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밭을 지나며 - 나희덕


 

가을엔 나비조차 낮게 나는가

내려놓을 것이 있다는 듯

부려야 할 몸이 무겁다는 듯

가지가 휘어지도록 열매를 달았던 사과나무,

열매를 다 내려놓고 난 뒤에도

그 휘어진 빈 가지는 펴지지 않는

아직 짊어질 게 남았다는 듯

그에겐 허공이, 열매의 자리마다 비어 있는

허공이 열배보다 더 무거울 것이다

빈 가지에 나비가 잠시 앉았다 날아간다

무슨 축복처럼 눈 앞이 환해진다

, 네가, 네가, 어디선가 나를 내려놓았구나

그렇지 않다면 이토록

사과나무 그늘이 환해질 수 있을까

꿰맨 자국 하나 없는 나비의 날개보다

오늘은 내 百結백결의 옷이 한결 가볍구나

아주 뒤늦게 툭, 떨어지는 사과 한알

사과 한알을 내려놓는 데

오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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