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랑 - 조동범    

 

 

오랑. 저녁 식탁마다 평화로운 안부는 가득하고, 창문마다 저물녘의 일몰은 천천히 고개를 돌리려 한다. 구름은 무심하고 미래는 누군가의 안위를 향해 모든 불길함을 버리려 한다. 오랑. 하수구를 배회하는 쥐 떼가 연민을 자아내는, 완벽한 저물녘이구나. 그리하여 오랑. 풍요로운 저녁 식탁을 앞에 두고 헤어진 연인의 편지를 떠올리는 것은 오래된 금기라고 누군가 말을 하려 한다. 오랑. 지중해의 바람이 아름답고 완전한 해변의 문양을 배회할 때, 사람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와 흘러간 유행가를 허밍하려 한다. 하수구를 서성이는 쥐 떼는, 여전히 아름다운 오랑, 그곳의 해변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이유를 알 수 없는 두려움처럼, 해변은 어느새 잊을 수 없는 폐허를 상상하기도 하지. 예언서마다 죽음의 문장들은 눈물을 흘리지만, 저녁 식탁의 가족사는 행복했던 과거만을 기억하고 싶어지는구나. 지중해의 바람이 불어오면, 그곳은 아프리카의 어느 슬픔인가? 아니 먼 프랑스의 어느 마을인가? 식탁 위의 촛불은 행복한 가족사를 향해 타오르고, 감미로운 저물녘을 위해 저녁의 식사는 나른한 오늘 하루를 마무리하려 한다. 지중해를 향해 저물고 있는 태양은 느리고 긴, 빛과 어둠을 망설이는 중이구나.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발굴되는 것들을 상상하며, 오랑. 우리는 그것이 폐허의 문장이 아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그러나 폐허 이전의 역사는 폐허를 예언할 수 없는 법. 오랑. 이제 모든 것을 기억하거나 상상하고 싶어지지 않는구나. 그것은 마치 오래전에 죽은 가족들의 무덤을 떠올리는 것처럼, 자꾸만 잊고 싶은 예언이 된다. 바람이 불어오면 식탁은 완벽한 저녁을 향해 한 걸음 더 다가선다. 그러나 오랑. 미래는 어느새 돌이킬 수 없는 폐허와 저녁을 향해 펼쳐지려 한다. 죽음의 문장처럼 오랑. 그리하여 완전한 저녁의 식탁이 영원토록 기억나지 않을지도 모르는, 오랑.

 

* 알제리 항구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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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랄 총량의 법칙 - 박상률

 

 

강연 가서 만난 중학생 아이들

과학 시간에 배웠단다

어떤 물질이 화학 반응을 일으켜

다른 형태의 물질이 되더라도

전체의 질량은 똑같다는 것

(이를 질량 보존의 법칙 또는 질량 총량의 법칙이라 한다지)

 

십대 때 지랄을 떨지 않으면

나중에 어른 되어서 지랄을 떤다고

중학생일 때 지랄을 다 떨어버려야

어른이 되어서 지랄을 떨지 않게 된다고 했단다

자기네들 담임 선생님 그 말씀 하시면서

아주 심각하셨단다

 

아이들 이구동성으로

혹시 우리 담임 선생님이 지금 지랄 떠는 중이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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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밤중에  - 나태주

 

 

한밤중에

까닭없이

잠이 깨었다

 

우연히 방안의

화분에 눈길이 갔다

 

바짝 말라있는 화분

 

,너였구나

네가 목말라 나를

깨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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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김종제 

 

 
 
, 하고 그대를 불러보았더니
꽃 대신 뒤돌아보며 다가오는 비
벼락 하나로 숲의 빗장을 걷어내고
천둥 하나로 강의 창문을 깨뜨리고
안개 짙은 풍경까지 따라와
내곁에 있어라 있어라 오래 있어라
이슬비 나를 두고 가거라 가거라
멀리 가거라 가랑비
숲이라던가 강이라던가 뿌려놓은
(), (), ()
굴참나무와 이팝나무와 가문비나무와
나비와 박쥐와 까마귀와
해와 달과 별과 바람과 구름과
바다와 섬과 남자와 여자와
아아, 온갖 새들이 날아와
온갖 감옥을 만들어 놓는구나
아아, 온갖 꽃들이 날아와
온갖 무덤을 만들어 놓는구나
아아, 온갖 꿈들이 날아와
온갖 동굴을 만들어 놓는구나
하나씩 둘씩 기어나오고 있는
어둠속 벌레 같은 안개가
숲의 마음을 부쉈다가 지었다가
강의 마음을 부쉈다가 지었다가
세상의 마음을 부쉈다가 지었다가
(), (), ()을 뿌려놓는구나
, 하고 다시 그대를 불러보았더니
꽃 대신 그대 속으로 깊은 강물 하나
깊은 산 하나 흘러가는구나
아아, 세상의 길 너무 푸르구나
구도자 안개 그대에게 다가가는
비바람이여, 너마저 푸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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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묘비명 - 푸시킨

 

 

여기 푸시킨 고이 잠들다. 어린 뮤즈와 함께

사랑과 함께 즐거운 시절을 보냈던 고인은

착한 일은 한 적이 없다. 하지만 영혼은 선했다.

그러니까, 좋은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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