡게 되고, 남자들은 여자들을 괴롭혀서 얻은 자신들의 지위를 권리로 얻었다고 주장하고

심지어 실제로 믿기까지 하는 거죠.   ...."  (79-80p)


퀸이 말했다.

"당신이 그런 식으로 계속 나오면 남자들은 당신을 이해하지 못할 거예요. 그건 그렇고 우리가 항상 남자들에 대해 이런식으로 험담을 하면서 어떻게 그들이 우리를 사랑하기를 기대한단 말이죠?"

헬레나가 말했다.

"한동안 우리가 그냥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있으면 되지 않을까요. 그러면 그들도 태도를 바꾸겠죠."

레오노라가 대답했다.

"우리는 이미 과거에 너무 많이 닥치고 살았어요. 더 많이 닥칠수록, 더 고약한 것만 얻게 됐어요.

만약에 자기 돈을 누군가에게 주었다가 환수하려고 들 때, 그 사람이 돈을 돌려줄 생각이 없을 뿐더러 더구나 돈을 돌려받아야 할 당사자가 입을 닥치고 있다면, 부도덕한 빚쟁이가 그 사람에게 만족가 따위를 줄 리는 만무하죠. 하지만 그가 재판관 앞에서 호소한다면, 정당한 권리로 그의 것을 되찾을 거예요."  (173-17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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