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밤 김수영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

오오 봄이여

 

한없이 풀리는 피곤한 마음에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너의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더라도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기적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

오오 인생이여

 

재앙과 불행과 격투와 청춘과 천만 인의 생활과

그러한 모든 것이 보이는 밤

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같이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절제여

나의 귀여운 아들이여

오오 나의 영감(靈感)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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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속에서 - 나희덕

 

 

산속에서 길을 잃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리라

터덜거리며 걸어간 길 끝에

멀리서 밝혀져 오는 불빛의 따뜻함을

 

막무가내의 어둠속에서

누군가 맞잡을 손이 있다는 것은

인간에 대한 얼마나 새로운 발견인가

 

산속에서 밤을 맞아본 사람은 알리라

그 산에 갇힌 작은 지붕들이

거대한 산줄기보다

얼마나 큰 힘으로 어깨를 감싸주는지를

 

먼 곳의 불빛은

나그네를 쉬어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걸어가게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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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 김나영

 

 

나는 매일 매일 41일을 살고 있네. 넘겨도 넘겨도 나의 달

력은 41일이 거짓말처럼 반복되지. 거짓말로 눈을 뜨고 거짓

말로 배를 채우고 거짓말을 순산하는 그런 패턴이지. 처음으로

발설하는 이 고백만큼은 참말이네. 거짓말로도 한 생이 무사히

흘러가더군. 그런데 말이야, 무사한 만큼 매일 매일 패배당하는

것 같은 기분, 당신은 이해돼?

 

싫은 것을 좋아하고, 좋은 것을 싫다하고, 하고 싶지 않은 일

을 억지로 하고, 가고 싶지 않은 곳에 억지로 가고, 싫은 사람 싫

다 못하고, 좋은 사람 좋다 못하고 억지로 웃고, 억지로 울었지.

멍든 몸을 빌린 의상으로 가리고 연기하는 단역 전문 배우처럼,

 

나는 나를 빗겨가네. 수천 개의 입술을 형광등 교체하듯 살고

있네. 몸과 마음에 거짓말을 버터처럼 처바르며 살고 있네.

생이 치렁치렁한 사방연속무늬 새빨간 거짓말이네.한 번쯤은 탄

로 날 만한데 두꺼운 분장에 잠식되어가는 나의 맨얼굴. 치욕

은 그런 것이더군- 반성도 없이 하루가 가고 그런 내가 낯설지

도 않는,

 

거짓말은 거짓말로 통하더군. 통이 점점 커지더군. 당신과 내

가 같은 패거리이거나, 세상이 우리를 검은 페이지에 배치했거

, 세상과 내가 한통속이거나. 이상하지? 내 삶이 질 나쁜 스토

리인데도 나는 날마다 무사하게 저녁에 도착하곤 하지. 내가 나

를 밀어낸 자리, 거짓말은 거짓말을 비린내처럼 품어주고, 우리

밤은 아침을 향해 검은 하수처럼 묵묵히 흘러가고

 

  ? 만우절을 위해 준비한 거짓말 아니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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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꿈꾸는 당신 - 마종기

 

 

내가 채워주지 못한 것을

당신은 어디서 구해 빈 터를 채우는가.

내가 덮어주지 못한 곳을

당신은 어떻게 탄탄히 메워

떨리는 오한을 이겨내는가.

 

헤매며 한정없이 찾고 있는 것이

얼마나 멀고 험난한 곳에 있기에

당신은 돌아눕고 돌아눕고 하는가

어느 날쯤 불안한 당신 속에 들어가

늪 속 깊이 숨은 것을 찾아주고 싶다.

 

밤새 조용히 신음하는 어깨여,

시고 매운 세월이 얼마나 길었으면

약 바르지 못한 온몸의 피멍을

이불만 덮은 채로 참아내는가.

 

쉽게 따뜻해지지 않은 새벽 침상.

아무리 인연의 끈이 질기다 해도

어차피 서로를 다 채워줄 수는 없는 것

아는지, 빈 가슴 감춘 채 멀리 떠나며

수십 년의 밤을 불러 꿈꾸는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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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손 - 복효근

 

 

간도 쓸개도

속도 배알도 다 빼내버린

빈 내 몸에

너를 들이고

 

또 그렇게 빈 네 몸에

나를 들이고

비로소 둘이 하나가 된

간고등어 한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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