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에게 들켜버렸을 때, 나의 위증이 나의 양심에 취조당할 때, - 이대흠

 

 

돌아섰을 때는 이전의 길을 가기엔 늦은 때이다
그대 나의 스승이여 몇 권의 경전이나 맞춤법 책으로
나를 읽지 말라 삶은 말씀대로 움직이지 않고 맞춤법은
이후의 언어를 모르면서 힘만 센 명문법이다
뒤늦게 나는 기억 속의 그대에게 추방령을 내린다
빛이라 믿었던 그대의 말은 모두 땅속에 있었다
기억은 뱀처럼 가늘다 붉은 혀를 내밀어 나를 감싼다
떠나지 않은 그대여 그대의 모든 가르침을 나는 경멸한다
집 없는 고양이처럼 웅크리고 앉아 나는 황량하다
다 쓴 콘돔 같은 그대 그대로부터 나의 모든 길이 시작됐으므로
그대는 나의 모든 길을 막았다 그대는 쉽게 부러지지 않는다
이미 있는 길은 단단하고 매끄럽다 나는 그것이 내 길인 양 거
품처럼 뛰어다녔다 생의 바닥으로 헤엄쳐서 이른 곳은 바다가 아니다
덧없어라 모든 싸움의 끝은 싸움인 것을 그 싸움으로 저 물줄기처럼
목숨의 줄은 풀어진다
끝이 있는 실이여 아무리 버티어도 저승의 문은 발랄하게 열리고
아무리 꿈꾸어도 결국 꿈은 삶이 아니다 시인은 아무것도 예언하지
못하고 모든 법과 점술가는 과거만을 되새김질한다
내 오랜 벗인 시간이여 너는 어느 허공에 옷 벗는가 네가 벗은 옷들은
보이지 않는 곳으로 날아가고 꽃들이 그 옷자락을 물며 땅으로 떨어진다
모든 아름다운것은 죽는가 묻지 말라 나는 대답을 회피하고 싶은 것이다
거리의 모든 가게들과 모든 사람들의 노래가 살아 있는 것으로 보였으므로
나는 그대를 버리는 것이다 내 안의 그대여 뒤돌아서 걸으면 아무리 가도
그대는 미래로 뒤걸음치는 것이다 이미 먹은 밥을 다시 먹을 수 없고 역사의
페이지 어느 곳 열어봐도 여기 이곳이 세월의 꽃이다
거리에 버려진 담배꽁초 하나와 나의 일상은 무관하지만 모든 비극의 출발은
사소한 것이다 상심 말라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 우리는 충분히 비극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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