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평선
사쿠라기 시노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4월
평점 :
절판


사쿠라기 시노의 <빙평선>은 여섯 편의 단편을 모은 책입니다.

일본의 정서가 우리와 이토록 비슷했구나라는 걸 새삼 느끼게 되는 작품들입니다.

때가 되면 결혼을 해야 한다느니, 여자는 그저 아들을 낳아야 한다느니, 동네 사람들한테 말 나오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느니 등등...

문득 근래 봤던 영화 <버닝>이 떠올랐습니다. 그만큼 짧은 단편을 읽으면서 영화를 보는 듯한 몰입감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가 뭘까...

분명 서로 다른 주인공이 등장하는 여섯 편의 소설인데도 그 흐름이 전혀 끊기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설충>의 주인공 다쓰로와 시키코의 아슬아슬한 관계, <안개 고치>의 주인공 마키와 야마모토의 애매한 관계, <여름의 능선>의 주인공 교코와 남편 다키의 냉랭해진 관계, <바다로 돌아가다>의 주인공 게이스케와 기네코의 가깝고도 먼 관계, <물의 관>의 주인공 료코와 니시데의 끈질긴 관계, <빙평선>의 주인공 세이치로와 도모에의 안타까운 관계.

저마다 사연은 다르지만 여자와 남자라는 관계로 이어져 있습니다. 그들의 일상은 단조롭고 특별한 사건은 없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는 지극히 평범한 이웃의 모습으로 보입니다. 만약 소설이 아니었다면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소설을 통해서 주인공의 속내를 들여다본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마음의 소용돌이, 눈보라 치는 길을 홀로 헤쳐가는 듯한 느낌. 온전히 마음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라서 주인공의 일상에는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답답했습니다. 현실에 붙잡혀서 옴짝달싹 못하는 주인공의 처지를 이해하면서도 가슴 한켠이 무겁게 짓눌리는 것 같았습니다. 도대체 산다는 건 뭘까, 그냥 살아가는 대로 순응하는 것이 맞는 걸까.

한 번쯤은 마음이 원하는대로 살 수는 없는 걸까.

마지막 <빙평선>은 사쿠라기 시노의 데뷔작이라는데, 왜 이 작품이 그녀의 소설 세계의 원점을 보여주는 기념비적인 작품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숨을 쉬면 가슴이 얼어붙을 것 같은 찬바람, 발밑에는 얼어버린 바다 그리고 달빛은 저 멀리 바다 끝 빙평선을 비추는 그 곳에서 도모에는 세이치로에게 말합니다.

"여기서 떠나고 싶다는 생각 같은 거, 하지 말았으면 좋았을 텐데." (297p)

열여덟 살의 세이치로처럼 우리도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도모에의 이야기가 어쩐지 거짓말처럼 들렸던 것이 실은 거짓말을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어쩌면 이 소설도 소설이 아닌 실화 같아서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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