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비, 정전 -박정대
아주 늦은 저녁
다시 아비정전을 보네
늘 상 그렇듯이, 불을 끄고 누워
저 홀로 반짝이는 화면을 보네
야자수 정글 사이로 기차가 지나가면서 영화는 시작되네.
코끼리도 보이지 않은 그 야자수 정글은 필리핀이었을까?
두만강변이었을까, 아니면 내 마음속 비 내리는 숲이었을까
아주 늦은 저녁
아비정전을 보며 나는 끝내 코끼리처럼 말이 없네
비 내리는 화요일의 기억들, 기억들이 부슬부슬 비 내리는 화요일
화요일에 비가 내리는데 존 레논은 왜 오노 요코를 사랑했던 걸까
존 레논은 어디에서 죽었지, 정글이었나
삼류 영화 같은 내 기억의 한구석
내가 사랑했던 그녀는 어디에서 죽었지
필리핀의 야자수 정글 속이었나
햇살 가득한 내 청춘의 뒤뜰이었나
아주 늦은 저녁
아비정전을 보며 한 잔의 술을 홀짝거리네
왜 죽었지, 취하지도 않는 저녁 아비는 열차에서 죽어가고
열차는 야자수 정글 사이를 통과해 가는데
불 꺼진 내 마음이 멀리서 반짝이는 혹성 하나를
아득히 바라보고 있는
아, 비 내리는
정전이 씌어지는 음악의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